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케이블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갱신한 드라마 하나가 전국을 화끈하게 달구었다. 멀게도 느껴지는 28년 전 모습을 드라마로 그려낸 tvN <응답하라 1988>이 그 주인공이다. 1988년이라 하면 거의 3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드라마에 등장하는 거리 풍경이나 사람들의 차림새는 이제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서만큼은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 내려왔고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언니한테 치이고 동생한테 치이며 둘째로 살아가는 덕선이의 서러움에 공감하고, 독서실에 간 덕선이가 걱정되어 잠 못 이루는 정환이의 짝사랑에 내가 더 설레어 하는 것이다. 결국 ‘저 때나 지금이나 사람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쌍문동 말고 이화의 1988은 어땠을까. 오래전 이화의 캠퍼스를 거닐던 선배님들은 지금의 우리 비교해 어떤 모습이었을까?
1988년에도 ECC가 있었다?
ECC는 2008년 완공된 이후 이화여대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이화여대에는 ECC가 존재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대학마다 컴퓨터 써클이 생겨났다. 1976년 이화여대에도 ECC(Ewha Computer Club)라는 컴퓨터 써클이 조직되었다. 아직도 ECC는 이화여대의 중앙동아리로 남아있다. 이화여대에 두 개의 ECC가 존재하는 셈이다.학생문화관 504호를 방문하면 작지만 역사가 깊은 원조 ECC를 만나볼 수 있다.
쉴 새 없이 뚝딱뚝딱
1979년 취임한 정의숙 총장은 건물 신축에 힘썼다. 당시 경영관(1982년), 종합과학관(A동 1982년, B동 1984년), 법정대학관(1986년), 중앙도서관(1984년) 그리고 100주년 기념 박물관(1989년)이 신축되었다. 캠퍼스에 하루도 공사가 없던 날이 없었을 것 같다.
친절한 대학안내 책
학교 중앙도서관 여성학 자료실을 둘러보다 보면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안내’라는 책이 연도별로 정리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중 1988년도 책을 꺼내 목차를 살펴보면 1988년도 행사예정표, 학칙, 교수진 소개, 교과과정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요즘은 학교 홈페이지에 카테고리별로 정리되어있는 내용이 당시에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된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1988년도에는 자연과학대학에 통계학과가 신설되었고 사범대학 시청각교육과가 교육공학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지금과는 다르게 가정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이 존재했고 그 아래에는 가정관리학과(현 사회과학대학 소비자학과), 의류직물학과(현 신산업융합대학 의류산업학과) 그리고 식품영양학과가 있었다.
필수로 배워야 하는 교양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88학번 신입생들은 국어, 영어, 불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체육, 기독교문학, 한국문화사, 국민윤리 과목을 전공 상관없이 필수로 들어야 했다. 16학번 신입생들이 국어(우리말과 글쓰기, 고전읽기와 글쓰기), 영어(대학영어, 고급영어), 제2외국어, 기독교와 세계, 나눔리더십을 들어야 하는 것과 비교하면 예나 지금이나 필수 교양과목은 구성도 비슷하고 양 많은 것도 비슷하다.
공부하지 않으면 탈락한다
1981년 대학 입시부터 ‘졸업정원제’라는 것이 시행되었다. ‘졸업정원제’란 대학의 신입생을 졸업정원의 130% 정도로 선발하여 한마디로 입학은 쉽게, 졸업은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상임위 위원장으로 있던 시절, 치열한 대학 입시 탓에 과외 시장이 과열되고 재수생이 늘어나자 그 해결책으로 실시한 것이다. 또한,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이 거세지자 대학의 자율성을 축소하고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졸업정원제가 시행된 학교의 모습은 어땠을까. 학년을 마칠 때마다 탈락자가 발생했다. 특히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대들은 입대를 이유로 휴학하는 남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에 타 공학 대학보다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지금도 학점 따기 힘들기로 소문난 이화여대인지라 당시 이화의 학생들은 졸업정원제라는 압박 속에서 높은 성적에 목메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한정된 학교 시설들은 갑자기 늘어난 정원을 수용하기 역부족이었다. 이런 가운데 졸업정원에서 탈락한 학생들은 새롭게 대학에 편입이나 입학을 해야 했다.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 학생들은 ‘전국적으로 획일한 졸업정원제를 적용하는 것은 대학마다 특성을 무시하고 대학의 자율권을 박탈하는 것’, ‘각박한 경쟁제도는 진리 추구라는 대학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며 졸업정원제를 비판했다. 교수들도 탈락 위기에 놓인 학생들에게 유급이나 휴학을 권하는 등,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탈 많던 졸업정원제는 얼마 가지 못하고 1984년 사실상 폐지되었다. 지금의 이화에 졸업정원제는 없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학점 따는 데에 열중하는 모습은 (과거에는 탈락하지 않기 위해, 오늘날은 안정적인 취업을 위해)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슬픈 우리 젊은 날
-응답하라 1988의 장면 중-
응답하라 1988 드라마에는 대학생 보라가 ‘슬픈 우리 젊은 날’이라는 시집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19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서정윤의 ‘홀로서기’, 이해인의 ‘오늘도 낮달로 떠서’ 등의 시집이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 그런 와중에 1988년 발행된 ‘슬픈 우리 젊은 날’은 쟁쟁한 유명 시인들의 시집들 사이에서 인기도서로 올랐다.
