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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된 욕망: 지옥고의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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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지만 드러나지 않는 공간


  게시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배제를 집방 열풍이 보여주고 있다. '집방'은 '먹방', '쿡방'과 더불어 하나의 주요 방송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코로나 19로 일상의 많은 것들이 변하면서, 또 다시 ‘집’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집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들은 당대의 집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다. 내집 리모델링, 1인 가구를 위한 멋진 자취방, 집에서 대부분의 활동을 수행하는 트렌드를 반영한 집 정리까지.  가구 재배치로 넓어진 자취방 투어, 홈카페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인기 컨텐츠다. 이렇게 “집”은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그 열풍은 여전하다. 

 

   한편으로는 기묘하다. 좋은 삶, 멋지고 쿨한 삶을 비춰온 가운데 정작 현실은 없었기에. 아름다운 집, 상향평준화된 이미지에 포섭된 방은 넘치도록 쏟아진다. 반면 어떤 공간은 집에 대한 욕망보다 더 자명한 현실로서 있어왔는데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화면에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은 없다. 환상과 낭만으로 교차하는 집보다 더 가까이에 존재했을 거주공간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다만 불쌍한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 빈약한 이해는 소확행, 케렌시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던 자기계발서류가 종용하는 탈정치화, 삶에 안주하며 작은 행복이나 지키고 살라는 우아하고 세련된 훈계와 맥을 같이한다. 관용어가 된 “청년 세대”가 이를 방증한다. “힘든 청년세대”, “N포”라는 이름만으로 쉽고 빠르게 동정하는 한편, 여전히 요즘 젊은이들은 도덕의식이 낮고 정치에는 무관심해 쾌락만을 쫓고 있으며, 노력이 부족하다는 철 지난 논의들도 쏟아지고 있다. 

 

  청년세대 담론에 대해 쏟아지는 수많은 논의 속 정작 욕망과 타협의 경계에서 변주하는 내밀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허함, 패배감, 무기력이 교차하는 곳은 어디이며 그 곳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 지에는 무관심하다. 다만 “청년”이라는 이름 아래에 포괄했고 추상적 실재로만 남긴다. 그렇게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포기해야 하는 삶, 욕망과 타협해야 하는 삶,  대학이라는 학력자본에 포섭되지 않는 삶, 인스타그램에 게시할 수 없는 ‘찌질함’으로 점철되는 삶은 배제된다. 

 

 

“거기서도 인테리어를 해요?”


  정상성의 관점에서 배제된 존재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옥고(지하/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에서 이루어지는 인테리어와 그 삶을 바라볼 때 반드시 염두해야 할 2가지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첫째, 지옥고 속에서도 그들은 “아름다운 집”, “집같은 집”을 욕망하며 인테리어를 통해 주체성을 실현하려 한다. 지옥고는 한국에서 선망이 되고 전시할만한 “나의 집”도 아니며 으레 나오는 감성 넘치는 소확행과도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에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분투한다. 그리고 혹시나 미래에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요원한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지하, 옥탑방, 고시원에 투사한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자신의 집에 투영하는 욕망은 타협된 형태로 드러난다. 아름다운 집을 욕망하고 인테리어를 하여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한편, 결국 자신이 살아가는 거주 공간은 비좁고 탈출해야 하는 곳, 자신을 더욱 위축시키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이렇듯 지옥고에서의 인테리어는 모순적 기능을 수행한다. 무엇이 이들의 욕망을 철저하게 타협된 형태로, 혹은 좌절된 형태로 남을 수밖에 없게 했는가. 

 

 

#좋아하지만 좋아할 수 없는 나의 집

   

 

 지옥고에 사는 사람에게 ‘집’ 혹은 ‘방’이라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제한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불쌍한 사람, 굳세게 살아가는 청춘, 고시생이 살아가는  “시설이 좋지 않은 곳”, “얼른 나가고 싶은 곳.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떤 사람도 그 곳이 쾌적한 주거공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느끼는 감정적 충돌과 모순을 배제하여 바라본다면 약자는 연민을 통해서만 표상되고 소위 ‘청년’의 삶은 단편적으로만 남는다. 그들에게 방은 모순적 감정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자유롭지만 자신을 누구보다 한계짓는 곳이며 원하는 걸 실현할 수 있지만 어떤 곳보다 자신의 무력함을 직시하게 하는 곳이다.  


