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1 (목)

대학알리

대학사회

故고현철 교수의 민주주의

 

 

 

 2015년 교육부는 국립대학교 총장선출을 간선제로 시행하도록 종용했다. 대학구조개혁 평가항목에 총장선출방식의 배점을 높게 책정하는 식이었다. 직선제를 유치했을 때 선거가 가열되며 학내 파벌 형성, 금품, 뇌물 수수가 발생하고 이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대학들은 거부했다. 겨우 몇 십명의 표본 집단으로 이뤄지는 선거가 학내 여론을 대변하기란 불가능하다. 간선제는 50명 정도로 구성되는 추천위원의 투표로 선거가 치뤄진다. 추천위원에는 외부인사가 일정 비중 이상 반드시 포함돼 있어야 하며 2순위 까지의 후보를 교육부에 제청하면 최종 임용은 교육부에서 결정한다. 결국 교육부 입맛대로 총장을 임용하겠다는 뜻이었다. 80년대부터 지켜온 대학자율성의 후퇴였다.

 

 교육부는 엄포가 아님을 보여줬다. 직선제를 유지하던 부산대학교는 그 해 평가에서 C등급을 받았다. 강원대학교는 D+등급을 받고 재정사업에서 배제됐다. 별 수 없었다. 정부가 재정지원을 볼모로 쥐고 있으니 대학들은 간선제를 추진했다.

 

 부산대학교 고현철 교수가 학내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투신한 것도 그때다. 그는 유서에서 교육부의 정책을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라 표현하며 “대학, 나아가 사회의 각성을 촉발시킬 수 있다면 자신이 그 희생을 감당하겠다”고 말했다.

 

 대학들은 일어났다. 내가 처음으로 본 대학 사회 내 연대였다. 교육부와 소송을 치르는 대학도 있었다. 대학 구성원 모두가 교육부를 규탄했다. 당신의 희생을 외면하지 않겠다. 대학 민주주의를 지키겠다. 교육부는 고현철 교수의 투신에 대해 별도의 성명이나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다.

 

 고현철 교수의 투신은 학생사회에도 인장을 새겼다. 대학의 자율성은 대학의 주체인 학생 역시 누려야 할 권리다. 학생이 없다면 대학이라는 공간은 성립조차 할 수 없다. 학생사회는 교육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동시에 총장직선제의 학생 참여 비율 확대를 요구했다. 부산대학교는 총장선거에서 학생 참여 비율이 1.3%다. 강원대학교는 2.5%다. 총장선출규정에 학생의 투표권이 반영되는 비율을 10%이상으로 명시한 국립대학교는 거의 없다. 학생 참여 비율 확대는 ‘왜’를 질문한 셈이다. 대학은 교육의 공간이다. 그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의 투표권은 온전히 보장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동등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그 가치는 대학내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왜 학생은 배제되는가.

 

 학생연대의 요구는 묵살됐다. 학내 정상화가 우선이다. 당시 강원대학교 비상대책위원회는 강원대학교 학보사와의 인터뷰에서 “학교 정상화를 바라는 성명서가 발표되고, 교육부로부터는 행, 재정적 불이익을 감내해야하는 상황이다…(중략)...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강원대학교는 직선제와 간선제가 뒤섞인 ‘대학구성원 참여제’로 선거를 치렀지만 학생참여비율을 10%로 상향하라는 총학생회의 요구는 수렴하지 않았다.  부산대도 마찬가지다. 부산대학교 교수회는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직선제 규정안을 차질 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있다”며 “학생에게도 참여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학내 구성원의 이해를 바란다”고 말했다. 

 

 학생 참여 비율의 확대는 차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는 맥락이었다. 직선제라는 거대한 흐름에의 쟁취가 우선 중요했다.

 

 그 때부터 4년이 지났다. 정권이 바뀌며 재정사업과 대학평가를 볼모로 한 교육부의 총장선출방식 개입 정책은 폐기됐다. 그리고 차후에도 가능하다는 학생 참여 비율 확대에 대한 논의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학생 참여 비율이 10%를 넘는 국립대는 여전히 거의 없다. 사립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시 내 사립대학교 중 학생의 투표권을 반영하여 총장선거를 치르는 대학은 3개교다.

 

 

 전국국공립대학생연합회는 지난 10월 부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장직선제 투표비율을 교수가 결정하는 행태에 거부의사를 밝혔다. 전국 국립대 학우 3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학생 투표권 확대가 명시된 서면을 국회위원과 교육부에 전달했다.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황지수씨는 44일동안 학생참여 총장직선제를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전개했다. 지난해 홍익대, 고려대, 한신대, 서울대 총학생회는 학내 구성원 모두에게 투표권이 부여되는 총장직선제를 주장했지만 무시됐다. 홍익대학교 신민준 전 총학생회장은 단식투쟁으로 직선제에 대한 의지를 표시했다. 그해 홍익대는 간선제로 총장을 뽑았다. 숙명여대 이사회는 총장선출방식 개선을 위한 TF팀을 구성할 것이라 밝혔는데 학생 참여 비율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아직 미진하다.

 

 민주주의의 개념을 다시 되짚어본다. 근대 때 본격적으로 태동한 민주주의는 평등을 토대로 한다. 평등은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의미한다. 지위, 부, 소속과 무관하게 누구나 1인 1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그 이상은 행사할 수 없는 것. 국가 규범에 따르고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데 앞장서는 사람이나 민주주의의 개념에 무지한 사람이나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며 가져야 한다고 정의한 것이 평등이자 민주주의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기본 원리다. 지금까지 사회를 받쳐온 시스템이다.

 

 대학과 교수들은 학생 참여 비율 확대에 우려를 제기한다. 혹은 무시한다. 대학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총장선거에 영향을 주는 투표권의 비율을 조정함이 당연하다는 맥락이다. 결국, 몇 년이상 대학 공간에 적을 둔 교수보다 학생들이 총장선거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더 알겠는가, 따위의 주장이다. 동의할 수 없다. 위계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대학구성원의 절대 다수인 학생을 교육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셈이고 주체로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언어와 다를 바 없다. 당신들이 언급한대로 정말 우리가 대학공간에 기여한 바가 적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거기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 누구나 동등하고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지닌다는 것. 그게 민주주의다. 학생 참여 비율 확대에 대한 거부는 민주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는 문장인 셈이다. 고현철 교수가 언급한 민주주의와 대학자율성이 이런 의미는 아닐 거다.

 

 황지수씨를 비롯해 우리가 주체로써 온당한 권리를 획득하는데 목소리 높인 수많은 학우들을 응원한다. 작은 사회도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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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기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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