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좀비 지시의 요지는 취재 지원이었다. 당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과 서울교통공사가 날 선 갈등을 빚을 때였다. 전장연은 S 역의 역사 내에 지속적으로 이동권 권리주장 포스터를 부착해 왔는데, 당일 서울교통공사는 이를 일괄 제거할 것임을 알렸다. 내 역할은 그 현장을 스케치해 오는 일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S 역은 멀었다. 어떤 모습을 어떻게 담을지 계획을 세울 시간이 없었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 경찰서를 뛰쳐나왔다. S역은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이 이마에 명함을 붙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기자는 기자를 알아보기 마련이다. 기자들은 포스터를 철거하는 환경미화원들의 뒷모습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현장에 전장연 구성원은 없었는데, 따라서 포스터 철거를 제지하거나 말리는 목소리 또한 없었다. 나는 그들이 끌개와 약품을 사용해 포스터를 긁어내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후에야 사진을 찍어대는 기자 대열에 합류했다. 철거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한 중년의 여성이 플랫폼 중간에 섰다. 기자회견임을 감지한 기자들이 금세 여성의 주위에 모였다.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봄이 오면 겨울이 지나가듯 마와리가 끝난 날을 기억한다. 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챙겨 먹은 드문 날이었다. 나는 가리봉동 지파를 돌고 있었다. 오후 네 시 반쯤 선배로부터 카톡이 왔다. 여섯 시까지 본사로 집결하라는 내용이었다. 선배는 마와리가 끝났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나와 동기들은 이미 각자의 귀동냥을 조합해 대충 돌아가는 바를 알고 있었다. 드디어 마와리가 끝났구나. 동기 단톡방은 축제 분위기였다. 덧붙여 내 마지막 보고는 일선 지구대의 계급 인플레에 관한 것이었다. 선배는 그걸 두고 ‘무난한 정보 보고’라고 평가했다. 여전히 추웠지만, 날씨가 유난히 맑았다. 가리봉동에서 출발한 택시는 어느덧 마포대교에 닿았다. 한강은 넓고 파랬고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해방감, 안도, 안심, 그때의 기분을 설명할 단어가 마땅치 않다. 회사 로비에는 이미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몰골이 초췌해도 표정만큼은 밝았다. 동기들은 서로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고, 정말 마와리가 끝난 것이 맞냐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찰나의 기쁨이 지나가자, 동기들 사이에서 부서 배치에 관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벌집 밤 10시 30분, 경찰서에서 나온 나는 선배에게 보고 내용을 읊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그는 내게 어떤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추운 겨울 합판 너머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벌집촌 조선족의 모습을 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만 있는 장면이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자마자 나는 가리봉동으로 향했다. 벌집촌이 가리봉동에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정확히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택시 기사에게 벌집촌을 아십니까, 라고 물었지만 가리봉동에서만 20년을 운전했다는 그 역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어디서 들어본 듯한 단어라는 듯 벌집촌, 벌집촌 하며 염불 외듯 단어를 되뇌었다. 그러기를 5분, 그가 앗,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벌집촌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그러고는 내게 그곳을 왜 가냐고 물었다. 취재하러 간다, 고 하자 그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가리봉시장 앞이었다. 벌집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리봉시장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 택시 기사의 설명이었다. 시장은 일직선으로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뽀얀 볼과 세 치 혀를 가진 남자 그는 정치부 소속이었는데, 국회 생활이 몹시 고되고 힘들다며 하루빨리 후임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땅딸막한 체형에,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뽀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P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고 또 무례했다. 우리가 자리한 곳이 중국집의 프라이빗 룸이라는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P는 해서는 안 될 말과 질문들을 비속어와 함께 쏟아냈다. “랩 했다면서. 노래방 좋아하겠네?” “네. 그렇습니다.” “오래 걷는 것도 괜찮지? 그럼 너 정치부로 와라.” “네, 가고 싶습니다.” “야, 지랄하지 마. 