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퍼레이드는 심장 박동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존중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저희의 프라이드를 숨길 필요 없이 내세울 수 있으니까요.”
최고기온이 34도까지 올랐던 지난 1일, 서울 을지로 2가 일대에서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부스와 퍼레이드를 포함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진행됐으며, 주최 측 추산 5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행사장에는 휠체어 이용자들을 위한 보행로와 간이시설이 마련됐으며, 수어 및 문자 통역 서비스도 제공됐다.
올해 퀴어퍼레이드 장소는 서울시가 5월 3일 서울시청 앞 광장 사용을 불허하면서 을지로로 채택됐다. 주최 측은 지난달 7일 ‘2023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 개최 발표 기자회견’에서 을지로 선정 이유에 관해 “참여자들의 안전을 위해 경사가 없고 고립되지 않으며, 혐오 세력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 장소를 채택했다”고 밝혔다.
이번 축제의 슬로건은 ‘피어나라, 퀴어나라’였다. 주최 측은 “여러분의 퀴어한 삶이 다채롭게 활짝 피어나기를,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염원한다”라는 뜻으로 해당 슬로건을 정했다고 알렸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부스는 총 58개로, 대학교의 성소수자 모임과 사회단체, 각국 대사들이 거리를 지켰다. 오후 2시에 시작된 환영 무대는 약 오후 4시까지 이어졌으며, 싱어송라이터 ‘이랑’과 소수자연대풍물패 ‘장풍’ 등 4팀이 무대에 올랐다. 오후 4시 30분부터는 종각역과 서울광장을 거치는 행진이 시작됐으나, 인파가 몰린 탓에 일부 행진팀은 2~30분가량 출발이 지연됐다. 마지막 행사인 축하 무대는 4인조 밴드 ‘발리카터’와 퀴어댄스팀 ‘큐캔디’ 등 3팀이 무대에 오르며 마무리됐다.
을지로의 인파와 서울광장
본래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던 서울 광장에서는 이날 CTS(Christian Television System) 문화재단의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가 열렸다. 5월 3일 시민위원회(이하 시민위)는 동일한 날짜에 서울 광장 사용을 신청한 두 행사에 관해 CTS문화재단의 행사가 공익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다. 시민위 심의 속기록을 살펴보면, 퀴어퍼레이드를 ‘논란이 있고 문제가 있는 축제’라고 칭하는 등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드러난다.
지난 1일 퀴어퍼레이드의 행진은 많은 인파가 몰린 탓에 출발 시간이 지연됐다. 몇 해 전부터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했던 숭실대학교 성소수자 모임 ‘이방인’의 온도씨(활동명)와 서강대학교의 실버씨(활동명)는 이날 마지막 6호 차량 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약 1시간을 기다렸다. 그들은 “원래 축제가 열리던 서울광장은 부채꼴 모양이라, 행진 차량 한 대가 출발하면 그 뒤부터는 길이 트여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며 “을지로는 일 자로 된 도로이다 보니 더 정체가 심하고 (인구) 밀집도도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행진이 시작된 오후 4시 무렵의 서울 기온은 30도에 달했다. 서울 광장과 달리 아스팔트 도로로 된 을지로 행사장 바닥은 열을 그대로 흡수했다. 온도 씨와 실버 씨의 말처럼, 일 자 도로 위에 마련된 행사장은 구석으로 비켜서지 않으면 인파에 휩쓸릴 정도로 밀집도가 높았다. 행사의 조직위원장인 양선우씨는 모든 행진 차량이 출발할 때까지 마이크를 쥐고 “여러분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천천히, 천천히 이동해달라”며 참가자들을 통솔했다.
같은 날 서울 광장에서는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1,900평인 서울 광장에는 야외무대와 12M 마스코트 인형, 약 20개의 부스가 설치됐다. 카카오맵과 실시간 도로 상황 사진을 통해 확인한 결과, 서울 광장의 인파는 을지로에 비해 적었다. CTS에서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한 축제 영상 속에는 무대 맨 앞에 약 20명의 사람이 모여앉아 있었다.
주최 측은 청년층의 심신 회복을 위한 토크 콘서트와 퍼포먼스가 진행됐다고 밝혔으나, 바로 옆에선 ‘거룩한 방파제’의 ‘통합국민대회(구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가 함께 열렸다. 프리랜서 기자 라파엘 라시드씨는 현장에서 촬영한 영상을 트위터에 업로드하며 ‘이런 넓은 공간이 정말로 필요했을까’라고 반문했다.
