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마와리 후기 1화

2023.06.25 19:06:36

입사에서 언진재까지, 마와리 첫만남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들어가며


나는 2022년 12월에 기자가 되었고 이듬해 3월 그만뒀다. ‘마와리’를 끝내고 사회부에 배속된 직후였다. 주변인들은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끝내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설명하려 노력해 봤지만, 이야기는 사람의 말이 되지 못해 가라앉거나 흩어졌다. 그래서인지 더러는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그건 그만둘 이유가 아니니 계속 해 보라고도 조언했다.


사람의 말과 글로 이 글은 기록이고 변명인데 내가 풀고자 한 것은 이야기다. 그래도 굳이 이야기의 계통을 나누면 기담(奇談) 축에 드는데, 깨어서는 꿈처럼 흐릿한 기억이 막상 꿈을 꿀 때는 생생하게 재연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밤중 종종 그때의 꿈을 꾸고 깬다.


그러나 내 동기들은 여전히 성실하게 기자 생활을 하고 있기에 나는 이걸 오직 내 문제로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좋은 선배들과 함께 회사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치열하게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가 기자를 준비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꺾지 않기를 바란다. 내게 이 일이 지독하게 맞지 않았고, 여기에 더해 나처럼 되지 말라는 반면교사의 표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저널리즘을 믿느냐 혹은 믿지 않느냐와 같은 우문을 던지고 싶지  않다. 내가 겪은 일이 저널리즘의 일부라고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마와리를 돌기 전, 마와리를 도는 혹은 돌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 사실 마와리가 가진 악명에 비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정보나 기록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기자는 사람과 정보를 찾는 전문가고, 마와리 후기를 바탕으로 그 기자가 어떤 회사의 누구입니다라는 것을 특정하는 것은 어린애 사탕 빼앗기보다 쉽기 때문이다. 워낙 좁은 데다 남 말 좋아하는 이 바닥 특성상 누구나 볼 수 있게 ‘마와리 후기’를 개재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마와리 후기는 회사와 연을 끊은 퇴사자, 그중에서도 수습 퇴사자의 특권이다. 어차피 수습 떼고 몇 년 지나면 섬세하게 기억나지는 않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기도 하다.


최대한 방관자의 시선에서(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그리고 몇 회에 걸쳐 이 풍습을 자세히 풀어보겠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마와리 돌 적에 내 동선을 십 분 단위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기괴하고 폭력적인 과정을 방관자의 시선에서, 아주 가볍고 또 재미있게 풀어 놓으려 시도한다.

 

나는 이 글에서 부사와 형용사를 많이 쓰고, 조사는 생략하지 않을 생각이다. 귀신이 어떻게 귀신 본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겠나. 귀신 이야기를 가장 맛깔나게 하는 건 산 사람이다. 따라서 기자 아닌 사람의 글과 말로 기자의 두 달을 묘사해 보겠다.


입사, 마와리 첫 만남


솔직히 말하자면 기자가 오랜 꿈은 아니었다. 나는 오랫동안 어떤 형태건 내가 글밥을 먹고 살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기에 무모하게 언론고시에 뛰어들었다. 따라서 언론고시라고 불리는(가당찮은) 이 과정에서, 큰 꿈과 큰 뜻을 품고 뛰어든 많은 이들에게 나는 조언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겠다.

 

합격 당일 새벽 3시, 애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다음 날 자 신문에 합격자가 발표되는데 그날 새벽에 기사가 미리 나갔고 거기에 내 이름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열 명 내외가 합격했고 나는 즉시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네 평짜리 옥탑방에서 안 팔리는 글 쓰다 요절할 줄 알았는데 합격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달에 걸친 네 차례의 입사 전형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첫 출근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긴장과 흥분 탓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전혀 피곤하지는 않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거울 속 내 모습이 생경했다. 혹시 몰라서 30분 일찍 택시를 불렀는데, 그날 서울 시가지에는 대규모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거리 신호등이 다섯 번 바뀔 동안 택시는 오 미터를 움직이지 않았다. 첫날부터 지각할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다행히 삼 분을 남기고 회사에 도착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기가 와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누군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우리 마와리 도나요? 안 한다는 말도 있던데..”

"마와리요?"


고백하건데, 나는 그때 생전 처음 ‘마와리’라는 단어를 들었다. 나를 제외한 그 자리의 모두가 마와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서기 전 마와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짧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마와리는 경찰서를 빙빙 돌며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를 일컫는 기자들의 은어다. 더욱 정확한 명칭은 ‘사쓰마와리’고, 어떤 기자들은 마와리 대신 ‘사쓰’라고 짧게 부르기도 한다. 정확한 어원과 그 의미는 아는 바 없고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다만 마와리가 ‘빙빙 돌다’는 뜻의 일본어 단어라는 것을 알 뿐이다.


아무튼 대한민국의 거진 모든 일간지와 방송국은 신입에게 마와리를 돌게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마와리를 도는 신입은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육 개월간 자신이 맡은 구역의 경찰서나 소방서 등을 샅샅이 뒤져 사건을 찾아내 대략 두 시간 단위로 보고한다. 이 과정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데, 여기서 신입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역할을 맡은 선배를 ‘일진’이라 부른다. 일진이라 하니 뭔가 싶지만 실은 그냥 사회부 사건팀 소속 기자들이다. 초중고등학교의 그것과 의미는 다르지만, 역할은 비슷하다. 일진들이 출입처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동안 신입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진께 갖다 바칠만한 사건을 캐낸다.  보고거리가 없거나 그 내용이 시원찮으면 욕을 들어먹는데 이를 ‘조져’진다고 한다.

