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대학알리

오피니언

[연재] 마와리 후기 9화

[편집자주] 해당 기고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게재됩니다. 

 

 

벌집

 

밤 10시 30분, 경찰서에서 나온 나는 선배에게 보고 내용을 읊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그는 내게 어떤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추운 겨울 합판 너머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벌집촌 조선족의 모습을 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만 있는 장면이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자마자 나는 가리봉동으로 향했다. 벌집촌이 가리봉동에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정확히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택시 기사에게 벌집촌을 아십니까, 라고 물었지만 가리봉동에서만 20년을 운전했다는 그 역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어디서 들어본 듯한 단어라는 듯 벌집촌, 벌집촌 하며 염불 외듯 단어를 되뇌었다. 그러기를 5분, 그가 앗,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벌집촌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그러고는 내게 그곳을 왜 가냐고 물었다. 취재하러 간다, 고 하자 그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가리봉시장 앞이었다. 벌집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리봉시장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 택시 기사의 설명이었다. 시장은 일직선으로 길었고 조용했다. 매대에는 중국 가공식품이나 과일 따위가 쌓여 있었는데, 가게 안에서는 남루한 행색의 사내들이 말없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터널을 연상시키는 시장 아케이드는 이쪽과 저쪽, 다시 말해 바깥 세계와 벌집촌을 연결하는 통로 같았다. 

 

가리봉시장의 출구를 기점으로 벌집촌이 펼쳐져 있었다. 고층 빌딩이 줄을 선 시장 ‘바깥’ 구역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시장 출구 바로 앞에는 작은 로터리를 중심으로 이불 가게, 쌀가게, 구멍가게 등이 영업하고 있었는데, 가게를 지키는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늙어 허리를 펴지 못했다. 이불 가게에 들어가 벌집촌의 위치를 묻자 늙은 여인은 이곳이 모두 벌집촌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굽은 허리를 간신히 펴며 코로나 때문에 조선족들이 모두 사라져서 생계가 곤란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도 이불을 사지 않아 요새는 폐지를 줍고 다닌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 주름이 깊었다. 

 

벌집촌을 찾아온 것은 다행이었지만, 인터뷰이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무작정 벌집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두드리고 다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문득 전날 경찰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벌집은 방 한 칸을 슬레이트로 나눠 놓는 구조이기에, 벽 사방에 문이 달려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명함을 들이밀며 소속을 밝혔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대부분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얼굴만 빼꼼 내밀었고, 내가 기자라는 말을 하자마자 대답 없이 문을 쾅 닫았다. 

 

그때 골목과 골목 사이에 뜬금없이 자리한 구멍가게가 눈에 띄었다. 너무 낡고 오래되어 레트로 컨셉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라면과 소주가 쌓인 좁은 가게 안에서 노인 여러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어가 인사하니 그들은 심심했는데 잘 되었다는 듯 나를 반겼다. 노란 평상에 앉은 가게 주인이 자신을 가리봉동 토박이라고 밝히며 컵라면과 믹스커피를 권했다. 벌집촌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반갑게 그게 여기다, 라고 화답했다. 말인즉슨 구멍가게 지하에 벌집이 있고, 자신이 조선족에게 세를 받고 방을 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그곳을 보고 싶다고 하자 그녀가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구멍가게 입구 우측의 지하실로 내려가자 말로만 듣던 벌집이 펼쳐졌다. 그곳은 지하실이 아니었다. 자연 발생한 지하 굴, 혹은 일제강점기의 갱도에 방을 욱여넣은 것에 가까웠다. 깨진 콘크리트 천장 사이로 새어 들어온 바깥의 빛이 희미하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는데, 이 복도를 사이에 끼고 좌우로 반 평쯤 되는 방이 줄지어 있었다. 눕기는커녕 앉기도 힘들어 보였다. 복도 끝의 재래식 화장실은 공용이었고, 부엌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은 반 평짜리 방을 가리키며 원래 이곳에 칸을 나눠 세 명이 살았는데, 지금은 칸을 치워 훨씬 넓어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하고 겨우 내뱉은 질문에 노인은 이곳에서 노동자들이 밤에 눈만 붙이고, 낮에는 한참 밖에 있다 온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노란 장판의 반 평짜리 방을 들여다보니 일 미터 남짓한 전신거울만이 덩그러니 벽에 기대어 있었는데, 방이 워낙 좁은 탓에 거울이 생뚱맞고 어색해 보였다. 한 가지의 가구밖에 고를 수밖에 없었을 텐데 방의 주인이 왜 하필 거울을 선택했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어둠이 짙었다. 노인은 조선족들이 곧 돌아올 시간이라 말했다. 나는 구멍가게에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일을 일찍 끝낸 몇몇 중국인 노동자들이 구멍가게에 들어왔다. 그들은 한국말을 모르고, 노인은 중국말을 몰랐지만 그들은 서로의 표정과 몸짓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소주와 라면을 들고 갔는데, 계산은 모두 외상으로 하는 듯했다. 노인의 장부는 가리봉동에 자리 잡은 시간만큼이나 두꺼웠다.

