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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겨울이 지나가듯
마와리가 끝난 날을 기억한다.
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챙겨 먹은 드문 날이었다. 나는 가리봉동 지파를 돌고 있었다. 오후 네 시 반쯤 선배로부터 카톡이 왔다. 여섯 시까지 본사로 집결하라는 내용이었다. 선배는 마와리가 끝났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나와 동기들은 이미 각자의 귀동냥을 조합해 대충 돌아가는 바를 알고 있었다. 드디어 마와리가 끝났구나. 동기 단톡방은 축제 분위기였다. 덧붙여 내 마지막 보고는 일선 지구대의 계급 인플레에 관한 것이었다. 선배는 그걸 두고 ‘무난한 정보 보고’라고 평가했다.
여전히 추웠지만, 날씨가 유난히 맑았다. 가리봉동에서 출발한 택시는 어느덧 마포대교에 닿았다. 한강은 넓고 파랬고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해방감, 안도, 안심, 그때의 기분을 설명할 단어가 마땅치 않다. 회사 로비에는 이미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몰골이 초췌해도 표정만큼은 밝았다. 동기들은 서로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고, 정말 마와리가 끝난 것이 맞냐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찰나의 기쁨이 지나가자, 동기들 사이에서 부서 배치에 관한 걱정이 화두로 떠올랐다. 우리에게 고지하지 않았을 뿐 이미 신입사원들의 부서 배치는 모두 끝났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서 배치는 신입사원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장이 알아서 배치했는데, 동기들은 소위 한직이나 ‘워라밸이 박살난’ 부서와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적성과 맞지 않는 부서에 배치될까 걱정했다.
나 역시 사정은 비슷했는데, 나의 경우 사회부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더 이상 경찰서를 돌아다니는 것도, 외롭고 아프고 슬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탈색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싫었다. 나는 내가 그러한 방식을 혐오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혐오하기 때문에 사회부의 삶을 단기간에 깊이 내면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정당화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일과 글을 분리하고 싶었다. 사회부에 들어가는 순간 이 일은 더 이상 단순한 밥벌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짙어졌고, 캡이 등장해 대회의실에 모인 우리를 이끌고 회식 자리로 향했다, 1차는 소고깃집에서 열렸는데. 국장과 사회부 부장을 비롯해 사회부 선배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회식이 시작되자 마와리를 도느라 수고했다는 형식적인 치하와 인사들이 오갔다. 곧이어 캡이 수습기자들을 가리키며 간단한 자기소개를 주문했다. 막 소고기가 불판에 올라갈 즈음에 내 차례가 왔는데, 나를 바라보는 사회부장의 시선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기분 탓으로 넘기기엔 어쩐지 찝찝했다.
사회부장은 식사 후 집에 가고 싶은 이들은 가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순진한 신입사원을 제외하고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진심인 듯 여러 번 반복해 강조했다. 너무나도 간절히 집에 가고 싶었던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장 나이가 많고 눈치가 빠르며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동기 한 명이 나서 아닙니다 저희도 2차 너무 가고 싶습니다, 라고 재빨리 수습했다. 그 말을 들은 사회부장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그래 너희가 가고 싶다면 말릴 수 없다 기꺼이 오너라, 라고 말하며 흡족해했다. 어쩌면 관료제의 고통은 고개 내민 진심과 먹고사는 눈치가 긴밀히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열린 2차에서는 1차보다도 훨씬 많은 인원이 합류했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자리를 빙글빙글 바꿔 가며 정신없이 데스크와 선배들에게 인사했다. 바뀐 자리만큼이나 대화 주제도 휙휙 바뀌었는데, 거나하게 취한 어느 데스크는 내 노래를 들었다면서(그놈의 노래!)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전혀 그렇지 않은 눈빛으로) 몇 번이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 그는 우리가 돈 마와리 기간이 너무 짧아 후배로 인정할 수 없으며, 우리를 후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고도 했다. 캡은 옆에서 하리꼬미(경찰서 숙식)을 하지 않은 우리와 겸상할 수 없다며 말을 보탰다.
마와리가 대물림하는 폭력의 굴레도 술자리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들은 말들이 모조리 잊히기를 바라며 술을 들이켜는 일뿐이었다. 다행히 마와리를 돌고 와 몸과 마음이 피곤한 탓에 취기가 평소보다 빨리 돌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동기들도 조금씩 눈이 풀려 가고 있었다.
