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위기
대학언론은 ‘또다시’ 위기다. 누군가는 대학언론이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느냐며 조소하겠지만, 만드는 이와 읽는 이, 두 집단 모두에게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언론의 위기 상황이라 부를 수 있지는 않을지.
대부분의 대학언론에서는 스스로가 처한 위기의 원인을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 증가로 인한 대학언론의 경쟁력 감소,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일반학생의 학보사 관심 감소, 이로 따른 대학언론 지원자 감소의 악순환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가속화된 인터넷 보급 증가, 2010년대 이후 가속화된 스마트폰 보급 증가가 현재까지도 대학언론의 쇠퇴 진행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은 결국 대학언론을 만들어나가는 이들도 모르게 대학언론의 한구석이 곪아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든다.
대학알리 기획 4부작 “대학언론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대학언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룬다. 이번 1부 기사에서는 언론의 새로운 방향성을 밝혀낸 대학언론의 어제, 즉 대학언론이 창간된 이래로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며 그 발자국을 다시 밟아보고자 한다. 부디 이 짧은 기사가 대학언론을 만들고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대학언론이 어떤 목적으로 탄생했는지,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위기를 겪어야만 했는지, 또 그 위기를 극복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학언론 위기론은 끊이지 않는지 잠시나마 고민할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대학언론이 태동하다
세계 최초의 대학신문은 1908년 9월 14일 미국 미주리대학교 신문학부에서 학생들에게 실제 기사 작성 경험과 이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기 위해 창간된 <University Missourian>이다. <University Missourian>은 1908년 9월 15일 사설에서 “학생들이 충분히 광범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서라도 University Missourian은 대학 뉴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분야의 뉴스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밝힌 것을 기반으로 미주리대학교의 소식뿐 아니라 콜롬비아의 지역 소식, 사회·문화 문제에 대한 사설, 주요 정치 뉴스, 스포츠 분야 등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다. 현재 <University Missourian>는 창간 의도에 따라 미주리대학교가 속한 미주리 중부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는 지역 커뮤니티 신문으로 성장하며 대학언론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언론기구는 1915년 9월 숭실대학교에서 창간된 교지 <숭실학보>, 최초의 대학신문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4일 숭실대학교에서 창간된 <숭대시보 崇大時報>이다. <숭대시보>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창간 이전부터 일본의 언론 탄압에 맞서 민족의 독립 활동과 계몽에 이바지하였으며, 이는 1938년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항하기 위해 숭실대학교가 자진 폐교를 선언하자 이에 따라 자진 폐간을 선언한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학의 새로운 문화가 되다
대학언론 창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이다. 1946년 3월 <경성대학 예과신문>을 시작으로 1947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상대신문>, 문리과대학 <대학신문>, 공과대학 <공대학보>, 고려대학교 <고대신문>, 국학대학 <국학학보> 등 각 대학교와 단과대별로 다양한 대학언론이 앞다투어 창간을 이어나갔으며, 1950년 6.25 전쟁 전까지 11개의 대학신문이 창간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6.25 전쟁으로 인해 휴간하였으나, 전쟁이 지속되던 중에도 부산에 피란했던 경북대학교의 <경북대학보>, 연희대학(현 연세대학교)의 <연희춘추> 등 새로운 대학언론의 꽃은 피어나갔다.
