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A가 영어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추모 포스트잇)에 to를 붙여 썼어요. 영어를 좋아했으니까...”
14일 신당역에서 발생한 스토킹 범죄 피해자 A씨의 아버지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밤낮으로 울기를 삼 일째, 온몸에 진이 빠졌다. 그럼에도 화장실을 보고 있자니 다시 울분이 터졌다. 신당역 ‘여성이 행복한 화장실' 앞은 그의 절규로 가득 찼다. 지켜보던 시민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사건 현장인 신당역 여자 화장실 앞에는 작은 추모 공간이 마련됐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추모 공간에서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하루 사이 책상 위에는 흰 꽃들이 수북이 쌓였고, 그 아래엔 커피와 쿠키가 놓였다. 시민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묵념하고, 인사를 하고 떠나기도 했다. 타일 벽을 메운 색색의 포스트잇에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글귀, 여성 살해를 멈춰 달라는 절박한 요구,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들이 빼곡했다. A씨의 아버지도 힘겹게 몇 자를 적어 벽면에 붙였다. 그리곤 화장실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함께 추모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편하게 잘 살고 있어. 아빠랑 나중에 꼭 다시 만나”
A씨에게 전하는 인사를 끝으로 그는 현장을 떠났다. 고작 사흘 전 여성이 죽은 화장실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화장실 내부는 깨끗하고 고요했다. 여자화장실 앞의 ‘여성 안심 화장실’팻말과 ‘불법촬영 신고 번호 목록’이 눈에 띄었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민은 볼 수 없었다.
피의자 전 모씨(31)는 지난해 10월 성폭력처벌법 위반(불법촬영, 촬영물 등 이용 협박)으로, 올해 1월 스토킹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로 각각 입건됐다. 첫 고소를 하던 지난해 10월까지 전모씨가 피해자 A씨에게 연락을 한 횟수는 350건에 다다르며, 이후에도 ‘합의해 달라'며 20건 가량 연락을 시도했다. A씨는 3년 가까이 불법촬영에 이어 스토킹 범죄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결국 9월 14일, 전모씨는 신당역 화장실로 들어간 A씨를 뒤따라가 흉기로 살해했다. 그는 신당역 역사에서 1시간가량 A씨를 기다렸다. 머리에는 일회용 샤워 캡을 착용한 채였다.
불법 촬영, 스토킹, 살인. 시민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모두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서울 중심 지하철 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당국의 안일한 대응이 더 큰 범죄를 불러일으켰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지난해 10월,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이 기각했고, 경찰이 신변 보호를 1개월 만에 중단하는 등 불법촬영을 가벼운 범죄로 여겼다는 것이다.
국화 한 송이를 들고 현장을 찾은 김지은(32) 씨는 “지나가다 생각이 나서 꽃을 사서 들렀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여전히 약자들에게 공감하지 않고,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조차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 정부에 아무 기대가 없다" “다만 이런 일만큼은 절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제발 여성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지은 씨는 조용히 꽃을 놓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그러고도 한참 눈을 감고 벽 앞에 서 있었다. 나라가 지키지 못한 죽음 뒤, 시민들만이 A씨가 떠난 곳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취재: 심하연, 최희령
보도: 심하연, 최희령
사진: 심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