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뽀얀 볼과 세 치 혀를 가진 남자
그는 정치부 소속이었는데, 국회 생활이 몹시 고되고 힘들다며 하루빨리 후임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땅딸막한 체형에,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뽀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P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고 또 무례했다. 우리가 자리한 곳이 중국집의 프라이빗 룸이라는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P는 해서는 안 될 말과 질문들을 비속어와 함께 쏟아냈다.
“랩 했다면서. 노래방 좋아하겠네?”
“네. 그렇습니다.”
“오래 걷는 것도 괜찮지? 그럼 너 정치부로 와라.”
“네, 가고 싶습니다.”
“야, 지랄하지 마. 이 새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네? 정치부 안 오기만 해.”
그의 폭주는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입사 전 기자 생활 경력이 있는 동기에게는 ‘네가 기사를 그렇게 잘 치냐’며 시비를 걸었고, 여자 동기에게는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무력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던 우리는 화를 내거나 지적하는 것 대신, 목소리 톤과 표정 관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는 격언이 있지만 그는 피할 수 없는 똥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온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지껄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그는 급기야 자신의 과거 동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서 살아남은 자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열심히 하지 마. 응?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말라고. 우리 기수 기자 중에 진짜 잘하는 애가 있었어. 다들 걔보고 쟤는 기자협회 회장 될 거라고 했다니까. 근데 딱 1년 채우고 그만뒀어. 너네는 그렇게 되지 말라는 거야.”
그의 말에서 퇴사한 동료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후배의 기강을 잡고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퇴사한 동료를 끌어들이는 모습이 가증스럽고 비겁해 보였다. 선배 기수들은 그의 말에 부정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옅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가 뱉어놓은 말, 그리고 그에 대한 주변인들의 반응에 약간의 섬뜩함을 느꼈다. 나는 P 가 말한 선배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가 그만두게 된 이유 중에는 분명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술자리가 끝나갈 즈음, 그가 우리에게 곧 대면식에서 만날 다음 기수 선배를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하는 그는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끔찍한 일은 오늘만 해도 충분히 겪은 참이었다. P마저도 치를 떠는 다음 기수가 어떨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문득 P 역시 처음부터 저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는 알 길 없었지만, 그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술자리가 파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모르게 그의 까맣고 작은 눈을 오래 바라봤다. 그의 예전 모습이 그곳에 조금이나마 남아있을지 궁금해하며.
평화롭고 거룩한 땅에서
어느덧 마와리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나는 운 좋게도 그 사이 단독기사 한 편을 더 썼고, 담당 구역도 바뀌었다. 혼자서 마와리를 돌아야만 했던 이전 구역과 달리 Y 구에서는 다행히 동기 한 명과 함께 마와리를 돌게 됐다. 다만 동선이 겹치거나, 중간에 접촉해 정보를 나누는 것은 금지되었다. 내가 A 경찰서에 있을 때 그는 D 경찰서에서 취재해야 했고, 내가 D 경찰서에 있을 때는 그 반대인 식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생겼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머리를 짜내도 ‘개똥 발제’밖에 나오지 않아 나란히 혼날 때면 우리는 짧은 전화를 통해 서로를 위로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고난을 함께 겪고 있다는 감각, 이곳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했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온기가 담겨 있어 추운 길거리의 칼바람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통화가 끝나면 우리는 각자의 취재로, 각자의 발제로 찢어져야만 했다. 위안의 힘은 놀라웠지만, 고통은 안타까울 만큼 개별적이었다. 나는 마와리를 통해 각자의 고통은 결국 각자가 짊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뻔한 배움은 뒤로 하고, 다시 Y 구에 대해 말하겠다. 내가 새롭게 배정받은 지역은 평화로웠고, 달리 말하면 이렇다 할 사건 사고가 적은 곳이었다. 굵직한 사건이 많았던 중부 라인과 달리 Y 구 경찰서 민원인들은 운전 면허를 갱신하러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때때로 뻔한 보이스피싱 피해를 신고하러 오는 이들이 전부였다. 나는 안전디딤돌 어플을 통해 119에 접수된 신고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사건을 찾았다. 그러나 단순한 화재 사건은 보고거리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어야 비로소 사회부 기삿거리로서의 가치가 생긴다.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끔찍한 생각을 자주 했다. 나는 내심 어디선가 강력 사건이 터지거나 누군가 터무니없는 사고로 다치기를 바랐다. 그건 아주 못되고 비열한 바람이었고, 거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날은 유달리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 내도 발제거리가 떠오르지 않았고, 하루 종일 눈을 맞으며 경찰서 정문에 죽치고 앉아도 민원인은 오지 않았다. 보고 15분 전부터 나는 줄담배를 피우며 손톱을 뜯었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거룩하게까지 느껴지는 눈 내리는 겨울밤의 경찰서가 야속했다. 경찰서 내부 자판기 앞에 자리를 잡고는 주먹을 꽉 쥔 채 수화기 너머 선배에게 보고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찰나의 침묵이 흘렀고, 나는 그 짧은 틈에 납작하게 짓눌려 사라져 버리는 상상을 했다.
