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할 권리: 임신 중절

  • 등록 2019.04.15 00:00:00
크게보기

 2019년 4월 11일, 오랜 기간 첨예한 갈등을 낳았던 이슈에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낙태죄 위헌소원에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헌재는 2012년 8월 23일 내렸던 합헌판결을 약 7년 만에 뒤집었습니다. 왜 이런 판결이 내려졌으며, 이것으로 인해 무엇이 달라질까요?

(사진=연합뉴스)

-낙태죄 폐지, 무엇이 달라질까?


 그동안 대한민국은 현행 헌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에 의거, 낙태를 행한 산모와 의사는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했습니다. 또한, 모자보건법에 의해 부모가 우생학적으로, 장애, 흠결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한 경우에만 임신 중절이 허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헌재의 헌법 불합치 판결로 국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해당 법률을 개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헌법 불합치’란 사실상 위헌선언으로 법의 위헌성을 인정하지만 위헌 결정일 이후 해당 규정의 즉각적 상실로 인한  법의 공백,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 새로운 법이 개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법의 효력을 인정한다는 헌재의 결정 중 하나입니다.
 헌재는 주문과 함께 “낙태 전면 금지는 위헌이며, 임신 초기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이와 같은 발언으로 미루어 볼 때, 새로 개정될 법률은 임신 초기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7년의 세월: 합헌에서 불합치로


 헌재는 2012년 낙태죄 처벌조항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한 바 있습니다. (참조: 2010헌바402) 합헌 결정의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낙태죄는 장차 태아가 인간이 될 예정인 (미래의)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즉, 낙태허용의 판단 기준은 태아가 생명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기(생물학적 분화시기)를 결정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2. 낙태죄를 폐지한다면 낙태가 자유로워져 사회적으로 낙태가 활발해질 것이다.
3. 사익인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공익인 태아의 생명권에 우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7년이 흐른 뒤 헌법재판소는 어떻게, 그리고 왜 입장을 바꾸었을까요?
2019년의 헌재는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현행 형법 조항에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번 판결에서는 “태아의 보호는 임신 여성의 보호가 전제될 때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밝히며 “임신 초기 낙태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과거에 비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더욱 중요하게 판단하였다는 것입니다.
헌재는 “산모인 여성의 보호가 우선될 때 태아의 생명권에 관한 논의가 가능하며 기존 형법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기결정권은 생명권에 우선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던 과거 판결과는 대조적입니다.
‘태아를 하나의 독립적 생명체로 여길 수 있는 시기’를 낙태 허용 한계 판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점 또한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입니다.  2012년 헌재가 “태아가 생명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정도는 낙태 허용의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고 밝히며 낙태에 있어서 태아 성장 정도 논의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번 판결에서는 낙태 허용기준을 논할 때 장차 입법될 법안에서 태아의 생존 가능 시점을 규정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야기한 동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도 사회의 인식 변화가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대한민국 사회는 낙태 합법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는 ‘오래된’ 낙태법 개정을 위해 정부에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비단 낙태법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한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사실 또한 큰 힘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낙태죄,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법?


 헌법 불합치 판결이 이루어졌지만, 낙태죄 폐지에 대한 찬반양론은 팽팽합니다. 그러나 양 주장의 근거를 따지기 이전에 현행 형법은 언젠가 수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사실상 낙태에 대한 처벌 조항은 이미 오래전에 사문화된 법이라는 의견이 존재했습니다. 낙태 수술 건수에 대한 통계는 그 성격상 결과가 일정하지는 않지만, 보건복지부는 연 34만 2천건의 임신 중절 수술이 이루어진다고 밝혔습니다. (보건복지부. 2005) 그러나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보건복지부 통계 수치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였고, 지나치게 축소되었다고 비판하며 실상 일평균 약 3천건의 수술이 행해진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2017) 또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0년 불법 임신중절 비율은 93.6%에 육박했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10) 그러나 2018년부터 2019년 3월까지 검찰에 21건의 낙태 사건만이 접수되었고, 실제로 기소가 이루어진 사례는 없습니다. (대법원 사법연감. 2019)
이와 같은 통계로 미루어 볼 때, 대한민국에서 행해지는 낙태 수술은 불법 낙태 수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실제로 처벌이 이루어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태죄가 사문화되었다고 하더라도) 낙태죄가 형법에 존재하는 이상, 임신 중지 수술의 음성화 및 이로 인한 고액의 수술비 요구, 의료사고 책임 회피 문제 등 투명한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2018년 8월 26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 관련 헌법 개정 국민투표 결과를 듣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더블린/AFP연합뉴스)


또한 낙태 합법화로 향하는 세계 변화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보수적 가톨릭 국가로 평가되는 스페인은 2010년 낙태를 합법화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국민의 88%가 가톨릭 교도인 아일랜드조차 2018년 국민 과반의 동의를 얻어 낙태죄를 폐지하였습니다. OECD 36개국 중 30개의 국가가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현재, 낙태에 대한 전세계적 시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낙태 합법화, 유의미한 한걸음


 시대가 변화하며 가치에 대한 논의도 그에 발맞춰 변화하고 있습니다. 법은 멈추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66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낙태죄’는 이제 사라집니다. 누군가는 이미 사문화된 법이 공식적으로 사라질 뿐이니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헌법 불합치 판결은 우리 사회가 7년 동안 많은 변화를 이루어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헌재는 이번 판결을 통해 다년간 이루어진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한 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긋난 것’에 분노했고 실제로 변화는 이루어졌습니다. 남아있는 수많은 부조리에 불편함을 드러내고 분노한다면, 이와 같은 변화가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2019년 4월 11일, 우리 사회는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유의미한 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정설 기자 (seol@hufs.ac.kr)

정설 기자 seol@hufs.ac.kr
<저작권자 ⓒ 대학알리 (http://www.univall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