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역 당해볼래?”
지난달 16일, 한 대외활동 사이트에 질문을 올렸던 A씨는 익명의 상대에게 의문의 쪽지를 받았다. '신당역 당해볼래?' 지난 9월 신당역 여성 살인 사건을 언급한 섬뜩한 협박이었다. A씨는 상대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건 끝에 이러한 쪽지를 보낸 것이라고 밝혔다. 느닷없는 공격에도 혹여 상대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A씨는 에브리타임에 해당 내용을 상세히 담은 글을 작성하면서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라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다른 학생들은 댓글로 “예비 범죄자가 아니냐”, “저걸 재미라고 하는 거냐”며 공감과 분노를 전했다.
9월 14일 일어난 신당역 살인사건. 누군가의 입에 그날의 참상은 쉽게 오르내리고, 누군가는 두려워한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흐른 지금도, 한 여성이 죽어갔던 ‘신당역’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피해 사실이 가해의 근거가 되는 일은 놀랍게도 빈번하다. 2차 가해는 2차 피해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피해자에 대한 추가적인 모욕을 방지하고자 하는 용어다. 사회에서 2차 가해는 단순히 ‘부정적인 반응’보다 더 다양한 양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나 배척 외에도, 범죄의 책임을 전가하거나, 가벼운 가십거리로 입에 올리는 행위 역시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진정, 우리 사회에서 2차 가해에 대한 규탄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가해 사실만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2차 가해는, 특히나 성범죄와 같은 여성 혐오 범죄에서 자주,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원인은 다양하다. 핵심은 2차 가해의 주체가 지니는 ‘권력’, 그리고 범죄의 본질에 대한 무감각이다. ‘여성혐오’ 관련 범죄는 두 요인이 모두 맞물리는 지점이다. 박현이 서울시립청소년문화센터 부장은 “권력 차이가 확실히 보이는 폭력 사건에서 2차 가해가 심각하게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특히나 ‘젠더 이슈’가 한국 사회에서 꾸준히 대두되며, ‘여성 혐오’ 사건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는 한편, 의도적인 배척은 복합적으로 이어져 왔다.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해당 사건은 불법 촬영과 스토킹, 여성 살해까지 전형적인 여성 범죄의 표본이 모두 얽힌 미소지니의 온상이었다. 한 생명이 꺼져 간 역사 화장실은,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은 없다는 현실을 사회에 드러냈다. 한편으로,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증명했다. 사건의 잔혹성과 모순되는 불특정 다수의 뒤틀린 반응 앞에, 한 역무원의 죽음을 목격한 여성들의 두려움은 무색해졌다.
신당역 사건, 짙어지는 그림자
가해자에게 부여되는 서사
신당역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2일 뒤, 이상훈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이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신당역 사건’에 대한 부적절한 답변을 하며 논란이 됐다. 그는 가해자의 동기를 두고 ‘좋아하는데 받아주지 않으니까 여러 가지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가해자에 대해 ‘서울교통공사 정도를 들어가려면 나름대로 열심히 사회생활과 취업 준비를 했었을 31세 서울 시민 청년. 피해자도 마찬가지’, ‘가해자든 피해자든 부모 마음이 어떠하겠나. 다음 주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는데, 아버지의 마음으로 미뤄봤을 때 헤아릴 수 없게 억장이 무너질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가해자에게 부여되는 서사’는 여성 혐오 범죄 후에 이어지는 전형적인 유형의 2차 가해다. 가해자를 한 사회 구성원 혹은 한 사람으로 이해하며, 대중들은 은연중에 그의 범죄 사실을 참작하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선상에 두거나, 가해자에게 부여된 서사에 집중하다 보면 피해자는 외면당하기에 십상이다. 피해자를 두고 ‘내 딸’이라고 칭하며 공감하는 반응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워지는 범죄의 본질
신당역 살해 사건의 본질은 ‘여성 혐오’에 있다. ‘여성’이라는 피해자의 성별이 범죄의 근거이기에, 살인 사건 중에서도 ‘페미사이드’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도한 뉴스의 댓글에는 ‘일반적인 범죄’에 반응하는 듯한 댓글이 상당수 달렸다.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를 외면하는 ‘국가’에 대한 비난. 범인에게 무거운 형량을 내려야 한다는 분노. ‘피해자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언급과 문제 제기는 찾기 힘들었다. 그렇게 ‘여성이 안전한 곳은 없다’는 사건의 본질이 흐려졌다. 피해자의 죽음의 이유가 사라진 것과 같다.
