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학뽑기 총학생회는 과연 어떤 일을 할까. 총학생회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구심을 풀기 위해 부산 대학언론인 네트워크 공동취재팀(△대학알리 △동아대학보 △부경대신문 △한국해양대신문)은 2023학년도 부산권 대학 학생회 선거에 대비해 ‘총학뽑기’라는 이름으로 기획을 연말까지 연재한다. 대학생의, 대학생에 의한, 대학생을 위한 총학생회 건설은 가능할까. 더 알아보기 총학뽑기 인스타그램(@ppopgi_) 총학생회 뭐 하는데? 한국해양대 A 학생(해사법학부 20) “총학생회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축제 기획이나 간식 사업을 하는 곳 아닌가?” 동아대 이송학 학생(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22) “총학생회의 존재감이 크지 않다.” 총학생회. 학생들의 자치기구다. ‘시민성 관점에 근거한 차세대 대학 학생회·학생자치 모델을 위한 기초연구’(2020, 신민준 외) 보고서는 학생회를 “직접선거를 통한 선출을 바탕으로 정당성을 인정받고 대학 내의 학생들을 대표해 학교와 협의를 진행하며 학생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활동을 하는 등 대의기구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며 “이외에도 오늘날 학생회는 학생 대상 복지사업과 고충·민원 해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규
대구지법, 김상호 대구대총장 해임 처분 정당 판결.. 사실상 불명예 퇴진 확률 높아진 김상호 대구대총장 취재기자인 내 눈엔 지극히 평범했던 김 총장, 총장 직선에서 당선.. 이벤트성 소통에 능했던 전임 총장과 달리 모습 드러내지 않던 김 총장.. 학생들 볼멘소리 나오기도 "언론 꼭 살펴보겠다"던 김 총장 재임 기간 중 학내 언론 대면 인터뷰 단 2번 마지막 만남이 된 인터뷰서 총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되풀이.. 이후 "입시 참사 전적으로 책임지겠다" 해임된 직선 총장.. 대학 언론 미래 불투명 해질지도 유감스럽게 떠나보내게 되어 안타까운 심정 "더 이상 돌이킬 순 없어요. 사실상 직선제는 끝난거 같아요." (김상호 대구대총장 해임 판결 이후 학교 관계자의 말) 지난 1월 21일, 대구지법이 김상호 대구대총장 해임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하며 1년 가까이 지속된 총장 해임 사태가 일단락됐다. 입시 실패 책임을 지고 사퇴한 총장에 대학 법인은 총장이 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해임 처분을 했고, 이에 김 총장이 불복해 법원의 기각 판결을 받아내며 잠시 총장직에 복귀했으나, 그 끝은 불명예스러운 퇴진이었다. 결국 작년 3월, 입시 실패 책임을 지고 사퇴한 대
지난 3월 초, 마지막으로 편집국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진행 직전 기자들이 나에게 간단한 케잌을 선물해주며 퇴임을 축하해줬다. "퇴임 축하합니다" 물론 여전히 편집국 기자들이 나에게 신문사 일과 관련하여 연락이 오긴 한다. 이럴 때마다 기자들에게 "나 퇴임했다"며 핀잔을 주긴 한다. <대학알리>에서 작성한 지방대 학보사 기자로 살아남기 시리즈물도 어느덧 10편이 다 돼가고, 나도 이제 전직 편집국장이니 이 글들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간 못 다했던 이야기들을 마저 하고자 한다. ■ 사실 선배들도 언론에 대해 잘 모른다 "너거들은 글도 잘 쓰고, 후배 기자들한테 막 취재하는 거 앉혀놓고 가르치제?" 내가 학내 언론에서 활동하는 것을 쭉 지켜봐 왔던 대학교 동기가 했던 말 중 하나다. 학생 기자로 활동하며 가장 난감한 순간은 다름이 아닌 후배 기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줘야 할 때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기자들도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후배 기자들이 우리에게 찾아와 어떻게 취재를 하면 잘할 수 있는지, 기사를 잘 작성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 여러 질문을 하지만 뾰족하게 대답해주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우리도 전문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에 나쁜 취재원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 기자들을 얕잡아 보고 퉁명스럽게 대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배울 것은 분명히 있고, 오히려 까다롭게 구는 취재원들 덕분에 우리가 취재한 내용을 재차 꼼꼼히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사가 보도된 이후 편집국에 기사와 관련하여 항의가 들어오는 것 역시 어찌 보면 소중한 피드백이자, 향후 취재∙보도 방향을 정할 때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전 글<세상에 나쁜 취재원은 없다(1)>에서 나는 비협조적이고, 불친절한 취재원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들에게 겪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듯이 모든 취재원이 퉁명스럽고 우리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친절하고 협조적인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 모든 취재원은 불친절하고, 권위적? 우리 기자들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깍듯하게 인사하며 취재에 응해주시는 분들도 계시며, 인터뷰 내내 공손한 말투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학교 직원분들도 있었다. 기자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더라도 적극적으로 설명하며, 부족한 부분은 우리가 더 챙기겠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다. 취재가 끝난 이후에도 "기사