한편 이번 퀴어퍼레이드가 을지로에서 열린 것을 두고 온도씨를 비롯한 일부 참가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온도 씨는 “오히려 혐오 세력이 축제장을 둘러싸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는 “인도 바로 옆에 있어서 더 개방적인 느낌이 든다”고 밝혔다.
우린 모두 다르지만 함께한다, 퍼레이드 속의 군중들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 나를 숨기고, 감춰야하는 세상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성균관대학교 성소수자 모임 ‘퀴어홀릭’의 견우 씨(활동명)가 말했다. 이날 퀴어홀릭은 퀴어퍼레이드 부스에 참가해 △퀴어나라 신문고 △한반도 퀴어실록 △퀴어 성어 포춘쿠키 등의 콘텐츠를 선보였다.
특히 많은 참가자의 이목을 끌었던 ‘퀴어나라 신문고’에 대해 견우 씨는 “(그동안) 국가 단위에서, 행정 단위에서 벌어지는 성소수자 차별이나 정치인들의 혐오 발언이 많아 국민 사이에 상처가 너무 많다고 느꼈다"며 "그런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신문고가 있었다. 이 부분을 퀴어적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현대에 가져와 보고자 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밝혔다.
견우 씨는 퀴어퍼레이드의 ‘연대감’과 ‘지지감’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내 주변의 동료들,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스스로를 내보일 수 있다는 점 자체가 퀴어퍼레이드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견우 씨는 이번 퍼레이드의 개최 과정에서 ‘무지개 줄서기’를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무지개 줄서기’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퀴어퍼레이드 코스 확보를 위해 집회신고 줄서기에 참여한 활동이다. 그는 “서울 광장 사용 불허가 떨어졌을 때 그만한 장소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주최 측에서 장소를 잘 찾아주셨다”며 “무지개 줄서기에 참가했던 경험은 저에게도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더 많은 사람이 원하는 가족을 이룰 수 있는 사회가 진짜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퀴어퍼레이드에는 정의당을 비롯해 여러 진보 계열 정당이 참가했다. 그중 하나인 녹색당은 당원 가입 및 후원 시 제공되는 퀴어 굿즈를 선보였다. 올해로 창당 11년을 맞이한 녹색당은 매년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있다. 특히 부스 소개란에 스스로를 ‘자타공인 퀴어정당’이라고 밝히며 성소수자 지지 정당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구 대표 김혜미 씨는 “서울 광장에서 을지로로 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활기차고 많은 분이 축제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며 축제 참가 소감을 전했다. 그는 이번 퍼레이드가 을지로에서 열린 것에 대해 “내년 퍼레이드는 당연히 서울 광장에서 열려야 한다”며 “진짜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를 위해 녹색당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바뀝니다, 세상이"
성소수자 부모 모임의 영남 지역 참가자 A씨(여)가 인터뷰를 마치며 말했다. A씨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제 아이는 레즈비언입니다”라는 말로 자기소개를 대신했다. A씨는 “평소 자기 정체성을 잘 표현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오늘 같은 날 와서 마음껏 표현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니 저도 너무 좋다”며 퍼레이드 참가자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번 서울시의 광장 사용 불허에 관해선 A씨 역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오세훈 서울 시장님께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각 나라의 대사도 다 나와서 축사를 하는 마당에,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아무것도 안 보려고 하는 것 같다. 부끄럽게 생각하셔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A씨는 부모가 자식의 성정체성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관련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라고 했다. 만일 청소년들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고 싶다면, 평소 이에 대해 조금씩 자주 이야기하는 방법을 권했다. 그는 “나 역시 처음 딸의 커밍아웃을 접했을 땐 당황스러웠지만, 부모 모임에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하며 시야가 트였다”고 설명했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이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에게 지니는 의미는 크다. 성소수자라면 한 번쯤은 커밍아웃 문제, 가족 관계 문제에 대해 고민해 봤을 것이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은 그런 이들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보호자’의 느낌을 준다. 그 예시로 한 참가자는 행진 대열에 끼어 이동하고 있는 부모 모임을 향해 “엄마!”라고 외쳐 웃음과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마녀가 나타났다" 찢겨진 광장 사용 불허서와 사람들의 환호
환영 무대 시작은 2시였으나 이미 30분 전부터 많은 사람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서 있어야 했지만, 공연 진행자들이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MC들은 공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기서라도 여러분을 만나 다행이지만, 저희가 왜 여기서 퍼레이드를 열어야 하는지 화가 나기도 한다”며 “함성으로 분노를 표출해달라”고 말했다.
