2026.05.14 (목)

대학알리

영국을 사랑하는 도시의 불편한 역사

캐나다 속 영국 섬, 빅토리아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문화적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를 마주하다
다문화 사회 진입 속 ‘공존’의 의미 되새기길

미국과 국경을 맞닿아 있는 캐나다 British Columbia주(이하 BC주) 안에는 빅토리아(Victoria) 섬이 자리 잡고 있다. 주 이름에 'British'가 들어가 있기 때문일까. BC주에서도 빅토리아는 '캐나다에서 영국을 느낄 수 있는 도시'로 불린다. 한 섬에서 두 나라를 여행하는 기대를 안고, 기자는 빅토리아로 향했다. 페리를 타고 빅토리아 섬에 들어온 순간, 나는 이곳의 엽서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기자가 묵었던 홈스테이의 호스트 트레이시(Tracy)는 빅토리아 섬이 ‘캐나다 속 영국 섬’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줬었다. 빅토리아는 19세기 중반, 영국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당시 영국 군주였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을 본따 이름 붙였는데, “이 땅은 영국의 통치 아래 있다”라는 상징적인 선언을 한 셈이다. 당시 지명은 땅의 주인을 암묵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의 흔적이 고스란히 이름으로 새겨진 빅토리아는 어떤 통치를 받았을까. 그리고 이 도시는 왜 ‘영국풍’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기자는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영국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한국계 캐나다인 윤진선 교수와 김수잔 빅토리아 시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영국을 사랑하는 마음, 앵글로필리아

 

인종화된 정착민-원주민 관계(racialized settler–Indigenous relations)를 연구하는 윤진선 빅토리아대학교(University of Victoria) 교수는 앵글로필리아(Anglophilia)로 이곳을 설명했다. 앵글로필리아는 ‘영국 애호’라고 번역되며, 영국(식)에 대한 애호, 존경, 호감, 선호를 의미한다.

 

이러한 영국에 대한 사랑은 건물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었다. BC주 의회 건물(British Columbia Parliament Buildings) 본관은 바로크 양식의 세부 장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장식이 조화를 이루는데 두 장식은 유럽 제국이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던 건축 양식이다.
 


건물 내부에서도 영국 왕실의 상징 문양을 볼 수 있다. 특히 189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창문, 200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50주년 창문이 인상 깊다. 회의가 없는 평일엔 일반인에게 개방돼 이들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발표, 정면으로 마주한 빅토리아의 과거


2015년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Canada, 이하 TRC)의 보고서와 권고안이 발표된 이후로, 캐나다 사회는 그동안 외면해 왔던 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론화할 수 있었다. TRC는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에게 저지른 역사적 폭력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다.

영국은 빅토리아 섬을 정착형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 구조로 통치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해 통치했다면, 영국은 원주민 사회를 배제하고 자국민을 이주시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한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는 자치권을 갖고 국가를 형성하면서도 이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원주민 문화 대신 '영국풍'을 이어 나간 셈이다. TRC는 이를 문화적 집단학살(cultural genocide)이라고 규정했다.
 

다시 쓰는 캐나다 원주민의 이야기

영국이 빅토리아 섬에 들어오기 전, 원주민들의 삶은 어땠을까. 윤 교수는 원주민 사회를 단순한 부족을 넘은 정교한 공동체(sophisticated societies)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빅토리아는 정치, 법, 사회 구조가 갖춰져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평화롭던 원주민들에게 영국의 침입은 급격한 전환점이었다. 원주민의 마을 형성, 어업 활동과 공동체 생활의 핵심 지역이었던 이너 하버(Inner Harbour)는 영국이 들어오며 행정•군사•상업의 중심지로 바뀌었고, 원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원주민들은 전통문화와 언어를 지켰다. 공동체 중심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주민들이 계속 토지 권리를 주장하거나 문화 복원 운동을 해도 사회는 듣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투명 인간' 같은 존재였다. 이후 2014년 TRC의 발표로 원주민들의 투쟁이 논쟁의 중심이 됐고, 보이지 않던 싸움이 사람들의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공존’이라는 말의 무게

지금까지 캐나다는 원주민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TRC 권고안(TRC Calls to Action)이다. 캐나다는 과거 원주민을 억압하는 정책을 지지한 인물의 동상을 철거하고, 9월 30일을 진실과 화해의 날(National Day for Truth and Reconciliation)로 지정해 역사적 책임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원주민과 영국, 그리고 현대 사회의 빅토리아는 '공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사회를 다문화 도시로 여길 수 있을까. 김수잔(Susan Kim) 빅토리아 시의원은 ‘문화적 공존’이라는 개념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문화적 혼합(cultural blending)이 때로는 동화(assimilation)를 의미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섞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화"라고 언급했다. 빅토리아는 도시의 공존이 완성된 상태라기 보단,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있는 과정에 가까운 것이다.

 

 

윤 교수도 현재의 공존은 소수 집단의 '적응'을 요구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현재 캐나다는 표면적으로는 다문화 사회이지만, 백인 중심 구조(White supremacy) 속에서 BIPoC (Black, Indigenous, People of Colour)가 더 많이 적응을 요구받는 구조다. 공존은 존재하지만, 완전히 평등한 공존은 아닌 것이다.

한국 사회로 이어지는 질문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도 질문을 던진다.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은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면서도,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김 의원은 "중요한 건 문제를 드러내고 개선하려는 태도"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한국이 과거의 식민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타자를 배제하거나 위계화하는 순간, 같은 구조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종, 국적, 이주 상태는 여전히 차별의 기준이 되고 있다. 경제 중심 가치, 인간 존엄(human dignity), 문화 존중(respect for cultural differences)이 함께 가야 한다. 빅토리아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송연주 대학알리 기자 (thdduswn8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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