취재원(取材源). 신문, 잡지 따위의 보도 기사나 작품 재료의 출처 또는 이를 제공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대학 언론인들의 취재원은 학생 기자들에겐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기성 언론과 달리 대학 언론인들은 학내 이슈를 취재하여 보도한다. ■ 대학 언론인과 학내 취재원들 매우 특별한 관계.. 서로 엮여있어 대부분 학내 취재원들은 어른들.. '어른 대 학생'의 권위적 구조 형성 자연스럽게 취재원 대부분이 대학 내 학생회 관계자, 교직원 또는 일반 교수, 학내 보직자 겸임 교수 등 서로 연관된 특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취재 대상이 한 다리 건너 아는 학생일 수도 있고, 학생 기자가 속한 단과대학 또는 학과의 교수, 학내 행사를 주관하는 교직원일 수 있다. 그렇기에 대학 언론인들에게 취재원과의 관계는 매우 고민거리다. 게다가 지역 사회가 좁은 곳에 위치한 대학 같은 경우 이 같은 고민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대학 언론인들이 취재할 때,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의 요인은 ‘학생’ 신분이라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대학 언론인들 역시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기에 만나는 취재원과 관계 대부분이 ‘어른 대 학생’ 구조가 형성된다. 기성 어른들 입장에선 학생 기자들이 경
이번 8편은 지난 4월에 적었던 이 시리즈물의 4편 <”지면이 없어진다고요? ”.. 학보사의 온라인화>의 연장선이다. 당시 4편에서 우리 학보사가 전면 온라인화 결정 이후 편집국 내 기자들이 느꼈던 점을 말했던 바 있다. 지면을 없애고 온라인화를 결정했던 것에 대해 신중했어야 했다는 목소리, 장점으로 예상했던 것들이 오히려 부메랑처럼 단점으로 바뀌게 된 점을 언급했다. 나 역시 올해 초 까지만 해도 대학 언론의 온라인화에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사실 대학 언론의 온라인화를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의 대학 언론은 지면 발간이라는 큰 토대에서 움직이고 있고, 많은 대학 언론인들은 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을 만난다. 그렇기에 대학 언론인에게 지면 발행은 소중하다. 이 때문에 지면 발간, 발행 횟수가 중단되는 경우는 편집국의 예산이 부족하거나 대학 본부가 감축시키는 것 외에 기자들 스스로가 “우리 지면 발행을 줄입시다!” 하는 경우는 잘 없을 것이다. 지면 발행은 곧 기자들의 자존심이고, 자존감이다. 발행 횟수를 줄이는 것은 그들에겐 아주 자존심과 자존감이 떨어지는 결과로 직결된다. 사실 나도 그랬다. ■ 뜻밖의 재난 상황 속…
엄마의 노동 엄마는 인생의 절반을 중국에서 살았다. 아빠와 결혼하며 한국에 정착했다. 한국은 엄마를 조선족으로 분류했다. 3년 주기로 “전국 다문화 가정 실태조사”에 응답하기를 종용했다. “배우자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십니까?” “생활을 전반적으로 고려할 때 귀하께서는 현재의 삶에 얼마나 만족합니까” 그런 문항에 답하며 엄마는 대상화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파악했다. 이곳이 자기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 예감했다. 아빠와 결혼하며 20년 넘게 살던 곳을 떠난 엄마는 아빠가 믿을만한 가장이 아니란 걸 확인한 뒤부터 돈을 벌었다. 중국어 학원 강사로 시작한 노동은 기업 연수원 강사로 이어졌다가 학습지 강사로 변모했다. 근로 계약서를 쓰는 노동에서 학습지 수강 인원에 따라 급여 액수를 책정하는 노동이 됐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노동은 중심에서 도처로, 도처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다. 엄마는 짜증을 부렸다. 나는 엄마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아빠 같은 인간이 되지 말라는 문장을 구태여 아빠 앞에서 말하는 맥락을 나는 별로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울었다. 엄마의 엄마가 죽었다. 엄마는 중국으로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지 못했
■ 우리 대학, 총장 선출 방식 변경 추진 두고 논란 점화 “규민군 통화 가능하면 전화 주세요” 우리 대학 교수회 의장의 문자였다. 작년 12월, 우리 학보사가 신문 지면을 발행할 때쯤 신임 의장이 선출되었고, 이 때문에 나는 이 분을 대상으로 직격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취재원들이 나에게 취재를 요청하거나, 제보하는 연락을 종종 받기는 하나, 교수회 의장이 직접 기자에게 전화를 달라고 하다니!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네, 교수님 김규민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교수회 의장이 나에게 전화, 문자를 통해 전달해준 내용은 우리 대학 학교법인 영광학원이 현행 총장 선출 방식인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알려야 할 중요한 보도 내용이었다. 의장은 나에게 교수회 성명서 원본을 보내주며 자신들의 입장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알렸다. 아무리 자신들이 주장해도 학내에 알릴 창구가 마땅치 않은데, 우리 학보사가 이러한 자신들의 상황을 알릴 적합한 기관으로 판단한 듯하였다. ■ 학생들 대부분은 ‘간선제 전환’에 부정적.. “학생들도 총장 선거권 가져야” 그리하여 7월 3일부터 총장 선출 방식 변경과 관련된 학내 보도가 줄줄이 보