이 새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네? 정치부 안 오기만 해.” 그의 폭주는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입사 전 기자 생활 경력이 있는 동기에게는 ‘네가 기사를 그렇게 잘 치냐’며 시비를 걸었고, 여자 동기에게는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무력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던 우리는 화를 내거나 지적하는 것 대신, 목소리 톤과 표정 관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는 격언이 있지만 그는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자네 아버지가 말인즉슨 경찰인 그가 다른 경찰을 고소한 사건이었다. 팀장은 격양된 목소리로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거친 경찰 생활을 오래 한 그는 말보다 뉘앙스와 몸짓이 더욱 익숙했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흉터처럼 그의 말은 느낌과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슬프게도 나는 그러한 말을 그대로 옮길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말소리 높낮이나 손발짓과 같은 감각적 언어들을 기사의 언어로 정리해야 했다. 그건 머리 아픈 작업이었고 꼭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킥스로 내가 확, 시간이 다르잖아. 완전히 사시미야, 사시미.” “그러니까 확, 했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 그리고 사시미요?” “답답하네, 그러니까 시간이 다르니까, 콱, 흔적, 꼬리를 잡아냈다는 거지. 그거랑 청첩장으로. ” “청첩장은 또 뭔데요?” 두 시간 동안 팀장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건의 개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휴일에 자전거를 타던 그가 모종의 이유로 다른 경찰과 시비가 붙게 되었고, 그 해결 과정에서 상대방 경찰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잡음이 생겼다는 것이 대략적인 야마였다. 더불어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서울역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결국 B 경찰서에 들어가지 못했다. 내 또래의 그는 나의 생떼에 무척이나 곤란해했다. 그러나 곤란하기로는 나 역시 피차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들여보내 줄 때까지 로비에 머무르기로 했다. 기다리기를 10분, 이 일을 한 지 얼마나 됐냐고 그가 말을 걸었다. 하루 됐다, 고 대답하자 고생이 많습니다. 라고 화답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였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고, 누군가를 곤경에 빠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늦은 야근을 마친 경찰들이 하나둘 본관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오는 족족 붙잡고 간곡한 자기소개와 함께 명함을 돌렸다. 안면을 틀 수 있다면 내부에 진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중 누구도 명함을 받지 않았다. 보고 시간은 속절없이 다가왔다. 바이스에게 전화를 해 현재 위치와 행적을 보고했다. “바이스, 죄송합니다. B 경찰서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버티겠습니다” “아냐, 됐어.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만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라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모든 부서의 모든 문 카톡으로 보고 내용을 전송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바이스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 소상히 물어봤다. 더불어 보고 형식을 어떻게 하면 더욱 구체적으로 쓸 수 있는지 간단하게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그의 말에는 사적인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분명 욕설이 날아올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신입 기자가 첫 보고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은 듯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A 경찰서 로비에 앉아 멍하니 남은 시간을 보냈다. 과한 긴장에 지친 상태였다.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바이스에게 전화해 위치 보고를 했다. “OO기 수습기자 OOO입니다. 현재 A 경찰서 로비입니다” “응, 그래. 경찰서에 열려있는 모든 문에 들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와라.” 파출소나 지구대와 달리, 경찰서에는 수십 개의 부서가 있다. 개중에는 마약 수사팀, 교통 범죄수사팀 등 사회부 기자의 일과 밀접히 닿아 있는 곳도 있지만, 청문감사실, 경비계 등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당돌하게 쫓겨나기 “수습기자 OOO입니다. 경찰서 도착해 출근 보고드립니다” 인사는 짧았고 지시는 명료했다. 