 

혹자는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이 악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혹은 개선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전에는 속칭 ‘하리꼬미’라고 해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경찰서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요즘에는 꼬박꼬박 출퇴근까지 시켜주니 세상 좋아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경찰서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타사 동기들을 관찰하며 깨우친 바 2023년 지금도 이 문화가 신입 기자에게 가하는 고통은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 선배에게 구타당하지 않고 잠 한두 시간 더 잔다고 해서 이 과정이 ‘할 만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하여간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아주 자세히 묘사하겠다.

 

사내교육, 언진재까지


근로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내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침 아홉 시까지 회사에 모여 오후 여섯 시까지 수업을 들었다. 대개는 각 부서의 국장들이 들어와 각 부서의 형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를 가르치러 들어온 어쩌고 부서의 국장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멘트를 쳤다. 몇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기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 주변의 반응은 어떻냐. 입사의 기쁨에 들뜬 우리는 시종일관 밝고 높은 텐션을 유지했다. 어떤 부서 가고 싶냐는 단골 질문에도 경제부요 문화부요 사회부요 아 옙 저는 환경부에서 환경 기사를 써보겠습니다(실제로 글쓴이가 했던 말) 따위의 포부를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여간 희망 부서를 묻는 질문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벗어나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었다.


국장들은 우리를 보며 좋을 때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의 저의를 모르는 우리는 국장이 대낮 점심시간부터 술을  권해도 마냥 좋았다. 소싯적의 피비린내 나는 특종 취재 썰을 듣는 것도 흥미로웠다. 점심은 그날그날 교육을 맡은 국장이 사줬는데 우리를 교육하는 국장이 바뀌면 그에 맞춰 주종도 달라졌다. 거의 매일 점심마다 와인이나 소맥, 고량주를  마셨고, 늘 반주치고는 좀 많은 양이었다. 다들 조금은 취한 채 회사에 돌아와 수업을 마저 들었다.


몇 주쯤의 짧은 사내교육이 끝나면 두 주 동안 서울 정동에 위치한 언론진흥재단에 파견돼 교육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신입 기자는 이곳 언론진흥재단에서 기본 교육을 받는다. 더러는 ‘휴양지’라고 부를 정도로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서너 곳 언론사의 당해 신입 기자들이 모여 간식을 먹으며 저널리즘에 대해 배우고 발표하고 자유롭게 의견과 질문을 낸다. 돌이키면 행복하고 즐거운, 평온한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이었던 몇몇 순간들이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언진재 교육 과정 막바지에 포함된 ‘국과수 부검 참관 코스’ 중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국과수가 위치한 원주로 향했다. 오전에 실시된 부검, 그리고 그 참관 소감, 국과수 직원들의 말과 태도에 대해서는 따로 적지 않겠다. 부검의 잔상은 진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불편한 속을 진정시켰다. 문제는 점심시간이었다.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단일 메뉴라 선택권이 없었다. 십 분 뒤 펄펄 끓는 갈비탕이 우리 앞에 한 그릇씩 놓여졌다. 자꾸만 부검 장면이 떠올라 고기에 입을 대기 어려웠다. 몇몇 동기들은 ‘지금은 양반이다. 예전에는 부검 후 내장탕을 줬다’는 내용의 찌라시를 전했다. 기자는 뻔뻔하고 담이 세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덕분에 나는 지금도 고깃국물을 마실 때면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고 또 얼마나 적당히 잔인해야 살기 편한가를 생각한다.


말은 언제나 잊었던 기억을 불러온다. 불현듯 내 뒷자리에 앉은 타사 기자의 표정이 기억난다. 늘 피로와 짜증, 무엇보다 긴장으로 구겨져 있었고 도무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알고 보니 그는 마와리 중 언진재에 왔고, 피로와 짜증은 마와리의 후유증이었으며 긴장은 회사 복귀 후의 과정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곳이 군대와 같으며 이제부터 삼 년을 버텨야 좀 편해질 것이라 털어놨다. 삼 년은 그가 자의적으로 정한 기간이 아니었다. 그의 선배가 그에게 귀띔해 준 것이었다. 언진재 수료가 다가올수록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우리 역시 덩달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와 내 동기들이 마와리에 대해 조금씩 걱정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러니까 언진재 수료를 며칠 남기지 않은 시점. 그때부터 어디서 보고 주워들은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어디는 새벽까지 굴린다더라 잠도 안 재운다더라. 핸드폰도 무조건 갤럭시로 바꿔야 한다더라 다 죽었다 우리는. 아니다 생각보다는 할 만하다고 하더라. 그래도 우리 회사는 괜찮다더라. 무성한 소문들을 뒤로 한 채 시간은 흘러 흘러 언진재 수료날이 왔다. 단체 사진을 찍고 모든 짐을 챙겨 나오는 길, 한겨울이었지만 어쩐지 따스했던 정동길의 풍경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곧 벌어질 일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함께 본격적으로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는 설렘이 섞여 가슴이 부풀었다.

조필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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