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퀴어포빅한 말이라고?

  • 등록 2021.07.01 19: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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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가 알려주는 퀴어포비아가 되지 않고자 하는 우리에게

 

연인과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주말에는 비가 왔고 질척거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지를 맞출 생각이 신이 나 있었다. 가난한 20대들이었기에 직접 발품을 팔아 구매할 계획이어서 교동으로 향했다. 몇 군데 돌아다니다가 나름 평이 좋던 쥬얼리샵에 들어갔다. 커플링을 맞추러 왔다고 하니 직원 분께서 여러 디자인의 반지를 꺼내서 보여주셨다. 반지를 주로 나에게 끼워주시긴 했지만 처음에는 별 말이 없으셨다. 그러다 내가 애인에게 ‘언니’는 뭐가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자 갑자기 직원 분께서 우정링이라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참고로 언니는 투블럭이다.) 결혼반지는 18k로 하자는 말과 함께 디자인을 고르고 구매까지 진행한 후 나가는 길에도 직원 분은 변치 않는 우정 되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집에 가는 길에 자본주의도 이기지 못한 호모포비아라며 농담조로 웃어넘겼지만 속이 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사실 드물게 일어나지 않는다. 레즈비언인 나의 일상에서도, 무성애자나 양성애자와 같은 퀴어들의 일상에선 꽤나 빈번하게 발생한다. 21세기인 현대, 과거보다는 날것의 혐오를 품는 사람들은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과거에 비해 혐오발언이 줄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는 채 혐오발언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퀴어 포비아가 아니지만 어쩌면 퀴어 혐오발언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그리고 여느 혐오와 마찬가지로 퀴어 조차 퀴어 혐오에 자유롭지 않기에 보다 건강한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에게, 무엇이 퀴어 혐오인지, 퀴어를 존중하기 위해선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매뉴얼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퀴어는 불쌍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했을 때 힘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시스젠더 이성애자도 힘내라고 응수하지만 왜 힘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각박한 21세기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니까 힘내라고 하는 걸까? 그런 의도라면 받아들이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퀴어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몇몇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나의 친구들 뿐만 아니라 내 애인도 퀴어인 자신에 대한 만족도가 아주 높다. 나 역시 남자를 사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적도 없고 세상에 이렇게 멋진 여자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을 뿐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예쁘게 생겼는데 왜 레즈비언을 하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역시나 왜 굳이 퀴어의 위치에 서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그런 혐오가 묻은 표현에 굳이 대답을 해 주자면 넌 왜 이성애자를 해? 가 최선이다. 사실 대부분 기득권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은 퀴어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를 불쌍하게 바라본다. 보살펴줘야 하고 이해해줘야 하는. 그들이 불쌍하게 바라보는 소수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길 바라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퀴어들을 힘내야만 하는 안쓰러운 존재로 바라볼 시간에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해주는 것이 퀴어들에겐 더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이걸 보는 당신! 차별금지법과 생활 동반자법에 관심 가져주세요!

 

2. 퀴어는 당신의 네이버가 아니다 (구인광고 사절)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에게 퀴어는 과연 미지의 영역일 수 있다. 자신들이 속하지 않은 이질적 집단이니 충분히 멀어 보이겠지. 그렇다고 우리에게 함부로 당신의 물음표를 들이밀면 당연히 안된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여러 반응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끊임없는 질문이다.

 

-여자랑 하는 게 좋아? 남자랑 하는 게 좋아?

-여자랑은 어떻게 해?

-제 앞에서 해주실래요?

-쓰리썸 가능하세요?

-무성애자는 뭐하고 살아?

-무성애자는 연애를 어떻게 해?

-무성애자는 성욕이 없어요?

-무성애자는 야동 안 봐요?

-무성애자는 뭐하면서 살아요?