또 사건 개요 중 가해자의 오랜 기간 스토킹 전적이 논란이 됐다. 그러나, 일부 대중은 ‘스토킹은 둘 사이의 문제다’, ‘치정 문제가 아닌가’며 해당 사실을 일축했다. 이러한 몰이해는 스토킹이 범죄라는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이는 일부 대중의 ‘중립 선언’으로 이어졌다. 명백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범죄에서, ‘중립’이라는 개념은,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포한다. 스토킹을 남녀 간의 치정 문제로 이해한다면,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뒤틀린 사회의 관념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닌, ‘타인’의 안타까운 죽음만으로 뭉뚱그려진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죽음이 변질되는 2차 가해다.
남성들의 반응
신당역 사건을 목격한 여성들의 불안과 분노의 목소리는 빠르게 번졌다. 대부분은 ‘여성 혐오를 멈춰라’, ‘지하철역 화장실조차 안전하지 않다니,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며, 사건 전반의 여성 혐오적 요소에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에 일부 남성들의 반격이 뒤따랐다. ‘모든 남성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느냐’, ‘남성도 안전을 위협받을 때가 있는데 여성의 안전이 사치라는 것을 말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피해자에 대한 연대와 여성 혐오를 규탄하는 목소리는 변함없이 남성들에 대한 공격으로 방향이 왜곡되었다. 또한 여성들의 두려움에 대해 ‘무섭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어떻냐’와 같은 조롱성 반응을 해당 사건을 보도한 뉴스의 댓글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부 대중의 배타적인 태도는 피해자와 같은 젠더를 공유하는 사회 구성원의 실질적 두려움과 분노, 규탄의 목소리를 상쇄한다.
남아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번 사건의 2차 가해와 이로 인한 사회적인 병폐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여성 인권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운동가의 목소리를 들어 보았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한다.
중앙대학교 성평등위원회 8대 위원장을 역임한 송지현입니다.
-중앙대 성평위가 이미 폐지됐다고 들었다.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폐지 전에는 위원장, 총괄 업무를 도맡았다. 성평위는 본디 학생 자치 안에 있는 자치기구였는데 폐지 후에는 ‘대학’의 경계를 넘어서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성 평의 의 이름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운동이나 다른 여러 대외적인 사건들에 개입해오기도 했다. 역할 체계를 가리지 않고 각 위원이 할 수 있는 개인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반응 중, 스토킹의 본질을 ‘치정’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토킹 범죄 사건은 ‘치정’으로 진단하는 것은 그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고, 또 피해자를 지우는 행동이다. 피해자의 반복적인 신고 이력 등 지난 행적을 돌아봐도 그러하다. 그래서 스토킹이라는 행위 하나만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지난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싸워 왔던 피해자의 모습을 이해해야 한다. 치정 관계라는 표현은 둘 사이에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그 개인사를 추정하게 유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 혐오 범죄가 개인사로 치부되며 공적인 영역으로 발화되지 못했던 것은 역사에서도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스토킹 살해 사건의 본질은 결국 이 둘의 관계가 정말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연애나 치정 같은 상호 간에 성립하는 단어는 사건 자체를 잘못 본 것이다. 사건의 본질은 이것이 ‘여성 폭력’이었다는 것이고, 여성 폭력에 있어서 사법 체계에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여성 혐오 범죄가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 치안이 문제다’,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고 가해자의 처벌이 약한 것이 말이 되느냐’ 등 사건의 본질을 지우는 반응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경우, ‘여성 혐오가 지워진 범죄’로서의 인식 역시 2차 가해라고 생각하나.
2차 가해라는 단어보다는 본질을 왜곡하고, 구조적인 차별을 삭제시키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혐오 범죄의 가장 큰 특징은 범죄가 발생했을 때, 범죄 이후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적이고 즉각적인 공포심이다. 근데 그 공포를 뭉뚱그리는 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여성들에게도 가해하는 발상이다. 여성 혐오라는 걸 모르는 것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많은 이들이 ‘강남역 사건’을 떠올렸던 이유는 남성에게 여성이 죽었고, 누구나 안전해야 할 공공장소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인, 일반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아니라 여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적인 맥락을 읽어야 한다. 단편적으로 살인사건으로 치부한다면 이 사건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차별의 문제를 망각하는 행동이기에 그렇다.