이 책은 자칫 지나칠 수 있었던 대학가의 익명 낙서와 글귀들을 사회 흐름을 나타내는 문화현상으로 인식하고 그것들을 모아 시집 형태로 낸 것이다. 책 안에는 당시 대학생들의 솔직하고 생생한 발언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중에는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80년대 당시 시대상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시험을 앞두고 써진 시나 학우들을 향한 애정을 표현한 시들도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과 크게 다를 것 없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이화의 선배들이 써클(지금의 동아리) 낙서장에 남긴 글귀, 학관 화장실 벽에 남긴 낙서, 이대 앞 카페 벽에 남긴 낙서들도 만나볼 수 있다. 그중 몇 개를 소개하려 한다. 이 외에 다른 학교 학생들의 시도 재밌는 것이 많으니 꼭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데모
데모하는 놈들을 없애자
데모를 하게 만드는 놈을 먼저 없애자.
- 이화여대 앞 카페 ‘어린왕자’
회상
세월은 흐르고/과거는 미화된다지만/추억은 곧 그리움인 것이다./부족했던 자신의 모습과/부끄러웠던 일들도 많았건만/다시 찾게됨은/고마웠던 선배들, 격려를 아끼지 않던 동료들,/그리고 새 희망을 주는 후배들 때문이다./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현재가 더욱 소중해지는 것은/지금은 또하나의 ‘사랑만들기’가 진행중인 연유이다./굳이 사랑이라 부르지 않아도 우린 사랑을 느끼고/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 이화여대 써클 ‘Agape’ 낙서장
시험
노란 은행잎과 나뭇잎이 마구 떨어져 있는 학교를 보니까 좋긴 한데 그걸 감상하고 느낄 시간이 없는 게 아쉽다.
시험이 무엇이던가.
- 이화여대 써클 ‘로타렉트’ 낙서장
젊은 우리들
무엇이 이땅의 젊은이를 분노케 하는가?
억압의 척박한 이땅을 살아가는 친구야./네가 짊어진 그 짐은/너만의 것이 아니기에/나누어 함께, 함께 하려 한다./분단된 조국의 통일과/억압의 사슬이 풀려지는 날/우린 서로 어깨걸고/해방의 날을 기뻐하리라.
그때까지/비록 힘들고 피곤하더라도
서로에게 힘을 주며/함께 가자.
- 이화여대 써클 ‘Agape’ 낙서장
총학생회와 민족민주대동제
1986년 이화여대는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주년인 만큼 학교에서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다. 그중에는 1년 전 발족한 총학생회 주관으로 치러진 100주년 기념 대동제가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총학생회가 아닌, 비민주적이고 하향적인 조직 체계를 가진 학도호국단이 존재했다.1949년 이승만 정부는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사상을 통일하겠다며 학도호국단을 조직한다. 학도호국단은 간부들의 특권의식과 폭력 등의 폐단이 많았고 4·19 혁명 후 해체되게 된다. 그러나 15년 후인 박정희 유신정권 때 학도 호국단이 재설치되었다. 그러다가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따라 전두환 군부 정권의 집권 중반기인 1985년 대학교 학도 호국단이 공식적으로 해체하고 1985년 이화여대 17대 총학생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참고: 위키백과
『이화역사이야기』(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서는 당시 대동제를 이렇게 묘사한다.
‘총학생회 출범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동아리 활동이 활성화되고 축제의 자율성이 추구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대동제’라는 명칭 변화에서도 알 수 있듯 총학생회는 5월 봄 축제를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대동(大同)의 장이 되도록 기획했다. 축제 형식도 이전의 귀족적이고 소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길 놀이, 풍물패 공연, 줄다리기 등 전통적인 동제 형식을 재현하고 마당극, 촌극, 판굿, 지신밟기 등의 질펀한 놀이마당을 펼치는 쪽으로 변화했다.’
잠깐이나마 이화의 1988로 되짚어 올라가 보았다.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옛 순간이지만, 그때 선배들의 뜨거운 쌍팔년도가 있었기에 지금의 이화는 아름답다. 교정에 남아있는 선배들의 청춘이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