-넌 왜 퀴어야?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런 질문에 대해 경악을 할지도, 어쩌면 뜨끔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수의 퀴어들이 위와 같은 질문들을 받고 넌더리를 친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다. 포르노 속 주인공도 아니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성적 판타지의 주인공도 아니다. 성적인 질문은 누구에게 해도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영역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의 성생활을 누군가에게 말해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퀴어들의 성적 생활이 궁금하다면 그대로 고이 접어 묻어버리고 잊어버려라. 구인광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당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도구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퀴어의 존재를 전설의 동물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광범위한 대답으로는 우리 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각자 개개인의 소중한 삶이 있고 대부분 치열하게 자신의 인생을 꾸려간다. ‘넌 대체 뭐하고 살아?’ 식의 질문은 즉, 무례하게 짝이 없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너는 왜 퀴어야?’라는 질문에 대해서, ‘너는 왜 시스젠더 이성애자야?’라고 응수할 수밖에 없다. 왜 퀴어일까? 왜 퀴어가 아닐까? 개개인은 단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나도 내가 왜 레즈비언인지 모르고 내 친구도 왜 자신이 팬섹슈얼인지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이 왜 그런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타고났는지 모를 것이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니까. 그리고 정 궁금한 게 있다면, 그래서 밤잠을 설친다면 인터넷이라는 광범위하고 꽤나 전문적인 지식들이 분포하고 있는 장소가 있다. 그러니 편리한 21세기 문명을 사용해보길 권한다.

 

3.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많은 경우 퀴어는 자신의 삶과 동떨어져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퀴어들 조차도 퀴어를 만나보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많은 수의 퀴어들이 자신을 숨기고 생존하기도 하고 이따금 부정하기도 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니 시스젠더 이성애자에겐 더더욱 퀴어란 실제 세상에서 만나보기 힘든 존재라고, 그러니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집단이라고 충분히 여길만 하다. 그렇지만 퀴어의 존재는 생각보다 많고 때문에 어디에나 있다.

 

“난 동성애자 상관없는데 내 주변에만 없었으면 좋겠어.”

 

성소수자들이 가장 흔하게 듣는 혐오의 말은 존재를 지우는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존재는 알려지면 안 된다는 듯이 “걔”나 “그거”라는 말로 포장되고 사라진다. 성소수자 친구끼리 우린 볼드모트라서 퀴어니 성소수자니 그렇게 일컬어지면 큰일 나잖아~ 라며 웃고 넘기긴 하지만 뒷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존재를 삭제시키는 말은 어떻게든 사회적으로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범주의 포함 가능성을 내포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례들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호모 플렉시블이라고 커밍아웃했더니 남자도 좋아하는 거 맞지?라고 확인해보는 부모님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했더니 남자랑 소개팅 주선을 해주려는 아빠

-무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으나 여자라도 데리고 오는 엄마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한때의 방황이라고 여기시는 부모님

-이성을 만나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며 이성애를 부추기는 사람

 

위와 같은 말들을 들을 때마다 아 네네 하고 마음속으로 너도 동성애를 안 해봐서 그래- 라는 말이 떠오르곤 하지만 사회생활을 위해 잠시 삼켜두었다. 아예 성소수자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대학교 입학 이후 사회생활 시작의 장이었던 개총에서 내 앞에 앉았던 남자 선배는 자신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며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 선배를 가리키며 “난 얘가 내일 남자랑 결혼해도 이해해줄 수 있어. 다음날부턴 안 만나겠지만.”라는 말로 내게 어필했다. ‘어쩌라는 거지 난 레즈비언인데 내일부터 나 안 보시겠네’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속으로 손절을 쳤고 친구들에게 대학생활이 벌써부터 별로라고 하소연을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의 존재를 제거하는 상황은 수도 없이 마주쳐왔고 우리끼리의 밈으로도 사용하지만 부정당한다는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성소수자의 숫자가 AB형을 가진 사람들의 수만큼 있다고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많다는 거겠지. 하지만 당신이 초점을 맞춰야 하는 점은 말 그대로 성소수자의 수가 많건 적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주변에 성소수자가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정말 없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신이 성소수자의 신뢰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근거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성소수자는 당신의 곁에도 있을 수 있으니 스스로 말을 가다듬고 보다 섬세한 사람이길,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4. 퀴어는 판타지가 아닌 너와 같은 사람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많은 경우 성소수자를 자신의 삶과 무관한 집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젠더 기득권일수록 그런 확률이 커서 그런 걸까? 아주 오래전부터 겹겹이 쌓인 퀴어에 대한 많은 편견들은 긍정적인 의견을 가졌건 아니건 점점 견고해져만 갔다. 그런 편견들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마주하고 구린 냄새는 언제 맡아도 지저분하다.