 

그때 빨간 쫄티를 입은 초로의 남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역시 지금까지의 손님처럼 소주와 라면을 집어 들었는데, 주인 노파와 반가운 듯 안부 인사를 나눴다. 말투로 보건대 조선족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 옆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말을 걸 기회를 노렸다. 마침 구멍가게 노인이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기자이며,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남자를 안심시켰다. 말의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게 이곳 사람들이 경계심이 많으며, 아마 나를 불법 체류자를 잡으러 온 사복 경찰로 오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남자에게 인터뷰에 응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의외로 흔쾌히 수락하며,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노인이 그가 벌집이 아니라 인근 연립주택에 세 들어 산다고 이야기하며,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없었고, 언제까지나 이곳에 앉아 완벽한 인터뷰이를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를 따라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의 거처는 연립주택 2층이었는데, 벌집보다는 조금 넓었지만 주거 환경이 참혹하기로는 매한가지였다. 문을 열자마자 현관 대신 화장실이 등장했다. 물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지 바닥 배수구에는 알 수 없는 찌꺼기가 가득 쌓여 있었다. 신발을 신은 채 세면대와 변기를 지나면 비로소 방이 나오는데,  화장실과 안방(이라고 불리는 공간) 사이에는 문이나 가림막이 없었다. 남자는 화장실을 가리키며 여름마다 악취가 지독하다고 말했다.

 

방의 가구라고는 전기장판과 이불, 달력, TV 선반이 전부였고,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냄새가 지독해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는 나를 전기장판의 가장 따뜻한 곳에 앉게 한 후 선반을 뒤져 담배를 권했다. 중국 담배였다. 한국 담배는 싱거워서 못 핀다며 웃었다. 그가 조잡한 총 모양 라이터의 방아쇠를 당겨 불을 붙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의 오른손 손가락은 네 개뿐이었다. 

 

남자는 주름이 깊었고, 햇볕에 탄 피부가 어둡다 못해 붉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와 어울리지 않는 긴 염소수염 몇 가닥을 기르고 있었는데, 일부러 길렀다기보다는 방치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앳된 인상을 가진 탓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가 30대 후반이라고 해도, 혹은 50대 초반이라고 해도 모두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배를 무는 남자의 입을 자세히 보니 앞니가 하나 없었고, 그것이 그가 겪는 고된 노동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는 오랜만의 손님 방문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행여 불편한 것이 없는지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름과 직업, 그리고 추운 겨울에 발생하는 애로사항 등을 물었다. 

 

그는 십 년 넘게 중국의 한 공장에서 기술공으로 일했다. 생활은 나쁘지 않았지만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 절단된 직후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즈음 마침 스무 살 된 딸이 결혼하게 되었는데(아마도 속도위반일 것이다), 택시 기사인 사위 역시 생계를 잇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그는 아내와 딸, 그리고 사위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이 년 전 한국으로 왔다. 

 

타국의 일용직 노동자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는 그는 이곳에서 번 돈의 대부분을 가족에게 송금한다. 그렇게 돈을 보내고 나면 그에게 남는 돈은 육십 만원에 불과한데, 여기서 월세가 빠지면 생활은 더욱 빠듯해진다. 취미는 없고,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게 전부라고 했다. 여름이면 악취와 폭염이, 겨울에는 추위가 곤란했다. 추위보다 무서운 것이 돈이었는데, 그는 난방비를 감당할 수 없어 전기장판을 사용했다. 유달리 추운 날이면 그마저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추워서 깨면 한참을 못 잔다. 

 

-그렇게 깨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고향과 가족 생각을 한다. 당신도 가족이 있나.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은 축축하고 붉었다. 노동이 빼앗아 간 살의 자리에는 외로움이 뼈보다 단단히 사무쳐 있었는데, 그의 그리움은 온몸이라 함부로 쓰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내리깐 시선이 노란 장판에 닿았다. 갈색으로 변색된 노란 장판의 소용돌이무늬는 끝없이 어지러워 아득했고, 궁핍이 외로움에 지지 않을 만큼 인이 박인 듯 해 답답하고 기막혔다. 그도, 나도 끝내 고향이 될 수 없는 땅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서울은 이민자들의 아수라도(阿修羅道)였다.     

 

그는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떠나는 나를 붙잡으며 괜찮다면 종종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소주나 먹읍시다, 하고 말하는 그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럴게요, 꼭 그럽시다 하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긴 채 그와 헤어졌다. 나는 선배에게 내가 만난 남자의 형편과 사정에 대해, 그의 표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것이 내가 취재한 내용, 그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는 내용의 전부였다. 

 

선배는 내 보고가 처음 취재하고자 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다고 일갈했다. 선배의 꾸짖음은 정당했다. 애초에 남자를 따라갔을 때부터 “추운 겨울, 벌집촌에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조선족들” 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취재를 했나, 라는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선배는 몹시 실망하고 화난 목소리로, 한편으로 하는 수 없다는 듯 내게 퇴근을 지시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때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역시 취재가 잘 풀리지 않았는지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였다. 그가 퇴근했냐, 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역시 막 퇴근한 참이었다. 그가 내게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거짓말했다. 나는 내가 마주한 것들을 담아두고 계속 생각했는데, 훌륭한 기자는 이 모든 것들을, 세계의 고단함과 피로를 적당히 타자화할 수 있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포기하고 잊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일지, 그렇게 잊어버린 것들은 먹고사는 일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답은 없었지만 밤은 깊었고 잘 시간은 모자랐다. 나는 집으로 가고 싶었고, 집으로 가야 했다. 마와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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