"상경해서 자유로운 공간이긴 하지. 나 혼자 밥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다 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꾸미고 사니까 아늑하기도 하고. 나만의 공간이고 내 취향따라 꾸밀 수도 있어. 근데 좀 묘해. 지금 사는 방에 만족하면서도 몇 층에 사냐는 질문에 내 처지가 부끄러워지거든. 예전에 같이 밥 먹는데, 어떤 분이 “난 도저히 반지하 같은데에서는 못살겠던데, 어떻게 사는거지. 더 좋은데 많은데”라고 말하더라고. 사실 그 순간 화도 나면서 내가 부끄러워졌어. 살고 싶어서 산 것도 아니고(웃음). 그래서 뭔가 묘해.  물론 여기가 사람 살기 좋은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화재경보기도 없고 손도 안 닿는 곳에 부실한 창문이 있어. 햇빛 한 줄기 안들어 오고 빨래도 편하게 못 말리니까. 근데 이런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잖아. 아, 뭔가 음, 좀 모르겠는데 그냥 묘해. 나한테 좋은 공간인데 그렇다고 뭔가 좋다고 말할 수만도 없는 데고 가끔은 여기 내몰려서 온 것 같고. 


기본적으로 내 방을 되게 사랑해. 혼자 울 수 있는 공간이니까. 자취를 하게 된 계기가 기숙사에서는 혼자 울 곳이 없어서였거든. 근데 요즘은 좀  짜증이 나. 짜증 나는 계기는 사소해. 물건 놓을 공간은 없고 쌓아놓다보니 자꾸 부딪혀서 멍 생기는 것부터 짜증이 시작되지. 좀  더 넓은 데로 가자고 생각을 하거든. 돈 좀 더 얹으면 갈 수 있는데 사실 그거 얹을 돈이 없어서. 여기는 주인집이 관리도 잘하고 물도 공짜, 건조기도 공짜라서 다 좋은데, 그러면서도 현타가 와. 이 방이 좁아서. 택배가 하나라도 오면 그 상자 빨리 뜯자마자 안 버리면 내가 발 디딜 곳이 없어. 활동반경은 침대 아니면 의자로 제한된 상태야. 그래서 요즘 화장실을 자주 가. 그게 그나마 사색의 공간이라서. 변기도 아니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몇 발자국 돌아다닐 때가 거기 밖에 없어서. 내 방을 되게 좋아하긴 하는데 묘하게 성질이 나는 그런 공간이지."

 

  이들이 거주 공간에서 느끼는 감각은 애정과 좌절의 충돌이다. 자유로운 공간, 자취방으로서는 지옥고라 할 지언정 좋은 공간이다. 원하는대로 꾸밀 수 있고 의지가 있는 한 꾸밀 수 있다.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이자, 내가 소유한 방,  울 곳 없는 타지에서 유일하게 울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방을 마냥 사랑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사랑하기 어렵다. 지옥고는 분명한 좌절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그들은 폭력적인 연민과 동정의 낙인이자 몇 걸음 걸어다닐 공간조차 없어 화장실 거울 앞에서 서성거려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자신을 바라본다. 이처럼 열악한 거주 공간이 주는 고통은 시혜적인 관점이 으레 떠들어대는 더러움, 낡음, 퀘퀘함, 바퀴벌레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공간은 거주자에게 비좁은 공간으로 인한 신경증, 처지에 대한 부끄러움, 자기 검열을 위한 인테리어라는 좌절을 만든다. 

 

 

 

#욕망을 실현하는 인테리어


  애정과 좌절이 교차하는 방에서도 인테리어를 한다. 소중한 방이지만 흔쾌히 좋아하기에는 찜찜한 바로 그 지점을 지우고 쾌적한 공간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그렇기에 이상적 이미지를 투사한다. 은은한 조명, 세련된 이불, 수납으로 감각적인 방 한 칸을 만든다. 지옥고에서의 인테리어는 불쌍한 거주자로만 바라보는 외부 시선에 대한 항변이자 자신을 위한 위로이기도 했다.  노란 장판을 덮고 곰팡이를 가리며 ‘좋은 집’, ‘아름다운 집’을 스스로에게 인식시킨다. 

 

"반지하 같은데 산다고, 불쌍하다고 봐. 처음엔 열 받았는데 이젠 지쳐서 그냥 참아. 근데 시선을 의식 안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자꾸 내 처지에 대해서 상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오래 생각을 하게 되는거야. 나도 안 부끄럽고 싶고 이런 시선이나 편견을 스스로가 신경 안 쓰게 만들고 싶어서. 내가 사는 곳, 내 눈에 비치는 곳에서 그런 흔적들을 지우고 싶었어. 오늘의 집 같은거에 나오는 집이 되면 나도 좀 사람같이 사는 것 같잖아. 깔끔하고 감성적인 집 같고 집에 있어도 휴가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예전에 살던 지하에서는 노란 장판이 보기 싫어서 바닥에 뭘 깔거나 그랬고 벽지에도 곰팡이 자주 생기니까 포스터 붙여놓고. 뭐, 어차피 임시방편이고 뭐 하나 안바뀌는거 알고 있어. 어차피 최소 몇년은 이런 집을 전전하고 살테니까. 근데 이렇게라도 사람 사는 공간에 있다고 꽥 소리치고 싶어. 불쌍한거 나도 아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불쌍하고 싶지도 않은 거? 