그사이 자리가 또 한 번 돌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사회부장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나워 보이는 첫인상에 걸맞지 않게 사회부장은 능글맞고 웃음이 많은 자였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나는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력했지만 술잔을 부딪칠 때까지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은은하고 그윽한 미소를 띤 채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서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술을 한 잔 더 권했다. 술을 때려 부은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 충분했다.
“어쩐지..우리는 앞으로 자주, 그것도 진하게 볼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잘 부탁한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곳에 옮긴다. 다리의 힘이 쭉 풀리고 아득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짜릿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표정 관리에 실패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나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그는 마와리 중 경찰 기사를 쓸 때 나를 담당했던 사회부 선배였다. 거나하게 취해 혀가 꼬부라진 그가 대단히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려준다는 듯 귓속말로 속삭였다.
“사실...내가 너를 사회부에 강력 추천했어. 니가 사회부에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했거든.”
만취한 선배는 자신이 말한 사실을 잊어버린 듯,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 속삭였다. 그를 그 자리에서 패대기치지 않은 것이 내 이성의 마지막 투혼이었다.
지하, 지하, 지하
회식이 끝나고 며칠 후에 각자의 부서가 공개됐다. 나는 사회부였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거나 황당하지는 않았다. 동기 몇몇은 사회부 배치를 부러워했다. 사회부는 가장 실적이 좋은 수습기자가 가기 마련이고, 그곳에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와 별개로 사회부를 둘러싼 소문은 흉흉했다. 사회부 생활은 마와리와 전혀 다를 바 없다거나, 사회부를 탈출하기 위해 아무도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지방 지사직을 자진해 지원했다는 사회부 선배의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내 관할은 D구와 G구였다. 관할구 내에서 집과 가장 가까운 곳이 D구 경찰서라 나는 보통 그곳으로 출근했다. 아침 7시까지 회사 대신 경찰서로 출근한 후, 각종 이슈거리와 타사 보고를 정리해 9시까지 온라인 카페에 발제와 함께 보고해야 했다. 때문에 공식적인 첫 출근의 감각은 마와리 돌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설렘 대신 환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동작경찰서 기자실은 구축 건물의 습기 찬 지하에 있었는데, 곰팡내 나는 네 평 남짓한 방에는 이층 침대가 공간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을 낡은 책상과 의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에는 딱딱한 베개와 더러운 이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곳의 생활에 대해서는 솔직히 별로 쓰고 싶지 않다. 나는 말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일주일간 캡은 내가 올린 발제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른 선배들은 취재에 분주했는데, 나는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곰팡이 핀 지하 기자실에서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혹여 연락이 올까 걱정하며 반쯤 노이로제 상태에서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선배들은 어째서 캡이 내게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했지만, 누구도 이에 관해 섣불리 묻지는 못했다. 사회부 선배들에게도 캡은 무섭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나는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기자실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발제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했다. 캡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한 발제, 관심을 끌 만한 가져가야 했다. 퇴근 후에도 발제 스트레스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집에 있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어 경찰서 기자실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 늘어났다. 콘크리트 벽에 스민 겨울의 냉기는 더러운 이불을 뚫고 피부에 스며들었다. 추워서 자주 깼는데, 깨면 어둡고 더러운 기자실에 나 혼자뿐이었다. 환경이 열악한 탓에 동작경찰서 기자실은 나밖에 이용하지 않았다.
동력을 잃은 나는 무력했다. 밤새 아이디어를 짜 내도 뾰족한 발제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모 선배는 유난히 발제거리가 없는 시기이니, 우선 경찰들을 만나 얼굴을 터 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홍보실에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경찰들은 만남을 피했다. 나 역시 그들을 쫓아다니면서까지 만날 의지나 기력은 없었다.
겨우 버텨낸 마와리가 다시금, 그것도 일 년간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했다. 출근한 지 삼일이 지난 때부터 나는 기자실에 처박혀 매일을 울었다. 할 일이 없어 울 시간만큼은 충분했지만, 울면서도 핸드폰은 꼭 쥐고 있었다. 다행히 건물 지하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 소리가 새 나갈 일이 없었다. 고작 가만히 앉아 있기 위해 나를 보살펴준 애인에게 미안해 울었고, 너무 많은 것을 두고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생각에 안타까워 울었다.
그렇게 울고, 울다 지쳐 멍하니 있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핸드폰이 울렸다. 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