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제62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윤가은 감독은 영화 《세계의 주인》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작품상,각본상,여자 신인연기상 등 여섯 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개봉 전부터 관객들 사이에서는 무스포 챌린지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스크린 어디에도 가해의 순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는 한 소녀의 하루하루를 따라간다.비극을 스펙터클로 전시하지 않고도 이토록 마음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12년 전 한 영화가 남긴 숙제에 대한 뒤늦은 응답처럼 느껴진다.
2014년 개봉한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는 사건을 먼저 설명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사진 찍히는 일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현재’의 공주를 먼저 보여준 뒤에야 과거를 되짚어간다. 사건으로 인물을 정의하지 않겠다는 이 순서 자체는 당시로서 드물고 중요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록되고 그 기록이 누군가에게 재생되는 일을 극도로 경계한다. 친구가 호의로 자신의 노랫소리를 녹음해 들려주자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뜻과 무관하게 팬 카페가 만들어지니 얼굴을 함부로 올리지 말라며 날을 세운다. 공주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이미지와 이야기가 자신의 허락 없이 다시 재생되는 순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구조는 스스로 모순에 부딪힌다. 과거를 현재에 틈입시키는 플래시백 편집은 공주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가장 끔찍한 순간의 반복 재생을 관객에게 되풀이해서 겪게 만든다. 특히 가해 현장을 담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벽에 걸린 선풍기의 시점으로 거실을 천천히 훑는다. 감독은 피해자에게 밀착하지 않으면서도 공간 전체의 무심함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지만, 그 의도와 별개로 회전 끝에 사건을 발견하게 만드는 카메라의 움직임에는 계산된 서스펜스의 쾌감이 스며든다. 공주가 그렇게까지 거부했던 재생을 영화는 결국 관객에게 시켜버리는 셈이다.
인물을 가련하고 무결한 피해자라는 틀에 가두지 않으려던 노력도 이 균열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는 공주에게 노래하고 친구를 사귀고 다시 살아보려는 욕망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시종일관 무너지고 도망치는 자리로 그녀를 되돌려놓은게 아니었을까.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통로는 결국 '가련한 피해자'라는 좁은 문에 가까웠다. 세심하고 선의로 가득한 연출조차 완전히 피해가지 못한 이 딜레마는, 당대 한국 영화가 생존자의 고통을 상상하고 재현할 수 있는 폭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한공주》가 끝내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이 재생의 딜레마였다면, 《세계의 주인》은 아예 다른 길을 택한다.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대신, 처음부터 보여주지 않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 영화의 표면적 갈등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반 친구가 주도한 성범죄자 거주 반대 서명운동에 주인공 이주인이 홀로 서명을 거부하면서 시작된다.
영화는 인물이 감정을 터뜨리는 순간에도 그 여운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교실에서 주인이 격앙된 목소리로 자신이 피해자임을 밝히고 장난스레 농담이었다며 자리를 뜬 직후, 카메라는 그 파장을 곱씹는 대신 하늘 높이 떠올라 테니스 코트를 가로지르는 또래 여학생들을 원경으로 담아낸다. 그 위로 바흐의 선율이 BGM으로 흐른다. 상처를 응시하기보다 그 상처를 안고도 계속되는 삶의 활기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이 편집은 평온한 장면과 고통스러운 장면을 인과로 연결지으려 하지 않는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차 안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엄마의 장면으로 예고 없이 넘어가고, 절을 향해 걷는 할머니와 동생의 다정한 뒷모습 곁에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 모임 사람들과 봉사활동을 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 붙는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위로하거나 설명하도록 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대하는 태도에도 같은 절제가 보인다. 주인이 가장 감정을 폭발시키는 세차장 장면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그의 뒤통수뿐이다. 그가 현관 앞에서 엄마의 토사물을 치우며 동생에게 아빠 소식을 물을 때도 익명의 쪽지를 발견하고 홀로 들여다볼 때도 카메라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다. 반면 친구들이 직접 찍은 흔들리는 핸드폰 영상 속에서는 아이들의 몸짓이 스스럼없이 뛰어논다. 감독의 큰 카메라가 인물의 내면에 함부로 다가서지 않으려 물러서 있는 동안, 아이들 자신의 작은 카메라만이 그 자유로움 속으로 스며든다. 이는 얼굴을 감춤으로써 참상을 우회했던 앞선 세대의 화법과도 얼굴에 밀착해 고통을 증언했던 다른 영화들의 화법과도 다르다. 카메라가 인물의 고통이든 생기든 함부로 소유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것이 이 영화가 도달한 또 하나의 윤리라 볼 수 있다.
《세계의 주인》이 급진적인 지점은 따로 있었다. 세상은 주인에게 계속해서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 위축되어 있어야 하고, 침묵해야 하고, 평생 그 상처로만 설명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규칙. 그러나 주인은 그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교무실에 불려가 서명을 거부한 이유를 추궁당하는 자리, 어른들이 시선 둘 곳을 몰라 하나같이 바닥만 보고 있을 때 주인은 유일하게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내 인생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 함부로 말하지 말아줘.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화면의 중심에 놓이는 순간은 영화를 통틀어 몇 안 되게 카메라가 그에게 온전히 자리를 내어주는 대목이다.
친구와 연애 이야기를 하고, 농담을 던지고, 여전히 웃는 주인의 모습이 낯설고 심지어 의심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실은 관객 자신이 갖고 있던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는 편견이 함께 드러난다. 영화의 마지막, 누군가 장난스레 부딪히고 도망치자 주인이 그를 쫓아 화면 밖으로 뛰쳐나갈 때도 카메라는 굳이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텅 빈 그의 책걸상만을 가만히 비춘다. 주인이가 지금 프레임 바깥 어딘가에서 여전히 몸을 부딪치며 놀고 있으리라는 것을 영화는 굳이 확인시키지 않고 믿는다. 상처를 삶 전체의 정체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카메라의 확인 없이도 스스로 자기 세계의 주인으로 남겠다는 선언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지점에서, 인물이 남긴 장래희망란의 짧은 단어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사랑'이라는 그 단어는 이 영화가 상처를 착취하지 않고 지킨 최소한의 예의가 어디로 향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할 때 그 고통은 쉽게 스펙터클이 되어버린다고 경고한 바 있다. 《세계의 주인》은 그 함정을 피해 간다. 비극의 순간을 지워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인물의 존엄을 지킨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관객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본다. 자극과 사이다 서사에 피로해진 우리에게 이 영화가 남긴 것은 고통을 이해하는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조용한 확신이되었다고 믿는다.
[작품 정보] <세계의 주인> (2025, 119분) 감독: 윤가은 / 주연: 서수빈, 장혜진 / 제작: ㈜세모시, 볼미디어㈜ / 제공·배급: ㈜바른손이앤에이
조예원 대학알리 기자 (yewon021075@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