6.25 전쟁이 끝나고 대학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전국적으로 대학언론 창간 열풍은 계속되었고 1960년까지 전국 주요 대학을 대부분 포함한 32개 대학에서 대학신문을 비롯한 언론기구가 설치되었다. 당시에는 대학언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던 시기였기에 대학언론은 학교를 대외적으로 홍보하거나 대학 소식을 학생들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전달할 뿐 아니라 신문방송학과 학생이 실습을 위해 대학신문을 발행하거나, 각 단과대 학생회가 자체 독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하고, 대표를 학교에서 임의로 임명하는 등 현재와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학언론, 대학을 넘어서다
이처럼 1960년대 이전 대학언론은 다양한 정체성을 보이고 있었지만 결국 넓은 범위에서 보자면 대학언론 역시 대학의 홍보지나 기관지일 뿐이었다. 일부 대학신문에서는 당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혹은 학교시설에 대한 비판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대학언론은 금전적·행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학교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 기성언론 역시 정치, 경제 등 사회의 여러 측면에 의해 그 자유가 침해받고 있었음을 떠올린다면 비단 대학언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학언론 변화의 시발점은 4·19 혁명이었다. 1950년대 무렵 기성언론은 대부분 사회 참여적 성격이 강하고 당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정부는 1955년 정치적 목적으로 학생을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기사를 내보낸 대구 매일신문사를 습격, 기자들을 폭행하고 인쇄시설을 파괴한 뒤 도리어 매일신문 최석채 주필을 체포한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을 시작으로 기성언론에 대해 다양한 탄압 활동을 시작했다. 기성언론의 보도권이 불안정해지자 자연스레 정부의 언론 탄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대학언론이 사회비판적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4·19 혁명 당시 정부의 검열에 따라 공식적인 집계 수치를 기사화하기 꺼리던 기성언론과는 달리 부상당한 자교 학생의 이름, 학과, 학년, 장소와 부상 정도까지 상세히 작성한 고대신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4·19 혁명 이후 학생들의 의식이 고양되고 학생자치활동이 활성화되던 시대 흐름에 따라 더욱 강해졌다. 1970년 대학 내 대학언론의 민주적 운영과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서울 13개 대학을 중심으로 개최한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대회, 1971년 '언론자유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언론탄압 자행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등의 구호가 수록된 대학신문기자 기관지 <필맥> 발간 등이 당시 대학언론의 편집자율권 쟁취운동을 반증한다.
언론을 넘어선 언론이 되다
대학언론의 방향성이 명확해지자 전국의 대학들은 앞다투어 언론 기관을 창설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대학신문 등을 발행하지 않던 대학들도 대학 홍보, 학생 요구 등을 이유로 대학언론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확산은 교육대학이나 전문대학으로도 이어졌다. 그 결과 1980년대 초 전국 97개의 4년제 대학 중에서 87개교, 2년제 전문대학 중 44개교, 전국 11개 교육대학 전체에서 대학언론을 창설하여 총 142개의 대학에서 대학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1970~80년대 대학언론의 확장은 단순히 수에 그치지 않았다. 흔히 이 시기를 ‘대학언론의 꽃’이라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전국적으로 펼쳐진 민주화 학생운동과 맞닿아 있다. 인터넷 뉴스가 전무했던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매체는 종이 신문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언론사는 정부의 검열하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 진행 상황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웠다. 이는 1970~80년대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당시 기성언론이 ‘학원으로 돌아가자’, ‘거듭 자중을 당부한다’ 등의 기사를 내보낸 반면 대학언론이 ‘민주화·민족통일 향한 의지의 발로’, ‘철야농성하며 민주화 위한 평화적 시위’ 등의 기사를 내보낸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성언론의 신뢰성이 떨어지자 대학생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도 자연스레 정부의 검열을 피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대학언론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을 지나며 정부의 대학 감시가 확대되고, 1980년 5.17 계엄령 선포 이후에는 문교부(현 교육부) 주도로 대학신문 제작 지침이 발행되자 대학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은 더욱 짙어졌다. 당시 ‘신문이 화형당하고 편집국장이 강제 구금 조치를 당했다’라는 숭대시보 473호의 구절을 통해 당시 대학언론이 겪었던 기사 삭제, 배부 중지, 언론인 탄압 등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점차 불거지던 대학언론 자율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대학언론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탈피를 시도했다. 서울대학교는 ‘자유언론’, 연세대학교는 ‘민주불’, 고려대학교는 ‘녹두장정’ 등의 이름으로 독자적 연재 보도를 이어갔다. 조직적인 활동도 늘어났다. 1987년 약 80개의 대학과 700명의 기자가 연대하여 공식적으로 결성한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은 이후 1971년 발행되던 대학신문기자 기관지 <필맥>을 재발간하며 대학신문이 대중선전사업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학언론, 방향성을 잃다