아홉 시까지 관할 경찰서 당직실을 돌아다니며 간밤에 있었던 특이동향을 알아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한 곳에서 이야기가 길어질 경우 충분히 시간을 쓰라고도 덧붙였다. 전화를 끊고 잠시 눈을 감고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선 내가 있는 A 경찰서의 형사당직실로 향했다. 형사당직실은 이중 보안 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고, 민원인을 위한 빨간 호출 버튼이 문 오른쪽 아래편에 달려 있었다. 크게 한번 심호흡한 후 버튼을 누르자 사복을 입은 당직 형사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밤을 새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나를 민원인이라 생각했는지 애써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어떤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다. “오늘 처음 온 OO 신문 기자입니다. 다름 아니라 간밤에 별다른 사건 없었는지…” “예? 아무 일 없고요. 나가세요” “제가 오늘 처음 왔는데... 팀원분들께 간단하게 인사만 드리고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대면식, 그리고 질문 “네 음악 가사, 사내에서 말 많은 거 알아?” 질문은 조용한 분위기를 찢고 불쑥 튀어나왔다. 당황스러웠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언시 준비 전부터 취미로 음반 녹음과 발매를 해 왔지만, 면접은 물론 대면식 이전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또 나는 예명으로 활동해 왔기에, 내 이름을 안다고 해도 내 음악을 찾을 수는 없어야만 했다. 그의 질문은 이미 우리들 신입 기자에 대한 기본적인 뒷조사가 모두 끝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세히는 못 쓰지만, 당연하게도 나만 뒷조사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정보를 찾는 게 직업인 이들인 만큼, 신입의 과거를 캐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발매한 노래 열 몇 개의 제목과 가사들이 머릿속에 나열됐다. 몇몇 곡의 다소(?) 거친 표현들이 문제였나, 아니면 생활고로 임상실험에 참여한 경험을 쓴 가사가 너무 자극적이었나. 혹은 퀴어를 주제로 했던 곡이 보수적인 이 회사의 논조와 맞지 않았던 것일까. 전부일 수도 있었고, 그중 무엇도 아닐 수 있었다. 남에게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아마 다시는 갈 일이 없겠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언진재가 자리한 그 정동길을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결핍도 느낄 수 없었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되었던 그 길을. 아마 그건 안도감이 아니었을까. 이 도시의 어엿한 구성원이 되었다는 안전의 감각. 실제로 나는 그즈음 내 삶을 구성해 온 오랜 취미들로부터 거의 손을 뗀 상태였다. 더 이상 음악을 만들지도, 야마 없는 글을 쓰지도 않았다. 오래된 물건과 옷 수집을 그만두었고 요리에 대한 열정 역시 식은 상태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이뤄낸 꿈, 그리고 안정적인 직장이란 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언진재 교육이 끝난 우리는 회사로 복귀했다. 의외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일주일간 못다 한 사내 교육을 끝마친 후 본격적으로 마와리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복귀한 우리를 본 국장이 군기가 빠졌으니 “빠따”를 한 대씩 쳐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런 엄포와는 달리 사진 촬영 교육, 기사 헤드 쓰는 법 따위를 교육받으며 다소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한 주가 지나갔다. 사내교육이 한창이자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들어가며 나는 2022년 12월에 기자가 되었고 이듬해 3월 그만뒀다. ‘마와리’를 끝내고 사회부에 배속된 직후였다. 주변인들은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끝내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설명하려 노력해 봤지만, 이야기는 사람의 말이 되지 못해 가라앉거나 흩어졌다. 그래서인지 더러는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그건 그만둘 이유가 아니니 계속 해 보라고도 조언했다. 사람의 말과 글로 이 글은 기록이고 변명인데 내가 풀고자 한 것은 이야기다. 그래도 굳이 이야기의 계통을 나누면 기담(奇談) 축에 드는데, 깨어서는 꿈처럼 흐릿한 기억이 막상 꿈을 꿀 때는 생생하게 재연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밤중 종종 그때의 꿈을 꾸고 깬다. 그러나 내 동기들은 여전히 성실하게 기자 생활을 하고 있기에 나는 이걸 오직 내 문제로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좋은 선배들과 함께 회사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치열하게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가 기자를 준비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꺾지 않기를 바란다. 내게 이 일이 지독하게 맞지 않았고, 여기에 더해 나처럼 되지 말라는 반면교사의 표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