“죄송합니다. 보고거리가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너 지금 장난해? 보고거리가 없다는 게 할 말이야?”
“죄송합니다.”
“민원인을 만나긴 한 거야? 지금까지 뭘 했는지 싹 다 적어서 다시 보고해.”
수습이 보고거리가 없으면 그건 곧 선배의 책임이었다. 그는 인정받는 사회부 인재인 동시에 회사에서 가장 어린(나보다도 두 살 어린!) 기자였다. 때문에 그는 캡에게 ‘수습이 찾아낸 게 없다더라’는 무책임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단독 기사 두 건을 써낸 나는 선배들 사이에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랬던 나는 지금 Y 구에서 사정없이 죽을 쑤고 앉아 있었고, 선배는 그런 내게 ‘바이스가 너를 높게 평가해 기대했는데, 나랑 할 때는 왜 이러냐’고 말하며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끝내주는’ 기삿거리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가슴이 무거웠다.
임계점이 다가온다
다짐에 무색하게도 모든 게 임계점이었다. 체력이나 마음뿐 아니라 지갑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는 이동 시 반드시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회사에서 택시비 60만 원을 따로 지급받기는 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택시 10분 거리였던 예전 담당 구와 달리, Y 구는 택시를 타고서도 30분은 족히 걸릴 정도로 멀었다. 택시비는 무섭게 쌓였고, 그달에는 택시비로만 카드값 220만 원을 냈다. 만져보지도 못 한 수습 월급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발제 시간뿐 아니라 밥값이 모자라 편의점에서 식사를 대충 때워야만 했다.
그즈음부터 보고 시간이 다가오는데 이렇다 할 보고거리가 없을 때면 나는 차도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봤다. 차라리 차에 치여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발을 뻗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저앉아 숨을 고르기도 했다. 다른 경찰서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에 탈 때면 접촉 사고가 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다못해 체력 소진으로 기절해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생각보다 지나치게 튼튼한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쓰러지지도, 졸도하지도 않은 채 마와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날 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 번 연속 보고거리가 없어 그 벌로 밤 11시까지 지구대와 파출소를 돌았다. 당직 경찰관들은 늦은 시간 눈에 뒤덮인 채 찾아온 나를 당혹스러워했다. 파출소 두 곳에서 퇴짜맞고 나서야 마침내 한 작은 파출소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내 아버지뻘쯤 되어 보이는 그는 심심했는데 마침 잘 됐다는 듯, 따뜻한 커피를 내어주며 궁금한 것이 뭐든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어떤 사건이 주로 일어나는지 물어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동네에서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난 적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작전을 바꿔 근방 지리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뭐든 좋으니, 이야기를 오래 끌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자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근방에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벌집촌’이라는 곳이 있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거의 몰라. 월세를 아끼려고 한 평짜리 방에 벽을 치고 조선족들 다섯 명이 빽빽하게 모여 살거든. 참 안타까워.”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취약 계층 조선족과 ‘벌집촌’이라는 흥미로운 명칭, 게다가 지금은 유례없이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이었고, 한창 ‘난방비 폭탄’이 이슈가 되던 때였다. 기사, 그것도 단독의 냄새가 나는 기삿거리였다. 지금까지의 헛스윙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펜을 꺼내 곧바로 필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