약간 최대한 예쁜 집처럼 만들어두면 내 처지를 좀 잊게 되는 느낌이야. 뭐 어떤 사람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냐고 할지는 모르겠는데 나한텐 그래. 집 들어왔을 때 하얀 이불, 무드등, 엽서로 꾸민 벽 같은거 보면 사람들이 행복해한다는 바로 그 집에 나도 있는 것 같거든. 지금은 경제적으로 힘드니까 많이 하진 못하지만 미래에라도 살게 될 어떤 좋은 내 집에는 이렇게 해두면 어떨까 하고 되도 않는 상상해보기도 하고." 


  지옥고에서의 행위는 복합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미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인테리어가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모르지 않는다. 대신에 직면한 거주 환경을 잊을 수 있다. 살아가고 있는 곳이 모두가 혀를 차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잠시 동안 외면할 수 있다. 또한 지옥고의 인테리어는 미래에 대한 욕망을 분출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한편 조금은 나아진 어떤 시점을 상상하며 인테리어를 한다. 먼 미래 혹은 가능하지 않은 미래임을 알면서도 떠올리는 이상을 위해 이들은 방을 가꾼다.   

 


#그러나, 욕망은 타협된다


  그러나, 욕망은 타협된다. 타협은 원하는 바를 뜻대로, 있는 그대로 실현할 수 없을 때 등장하는 전략이자 절망의 경험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다. 타협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그만큼의 좌절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그렇게 누군가에게만 좌절의 경험, 타협된 욕망이 일상화되어 있을 때 이 현상은 철저히 정치적이다. 원하는 집, 조금이라도 쾌적한 집, 좋은 집에 대한 욕구는 인테리어 행위를 통해 실현되나 타협된 형태로만 수행되며 때로는 취향마저 타협된다. 


"보통 방에 인테리어라고 한다면 전체적인 색감이나 조명을 자기가 설계하는걸 생각한단 말이야. 근데 여기서는 그런 걸 할 수가 없으니까 어디에나 맞춰줄 수 있는 색깔을 고르게 되더라고. 각자의 취향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겠지만.한편으로는 방 느낌에 맞춰지는 느낌이 들어. 흰색은 어디든지 맞춰지니까  흰색을 고르게 되고.


타협이지...한 80% 타협이지. 나도 이상은 있어. 원하는 집? 근데 당장은 못하고 어쩌면 향후 10년을 담보로 해도 충족이 안될 수도 있어. 그렇다고 여기에 만족하고 살 수도 없고. (중략) 그래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좁히는 타협점인 것 같아. 별로인 집이라도 꾸미면 나름 내 이상과 조금 가까워지는 느낌이라서. 이게 첫번째 타협이고 두 번째는 최근에 생긴건데, 이 공간이 엄청 한정되어 있고 물건은 좋든 싫든 둬야 하고..내가 예쁜 물건만 갖고 있지는 않고. 그래서 최대한 있는 물건으로, 있는 공간으로 살아야 해서 이 안에서 활용을 해야 해."

 

지옥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고자 욕망하며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려 한다. 그러나 그 욕구의 실현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반영한다. 최소한의 안전시설과 활동 공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곳을 전전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부끄러워지는 자신의 환경에도 그 곳에 살도록 내몰린 사람이 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다. 대신 자신에게 보이는 방을 꾸미며 달랜다. 아무리 노력한들 10년 후에도 지옥고를 벗어날 수 없음을, 글을 읽는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타협된 욕망은 공간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속성을 보여준다.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기대도 할 수 없는 현실, 이것이 지옥고에서 인테리어하는 이들에게 보이는 사회다. 

 

 

# “청년”을 이해하겠다는 당신에게


  거주 환경에 대한 문제제기는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 그 논의가 실제 개인의 삶은 보지도 않은 채 전개되는 것이라면 위험하다. 지금까지 지옥고(지하, 옥탑방, 고시원)를 다루는 대부분의 글에는 거주자의 구체적 행위나 욕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청년은 없었다. 그저 서울, 수도권 대학생이 미래를 위해 택한 열악한 거주 공간에만 국한되며 실제로 뭘 하고 있는지는 잘 포착 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거주 환경에 놓여있는 “대학생”. 이것이 사회가 허락한 청년의 이미지다. 지방에 거주하며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가정에 기댈 수 없는 청년은 없었다. 지옥고에 사는 청년은 누구인가?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욕망이 좌절되는가? 그들은 왜 온전하게 욕망을 실현할 수 없었는가? 등,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고민 없이 전개되는 청년 담론은 무용하다. 

 

  청년을 이해하겠다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언론이 실어나르는 불쌍한 대학생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수가 “0세대”를 분석한답시고 쓴 어처구니 없는 칼럼도 아니다. 화려한 통계 지표가 아니어도 된다. 필요한 건 더 많은 삶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다. 인테리어 같은 시시껄렁한 짓,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사람, 1.5평의 방에서 촬영한 일상 컨텐츠 영상(브이로그)까지. 그리고 그 삶이 대학생으로만 표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각할 때 비로소 이해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