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방 씨는 최근 졸업을 앞두고 목표로 삼았던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조언을 구했던 교수가 방 씨에게 대학원 진학을 만류했기 때문이다. 방 씨는 “최근 정부의 R&D 예산 삭감 정책으로 대학원이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서, (교수님께서) 당장 대학원보다는 취업하는 쪽을 추천해 주셨다”고 말했다. 손때가 묻은 전공책 대신 채용 박람회 팜플렛을 손에 쥔 방 씨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방 씨에게 대학원 진학을 만류했던 A 교수는 “방 씨뿐만 아니라 대학원 진학을 물어보러 오는 다른 학생들한테도 취업을 추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주된 이유는 R&D 예산 삭감이었다. A 교수는 “내년에 연구비가 어떻게 변동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R&D 예산 삭감이 정해졌기 때문에) 지금보다 좋은 상황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A 교수는 내년도 연구 수행과 과제 수주를 두고 대학가 전반에 고심이 깊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 대학가에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미치고 있다. 정부는 지난 8월 말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R&D 예산으로 올해 대비 16% 삭감한 25조 9천억 원을 편성했다. 지난 1991년 R&D 예산 삭감(당시 10.6% 삭감) 이후 33년 만에 이뤄지는 삭감이며, 동시에 삭감의 폭도 더욱 크다. IMF 외환 위기를 겪던 시기에도 R&D 예산은 기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재원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해 꾸준히 증액됐다. 정부의 이번 예산 삭감이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R&D 예산 삭감을 ‘구조개편’이라고 표현했다. 그간 R&D 예산이 꾸준하게 증액되면서 예산이 방만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에,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전반적인 개혁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은 내년도 R&D 예산안을 두고 “방만해진 R&D 투자를 재조정하여 성과를 높이는 방향으로 개혁하려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R&D다운 R&D에 예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며 정부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국회에서는 정부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여당과 R&D 예산의 복구를 주장하는 야당 간 대립이 한층 심화되고 있다.
노조·교수·학생 일제히 반발… 연대 통한 단체행동 나서
정부의 예산안이 발표되자 과학기술계는 크게 반발했다. 가장 직접적으로 풍파를 맞는 연구자들과 교수부터 시작해 대학원생 노조, 학회 등지에서 예산 삭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예산 삭감 폭이 큰 이공계열 대학과 연구소에서는 과학자들이 연합 단체를 구성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등을 포함한 10여 개의 과학기술계 노동조합은 지난 9월 5일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를 구성했다. 과학기술계가 정부의 정책에 반발해 연합단체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대회의는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예산 삭감은) 과학계의 공감대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일방적인 삭감”이라며 “명백히 과학기술을 무시하고 연구 현장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27개 과학기술 학회가 참여하는 기초연구연합회도 지난 9월 18일 정부의 R&D 예산 삭감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수, 연구원 등을 포함한 기초연구 과학자 10만 여명 소속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기초연구연합회는 정부의 이번 예산 삭감이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며 예산안에 대한 재고를 요청했다. 또 이들은 정부가 지나치게 현장을 등한시한다면서 현장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안정적인 기초연구비를 확보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를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학생들이었다. 지난 8월 28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를 비롯한 전국 7개 대학 학생회는 ‘과학기술 분야 R&D 예산 전면 삭감 정책에 대한 성명문’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또 이들 단체와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는 ‘R&D 예산 감축 대응 대학(원)생 TF’를 발족해 정부의 예산 삭감에 정면으로 대응할 뜻을 내비쳤다. 이들은 지난달 10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R&D 예산 삭감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서 정두호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이하 대학원생 노조) 지부장은 “이번 예산 삭감으로 시료를 사지 못해 연구를 못 하거나, 논문심사비 및 학회비가 줄어 논문 발표를 못 하거나, 참여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등 연구자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원생 노조는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우리학교 R&D 얼마나 삭감됐을까?’라는 자료집을 공개해 대학원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국회에 모인 학생들… R&D 삭감의 문제점 지적하며 해결책 토론
총학생회 공동포럼은 지난 13일 국회에서 ‘R&D 예산 삭감 대응을 위한 대학생 국회토론회’를 개최했다. 총학생회 공동포럼은 주요 학생자치단체 20여 개가 소속돼 있는 대학생 단체다.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의원실과 함께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는 각 대학의 대표 패널이 모여 이번 정부의 R&D 예산 삭감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서휘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학생회장 대행은 “이번 예산 삭감이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대학원 진학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는 등 많은 학생들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홍석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이번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이공계로의 진로를 선택하는 것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됐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설문조사 결과)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학생 중 97.7%가 이번 예산 삭감에 반대한다고 할 정도로 반대가 많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장 전문가로서 토론회에 참여한 이어확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 공동대표는 “이번 정부의 예산 삭감은 연구원들에게 있어 생존의 문제이자, 국가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며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도록 명확하게 과학기술계의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항공우주원 소속의 신명호 박사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번 예산 삭감과 같은 사태를 이대로 넘긴다면, 다음에도 정부가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 대표들은 ‘공동행동 5대 요구안’을 발표하며 정부에 예산안 재고를 촉구했다. 공동행동 5대 요구안에는 △내년도 R&D 예산안을 백지화하고 전면 재검토할 것 △정부가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무너진 연구현장의 신뢰를 책임지고 회복할 것 △R&D 예산 규모를 정부 총지출의 5%로 유지할 것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과학기술 정책 결정 과정에 연구현장과 소통할 수 있는 협의체를 마련할 것 △국회가 R&D 예산안 조정 과정에서 연구현장과 소통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