대학언론의 황금기를 끝낸 것은 다름 아닌 대학언론의 황금기를 주도했던 민주화 학생운동이었다. 1990년대, 2000년대를 지나기 시작하며 민주화 운동이 축소되자 자연스레 대학언론의 영향력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문기자가 작성하고, 정부로부터 검열받지 않는 기사를 두고 학생기자가 만드는 신문을 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대학언론의 정체성을 단시간에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언론연구원의 1995년 조사에 따르면 대학신문 전체 기사 중 50.6%가 학외 기사였으며, 칼럼 역시 학내 관련 기사는 25.9%의 비율을 차지한 데에 반해 사회 관련은 25.9%, 정치 관련은 24.3%로 1990년 중반 여전히 대학언론은 학내 문제보다 정치, 사회 이슈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언론인들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제 대학언론의 가장 큰 과제는 기성언론이 해내지 못한 정확한 정보 전달이 아닌, 앞으로의 50년을 새롭게 만들어나갈 대학언론의 새로운 방향성 설정이었다. 1990년대 대학언론사는 주체혁신, 조직혁신, 지면혁신의 3대혁신운동을 바탕으로 진보적 성향에 편중되었던 편집 방향 제고, 폐쇄성 탈피, 기사 형식 다양화, 독자 중심의 지면 구성, 기자학교 및 저널리즘 스쿨 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존과는 다른 방향성을 찾고자 했다.
위기, 위기, 위기의 늪에 빠지다
이러한 대학언론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상황은 암울하게만 흘러갔다. 1997년 IMF로 인해 취업난과 실업 우려가 늘어나자 자연스레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학보사의 지원자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극복 의지를 다지던 대학언론사 역시 제동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IMF로부터 비롯된 취업난은 현재까지도 계속되며 학생들의 학보사 지원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정보통신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며 가구마다, 개인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뉴스 접근성이 크게 늘어나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대학언론은 다시 한 발을 물러야 했다. 각 방송사와 신문사가 방송국, 인터넷 주요 포털, 심지어는 유튜브를 통해서 뉴스를 전달하는 이 시점에서 구태여 비전문기자의 종이 신문을 볼 필요가 있느냐가 일반 학생들의 주된 의견이다. 최근에는 대학언론사별 뉴스 페이지를 만들어 기사를 업로드하거나 웹진과 신문 발행을 병행하는 추세지만, 이 역시도 큰 호응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 또다시 위기
대학언론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기성언론이 시도하지 않는, 대학언론만의 새로운 방향성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극복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생에게 더 이상 선택받지 못하는 대학언론에게 순탄한 길이란 남아있을 수 없었다. 과거 민주화 학생운동과 연계된 대학언론은 대학생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 역시 독자층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대학과의 예산 협상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현재의 대학언론은 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최근 대학언론에서는 예산 협상, 그리고 대학 산하 기구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학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사를 사전에 삭제하거나, 취재를 진행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잦다. 몇몇 사람들은 언론을 탄압하던 시기도 아니고, 21세기에 단순히 학교에 부정적인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하여 기사를 삭제하고 편집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는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21세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언론자유지수를 기록했던 2022년에도, 어쩌면 지금 기사를 읽고 있는 이 시점에도 명백하게 발생하고 있다.
아직은 믿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2부, 그리고 3부에는 실제로 과거, 그리고 현재 대학언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부디 그들의 이야기가 대학언론의 어두운 측면을 숨기기보다 널리 드러내고, 대학언론이 새로운 방향성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