2020년 8월 6일 구의역 당신은 2016년 5월 28일 구의역에서 죽었습니다. 당신의 생일 전날 이었습니다. 당신이 죽은 시간은 5시55분입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고 시민들이 귀가할 무렵이었습니다. 당신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도중에 정차하는 지하철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죽고 당신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작업복엔 검댕이 묻어 있었습니다. 지우려 시도하면 더 번지는 얼룩이었습니다. 당신은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가방 안엔 공구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기름때 냄새가 날카로웠습니다. 포장을 뜯지 않은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나무젓가락과 수저가 기름 때 묻은 스패너와 같이 굴러다녔습니다. 당신이 수행하던 노동의 모습이 환기됐습니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10분 안에 수리해야 패널티가 부과되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1시간 내로 고장에 대응해야 한다는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급여를 삭감하며 이를 지키도록 종용했습니다. 안전한 현장을 이룩하기 위한 매뉴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해당 스크린도어 수리를 완료하면 바로 을지로 3가 역에 가야 했습니다. 당신은 급여를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흔적을 보며 울었습니다. 당신이 소화하던 일정
2017년 서울 가리봉동과 구로공단1) 김재순 김재순은 노동자였다. 그는 지난달 22일 합성수지 파쇄기에 끼여 사망했다. 재활용업체에서 일하던 김재순은 지적장애를 동반한 노동자였다. 회사는 그가 장애를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현장에 도사린 위험을 경고하는 교육은 없었다. 안전장치도 없었다. 사수가 있었는데, 2인 1조는 지켜지지 않았다. 열악한 노동환경이 대개 그렇듯 인력이 부족했다. 업체 대표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자기 과실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회사와 무관한 죽음이라며 선을 그었다. 노동자 개인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는 거였다. 고(故) 김재순 노동시민대책위원회 진상조사단은 현장을 녹화한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공개했다. 김재순은 사망 전에도 파쇄기를 작동했다. 파쇄기 상부에 올라가 튀어나온 폐기물을 정리하는 모습이 찍혔다. “자기 과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파쇄기를 가동하고 투입구를 정리하는 일은 김재순이 수행하는 일상적 노동이었다. 회사는 어쩌다 발생한 개인의 불운이라고 주장했지만 김재순의 죽음은 불운이 아니었다. 일어날 수순이었다. 김재순이 아니어도 누군가 죽었을 법한 현장이었다. 김재순은 회사의 지시이자 승인 아래 파
■ ‘대학 언론’은 대학 사회 담론, 문화 형성 등 또 다른 민의 기관.. 그러나, 기자 개인 업무에 허덕이니 학보 대학 담론의 진지한 고민 어려운 실정 현대 최초의 낭만주의 시인으로 꼽히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남긴 명언이 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모 정치인이 이 명언을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고 하여 한동안 크게 화자 되기도 했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명언을 보며 “아! 이것이 전형적인 우리 대학 언론인의 상황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동안 <대학알리>를 통해 학보사의 어려움을 알리고, 학보사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설득해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지방대 학보사 기자들과 연락하며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본인이 어려웠던 점, 지방대 학보사의 중요성 등을 물어봤는데, 공통되게 돌아오는 대답들이 있었다. 바로 “사실 한 번도 이런 것들을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니, “그동안 취재, 학교 행정 업무가 너무 바빠 기자 개인 업무에만 몰두했지 진지하게 지방대 학보사의 담론 형성과 같은 것을 고민해 본 적이 잘 없다”고 대답했다. 즉, 기자 일 하는 것조차 너무 바빠서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라서다. 그가 8년간 아버지를 돌본 이유다. 8년간의 돌봄 경험을 바탕으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판했다. 아빠가 쓰러지기 전까지 각자의 생계는 각자가 책임졌다. 1인분의 몫을 해내면 됐다. 아빠가 쓰러지고 감당해야 할 몫은 2인분으로 늘었다. 어려웠다. 버거운 날들이 계속됐다. 아빠는 증상이 심해졌다. 외출하면 길을 잃었다. 