 

“동성애자랑 같은 기숙사 써도 돼?”

“동성애자랑 어떻게 친구해?”

“나한테 반한 거 아니지?”

“좀 문란한 사람들 아니야?”

 

동성애자는 모두 성에 대한 욕구가 넘쳐나고 모든 동성에게 끌린다고 생각하는, 뿐만 아니라 끌리기 시작하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위험한 존재인 마냥 여기는 편견 어린 말들,

 

“넌 여자 역할이야? 남자역할이야?”

“레즈가..여혐을?”

“숏컷이니까 레즈비언 아니야?”

“니 애인 숏컷이야?”

 

모든 레즈비언이 숏컷이며 숏컷을 사랑하고 완전무결한 정의의 투사 사회운동가일 거라 여기지만 연애를 할 때만은 여자와 남자 역할을 나눠서 사랑할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밖에도 무성애자 친구에게 "00이는 누구랑 있어도 안전하지~"라며 폭력의 위험성에 간과하는 경우와 헤테로들도 동성애물 읽으면서 꼭 무성애자에게 왜 로맨스 소설을 읽냐고, 동성애자들에겐 이성애 물을 읽냐며 물어보는 사례들도 있었다. 또, 게이랑 친구 하면 무슨 느낌이냐며, 성소수자는 모든 다른 성소수자들과 친분을 쌓고 있으며 각각의 성소수자마다 고유한 느낌이 있는 듯 말하는 경우, 양성애자는 동시에 두 명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아니냐, 연애하면 바람피울 확률이 높지 않으냐 하는, 양성애자는 너랑 사귈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입견을 가진 편견은 뱉어지는 즉시 누군가의 가능성을 억제시킨다. 그 내용이 긍정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난 동성애자 좋다고 생각해’와 같은 말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성소수자라는 특징은 우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물론 시스젠더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서 성적 정체성은 큰 역할을 하지만 어쨌든 그게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게 마치 우리의 전부인양 떠들어대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소수자를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하나의 주제라고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학교에서 동성애를 찬반 논제로 지정하고 토론한 적이 있었다. 무조건 찬성과 반대편을 어떻게든 나눠야 했고 좋든 싫든 논쟁을 지속했다. 그 수업에서 나는 배척 감을 느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동성애 찬반 논쟁은 계속되었다. 교수님께선 그 주제를 가지고 수업을 진행하셨고 난 과제를 제출할 때 부당함을 적어서 보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린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고 당신들이 반대를 해도 존재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난 성소수자 이해해’라는 어구도 있다. 본인 딴에는 성소수자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나는 너를 지지한다는 의미겠지만 성소수자는 이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애초에 긍정 부정을 할 대상이 아니다. 난 시스젠더 레즈비언이다. 이성애자들이 왜 이성애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일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존재의 ‘인정’이었다. 우리는 여기 살아 있고 언제든 존재할 거니까 비성 소수자와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게 요지였다. 우리는 불쌍한 존재도 아니고 동정과 연민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당신과 같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같은 사람일 뿐이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다. 우리는 그저 ‘사람’ 일뿐이라고. 나름대로 목표를 세워서 내일로 가려고 발버둥 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와 잘 맞는 이들과 가정을 꾸리고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하기도 하는, 중간고사 공부를 미뤄두고 급하게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나와 같은. 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을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존재’ 일뿐이다. 우리를 수식하는 말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며 그 누구의 업무도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것. 광장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숨지 않고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위해, 일부 사람들이 분별없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기 위해, 어쩌면 여전히 그 누구도 아닌 혐오자의 탓임에도 자신의 탓을 하며 숨어 사는 누군가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김현영 기자 khy42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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