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제62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윤가은 감독은 영화 《세계의 주인》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작품상,각본상,여자 신인연기상 등 여섯 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개봉 전부터 관객들 사이에서는 무스포 챌린지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스크린 어디에도 가해의 순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는 한 소녀의 하루하루를 따라간다.비극을 스펙터클로 전시하지 않고도 이토록 마음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12년 전 한 영화가 남긴 숙제에 대한 뒤늦은 응답처럼 느껴진다. 2014년 개봉한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는 사건을 먼저 설명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사진 찍히는 일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현재’의 공주를 먼저 보여준 뒤에야 과거를 되짚어간다. 사건으로 인물을 정의하지 않겠다는 이 순서 자체는 당시로서 드물고 중요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록되고 그 기록이 누군가에게 재생되는 일을 극도로 경계한다. 친구
*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7월 3일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는 AI 영화 국제경쟁과 함께 대대적인 기술적 전환을 발표하면서 기대감을 모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기자에게 가장 강렬한 잔상을 남긴 것은 재일 조선인 3세 소녀의 서툰 소동을 다정하게 담아낸 극영화 한 편, 바로 손명아 감독의 <트로피>였다. 판타스틱영화제라는 기술과 장르의 최전선에서 기자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울린 순간이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였다. 이 아이러니한 어긋남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걸까. AI 창작자들의 기술적 투쟁: 완벽한 '형식'을 향하여 <부천 초이스 AI 영화 단편 1> 세션 GV 무대에는 젊은 창작자들이 나란히 앉아 관객의 질문에 답했다. 생성형 AI 덕분에 예산과 인력의 한계를 넘어선 이들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온 고백은 기술적 해방감보다는 고단한 투쟁에 가까웠다. <티켓 투 네버랜드> 연출진은 비전공자임에도 AI 툴을 통해 3D 애니메이션을 구현할 수 있었다고 밝혔으나 손가락처럼 미세한 디테일과 정교한 공간 구도를 제어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음을 털어
*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마주친 엉뚱한 진심 유튜브라는 범람하는 생태계 안에서 독보적인 그림을 그리는 이들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유튜버 '빠더너스’를 말할 것이다. 그들이 만드는 영상은 단순히 웃기고 가벼운 스케치에 머물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일상에는 지독하리만치 진지하게 반응하고, 도리어 무거운 현실은 한없이 가볍게 비틀어내는 특유의 감수성. 어떤 장르던지 자신들만의 언어로 소화해내는 그 태도가 늘 좋았다. 유튜브 세상 안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참 낭만적인 결이었다. 그런 빠더너스가 프랑스 칸 영화제 마켓의 문을 두드렸다. 국내 관객들에게 본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코미디 영화를 직접 소개해보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 하나로 떠난 길이었다. 전 세계의 묵직한 담론과 거대한 자본의 예술영화들이 즐비한 마켓 한편에서, 그들은 캠코더로 거칠게 찍힌 캐나다의 한 생소한 독립 영화를 마주했다. 바로 <너바나 더 밴드…> 다. 주인공 맷이 쿵쾅대며 계단을 내려오고, 카메라가 줌인을 사정없이 당겨버리는 초반 시퀀스. 문상훈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칸 마켓에서 소위 말하는 ‘유튜브스러운’
*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비장한 영웅이 아닌, '밀려난 자'들의 우주선 우리는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된 영웅들에게 열광해 왔다. <아마게돈>의 터프한 석유 시추 기술자들이나 <인터스텔라>의 사명감 넘치는 엘리트 조종사처럼, 인류를 구하는 이들은 대개 단단한 스펙과 흔들림 없는 목적지를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극장가를 메운 앤디 위어 원작의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전혀 다른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자신이 왜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와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설픈 중학교 과학 교사다. 그는 사명감에 불타 자원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가혹한 자리에 반강제로 '밀려난' 인물이다. 이 막막한 우주선의 풍경은 오늘날 20대의 현실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사회는 청춘들에게 흔들림 없는 목표와 완벽한 스펙을 요구하지만,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내가 왜 이 치열한 경쟁의 궤도에 던져졌는가"에 대한 혼란이다. 그러나 영화는 말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기억을 잃은 채 고립된 우주선이라는 절망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그레이스가 자신의 본질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