첫 무대에는 작가이자 영화감독, 싱어송라이터 이랑이 올랐다. 이랑은 이날 자신이 직접 쓴 곡인 △가족을 찾아서 △환란의 세대 △늑대가 나타났다를 노래했다. 특히 ‘늑대가 나타났다’는 지난해 10월,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서 행정안전부에 의해 검열을 당했다는 의혹을 받은 곡이이다.
첫 곡인 ‘가족을 찾아서’는 현재 자신이 속해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기시감을 느끼는 화자의 입장을 표현한다. 관객들은 부채나 손을 흔들며 가슴 아픈 가삿말을 함께 노래했다. 다음 곡인 ‘환란의 세대’는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죽을 만큼 괴로워 울부짖는 사랑 노래’이다. 이랑이 직접 본인의 트위터에 정체를 밝힌 이 곡은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는 가사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죽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참가자들 반응 역시 가장 좋았으며, 모두가 떼창을 했다. 마지막 곡인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를 차례가 되자, 이랑은 관객들을 향해 “마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넣으면 재밌다”고 귀띔했다. 노래 안에서 사람들은 자식이 굶어죽은 여인, 배고픈 사람들, 예의 바른 사람들이 부당함을 참지 못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이들을 ‘마녀, 늑대, 폭도’라 부르며 매도한다. 이날, 뜨거운 볕이 내리쬐던 을지로에는 굶어 죽은 자식을 안은 가난한 여인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첫 무대가 끝난 후에는 서울시의 광장 사용 불허서를 찢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진행자는 광장 사용 불허서를 관객들이 볼 수 있게 높이 쳐들고는 “서울 광장을 불허해도 우리는 을지로에서 퀴어축제 한다, 혐오야 떠나라!”라고 외치며 서류를 찢어버렸다. 동시에 객석 뒤쪽에 마련됐던 대형 무지개 깃발이 펼쳐졌다. 성소수자들을 향한 편견과 혐오가 인쇄된 불허서는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그렇게 바닥으로 흩어졌다. 무대뿐만 아니라 행사장 곳곳에는 공연 음향을 들을 수 있는 대형 스피커가 설치돼 있었다. 더위에 지친 이들은 무대 앞까지 가지 않고 행사장 그늘에 앉아 스피커로 공연을 즐겼다.
'우리는 여러분의 동지입니다' 서로가 연대한 퍼레이드 행진
이날 퍼레이드 행진에는 다양한 단체가 함께했다. 부스를 운영했던 대학 동아리와 사회단체뿐만 아니라 각종 정당과 소모임, ‘화분 안 죽이기 시민실천연합’ 같은 재치 있는 이름의 단체들도 참가했다. ‘화분 안 죽이기 시민실천연합’은 죽이지 말아야 하는 화분만 있다면 누구든 가입할 수 있는 시민연합으로, 2016년부터 노동과 퀴어, 환경보호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단체의 깃발들이 오후 4시 무렵부터 을지로 거리를 가득 메웠다.
퍼레이드 행진에는 노동계의 연대도 눈에 띄었다. 민주노총은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민주노총 성소수자 조합원 모임’ 부스를 열고, 행진에는 ‘무지개로 연대하라’는 표어를 단 깃발을 내걸었다. 민주노총은 지난 2015년부터 꾸준히 퀴어퍼레이드에 참석해 왔다.
반면 새롭게 연대의 팻말을 든 이들도 보였다. 2021년 12월 코로나19로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세종호텔 노동자들이다. 당시 세종호텔은 경영난을 이유로 20년 경력의 호텔리어 12명을 해고했으나, 해고자들은 노조 탄압을 위한 부당해고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명동역 앞에서 1년 7개월째 천막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늘 삭막했던 농성장 앞도 이날만큼은 깃발을 든 퍼레이드 참가자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시위자들의 인사로 가득 찼다. 시위자들은 박스를 오린 다음 그 위에 퀴어 퍼레이드를 지지한다는 문구를 써넣어 팻말을 만들었다. 서울 광장과 탑골공원을 거쳐 다시 을지로로 돌아온 행진은 오후 7시까지 이어진 축하 무대를 끝으로 내년을 기약했다.
이날 행진을 함께했던 온도 씨와 실버 씨는 올해로 동거 1년 차인 커플이다. 이들은 인터뷰를 통해 “저희가 동거를 하면서 크게 아팠던 적이 있다. 그런데 부모의 동의 없이는 수술을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어 수술까지는 안 갔지만, 한 번 그런 말을 들으니 앞으로가 걱정된다”며 생활동반자법이 조속히 통과되길 희망했다.
한편 지난 4월 발의된 생활동반자법은 자칫 법안이 동성혼 합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일부 종교계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