수도꼭지 트는 방향을 헷갈렸다. 양복 입은 남자가 자기를 감시한다며 집 밖을 뛰쳐나간 때도 있었다. 어떻게든 아빠의 일상을 보존하려 했다. 잘되지 않았다. 지급해야 할 간호비와 수술비의 규모도 늘어갔다. 제도의 도움을 받기위해 방법을 알아보지만 잘 안됐다. 제도는 조기현 씨의 근로능력을 2인분의 몫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른 부양의무자인 동생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신청이 거부되는 때도 있었다. 아빠를 돌보면서 자기 삶을 꾸리고 싶었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국가는 포기를 종용했다. 제도는 아빠를 돌보는 일이 가족인 당신의 최우선이라고 규정했다. 동시에 가난을 무능으로 치부했다.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가 아니라 복지제도의 수혜자라는 취급이었다. 이런 환경이면 꿈을 꾸는 것조차 포기해야
“가족”이 대체 뭔데 인간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소중히 대해 주는 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사회 안에 머물고 있으며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는 감각(정체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테다)은 “나를 필요로 하고 소중히 대해 주는 이”에게서 얻는다. 일차적으로 개인은 가족에게서 그런 감각을 받는다. 가족이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천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가족의 본질은 뽑기다. 어떤 가족에게서 자랄 건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날 때 배당되는 것이 가족인데 우리는 이를 천륜처럼 받아들인다. 가족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천이어서지만, 그렇다고 필연으로 생각해 지나치게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거시적으로 바라보자. 가족이란 개념의 토대는 근대에서부터 출발했다. 미성년 자녀를 기르는 부부집단이 “가족”이라고 정의됐다.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일은 국가의 국민을 재생산하는 일과 같다. 자녀는 성인이 돼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체로 성장하고 그래서 가족은 국가와 개인을 매개하는 셈이다. 개인은 가족을 통해 국가에 편입된다. 김민정 교수(강원대 문화인류학과)는 “애당초 국가는 근대 때부터 가족을…
고함이 나서 이어폰을 뺐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싸우는 소리였다. 문을 열었다. 내가 있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싸우는 게 아니었다. 아빠는 혼나고 있었다. 핸드폰 요금이 10만 원 넘게 나왔다는 이유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절박했는지 무릎을 꿇었다. 모멸의 언어가 아빠에게 달라붙었다. 고성과 모욕이 몇 번 더 오갔다. 마흔 넘은 아빠는 일흔 넘은 할아버지에게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라는 문장을 되뇌었다. 그걸 주문처럼 외웠다. 모멸이 격발되는 건 잠깐뿐이라고 스스로 되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핸드폰 요금이 명시된 고지서를 봤다. 핸드폰 요금이 10만 원 넘게 지출된 건 교통비 때문이었다. 그때 아빠는 교통비를 낼 형편도 못돼서 핸드폰 요금으로 대중교통에 탑승했다. 고지서는 아빠가 끊임없이 이동했다는 증명이었다. 모욕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딘가 자기 가치를 알아줄 곳에서 노동하기 위해서였다. 몇 평의 방에서만 삶의 궤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빠는 그걸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빠가 정말 무능한 인간인지, 뭘 했고, 뭘 하고 싶은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빠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김예슬씨는 2010년 자퇴했다. 그는 대학 학업을 중단함이 아니라 거부한다고 말했다. 대학은 더 이상 배움과 진리를 가르치는 공간이 아니라는 언급이었다. 취업시장으로의 진출을 종용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력을 기성품처럼 찍어내는 곳이 대학이다. 학생은 팔릴만한 인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의 상품가치를 저울질한다. 졸업장은 자신의 배움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기업에 입사하기 위한 당연한 전제로 변했다. 그리고 대학은 거기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흐름을 더 빠르게, 유장하게 만들고 있다. 학생들은 자문할 수 없다. 자문해선 안된다. 편승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여기서 목소리를 내는 순간 레이스에서 이탈한다. 김예슬씨는 그 서글픔을 지적한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중략)... 그리하여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김예슬, <김예슬 대학거부 선언문>, 2010)” 미디어와 기성세대는 김예슬씨에게 투사의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