-본 사건에 대해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반응이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중립’은 여성 폭력 사건에서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이는 중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상당히 가해자 중심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 거의 유행처럼 쓰이게 된 시기는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다. 백래시의 흐름 속에서 상당히 절대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단어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권력자와 피 권력자가 명백한 사건에서 중립이라는 단어는 사실 강력한 의견 표명이다.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찬성과 반대 논쟁거리처럼 여기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2차 가해가 당연히 맞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말은, 무조건 피해자의 편이라는 게 아니라 피해 여성에 대한 이해가 얄팍한 기울어진 사회에서 구조적인 맥락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맥락이다. 무조건 피해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닌데, 보통은 이렇게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중립을 주장하곤 한다. ‘여자 편’, ‘남자 편’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반페미니즘적인 요소들이 이러한 말을 나오게 하는 거라고 본다. 보통은 피해자 편에 서는 이들이 페미니스트들인데, 무조건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치부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 범죄에서 유독 2차 가해가 자주, 또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첫째는 사회가 너무 남성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모 시의원의 발언처럼 남성의 서사에 먼저 귀 기울이고, 남성의 피해는 극대화하는 사회 분위기 자체다. 하지만 2차 가해의 주체들은 이 사건이 구조적인 혐오와 차별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으로 보인다. 여성 혐오 사건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인 사건으로 본다는 의미다. 대통령도 ‘구조적인 성차별이 없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구조적으로 본다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매우 많아지지만, 개인적인 사건으로 보면 악마 같은 개인이 운이 없는 피해자를 죽인 것에 그친다. 하지만 “여성 혐오가 맞다”고 발화하면 해결해야 할 부분들이 많아지고, 인정해야 할 부분도 많아진다. 여성 혐오 범죄는 역사가 있고 반복되는 사건들이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이 명제에 대한 반발로 2차 가해가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폭력이 구조화된 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성 살해를 멈춰라”는 말에 “저 범죄자가 잘못한 건데 왜 남성을 가해자 포지션으로 몰아가느냐”는 반응이다. 본인이 지니는 가해자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에서 2차 가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현재 교차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중인데,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당연히 남성이 약자나 소수자가 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계급, 성적 지향 등 다른 정체성으로 하지만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정체성만으로는 소수자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성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당하고 폭력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전제를 인정하고 나서 피해자와 공감하고 여성들과 연대를 해야 이 구조적 차별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 노력을 공격으로 받아들여서 반격이 나타나는 거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 혐오 범죄의 2차 가해가 타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또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부분이 있는지.
여성 혐오 범죄는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피해자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자들이 두려움과 공포, 위협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회적인 상호작용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여성 혐오 범죄라는 것을 묵살하고 2차 가해가 이루어진다면, 이런 ‘너무 당연한’ 공포가 병리적이고 개인적인 현상으로 변질된다. 구조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이 겪는 집단적 공포가 피해망상이 되는 것이다. 즉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작용조차도 억압받는 것이다. 또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이해가 없는 2차 가해는 문제의 해결에만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다. “세상에 이런 문제들이 많으니까 여자들이 조심하라”는 굉장히 구시대적인 편견과 발상을 재생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여성들이 설 곳은 사라진다. 숨어야 하니까. 사회에 남은 여성들에게는 사회가 나아지겠다, 개선되겠다는 희망이 사라지고, 범죄 재발에 대한 두려움 역시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담론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인 자정 작용을 일으켜야 정치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논의할 초석이 다져지는 게 아닐까 싶다.
혐오의 ‘개미지옥’
2차 가해는 첫 번째, 두 번째 따위의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 혐오 범죄 이후 여성들은 수없이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페미사이드의 발생, 이에 대한 2차 가해, 그리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죽음’이다.
신당역 사건 역시 예외가 아니었듯, 이어지는 2차 가해에 대한 경각심이 없다면 똑같은 일은 결국 반복된다. 이는 여성 혐오적 관념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잠재적 위험 요소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성 혐오와 2차 가해는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이어가며 재생산된다.
많은 이들이 신당역 살인 사건을 바라보며 강남역 살인 사건을 회상했다. 그때부터 6년이 흐른 지금, 사회가 달라지지 않은 이유는 그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여성이어서 죽었다는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뭇 대중들은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고 비난했다. 피해자의 울부짖음을 묵살하고, 가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역사가 2022년, 신당역 화장실의 범죄자를 키웠다.
누군가의 죽음은 때때로 변화의 도화선이 된다. 하지만 사회가 그대로인 이유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죽음을 변질시키고 지우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할까 두려워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거나, 피 권력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가 연대하며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해야 하지만, 2차 가해의 끝에는 사회의 분열뿐이다. 한쪽에선 애도, 한쪽에선 싸움. 이 부조화가 시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