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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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시설인가’ 제주 섬식정류장과 양문형 버스

속도는 빨라졌지만, 안전과 접근성은 어디로
밀폐된 섬식정류장, 화재 대응은 ‘법의 사각지대’
‘누구나 탈 수 있는 버스’ 교통 혁신인가, 배제인가

​제주 서광로의 도로 한복판, 도로 중앙에 번듯하게 선 유리 정류장 안에는 온열 의자와 대형 전광판, 냉난방 시설이 들어서 있다. 비바람을 막아줄 밀폐형 공간 안에서 시민들은 버스 도착을 기다린다. 제주특별자치도(도지사 오영훈, 이하 제주도)가 추진 중인 ‘제주형 간선급행버스체계(BRT) 고급화 사업’의 상징인 ‘섬식정류장’이다.

 

제주도는 지난 5월부터 서광로 구간에서 BRT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 최초로 도입된 ‘섬식정류장’과 ‘양문형 버스’가 이 사업의 핵심이다. 섬식정류장은 도로 중앙에 설치돼 양방향 모든 노선의 버스가 동시에 정차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제주가 ‘섬(island)’이라는 점에서 착안해 섬식정류장으로 이름을 붙였다.

 

 

정류장 구조에 맞춰 버스도 변화했다. 기존 버스는 오른쪽 한쪽 문으로만 승하차가 이뤄지지만, 양문형 버스는 좌·우 양쪽에 출입문이 있어 섬식정류장에서는 ‘왼쪽 문’을 이용해 승하차한다. 도로 한 가운데 설치된 섬식정류장에 맞춰 기존 승하차 방식이 뒤바뀐 것이다.

 

 

버스로 제주대학교에 통학하는 김용희(24) 씨는 “정류장이 깔끔하고 바람 많은 제주 날씨를 잘 고려한 구조 같다”며 “비나 눈이 와도 비교적 편하게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섬식정류장 내부에는 버스정보시스템, 충전 시설, 온열 의자와 대형 스크린 등 다양한 편의 설비가 갖춰져 있다.

 

 

BRT 사업의 성과도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제주연구원의 조사 결과, 출근 시간대인 오전 8~9시 기준, 서광로 구간 양방향 버스 평균 이동 속도는 43% 향상됐다. 신제주에서 광양 방면은 기존 시속 10km에서 13.2km로 32% 증가했고, 광양에서 신제주 방면은 시속 11.7km에서 17.9km로 53% 빨라졌다. 극심한 정체로 어려움을 겪던 도심 버스 길이 숨을 돌리기 시작한 셈이다.

 

‘누구를 위한 정류장인가’

 

그러나 속도의 개선만큼 안전과 포용성은 따라오지 못했다는 지적 역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섬식정류장에는 화재 감지기만 설치돼 있을 뿐, 실제로 불을 끌 수 있는 소화기나 소화전 등 소화 설비는 갖춰지지 않았다. 다중이 밀집하는 '밀폐 시설'임에도 기본적 화재 대응 체계조차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운수시설 중 시외버스정류장, 철도 및 도시철도 시설의 대기실 또는 휴게시설엔 소방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법적으로 의무화돼 있다. 반면, 섬식정류장에 경우 소화설비 의무에서 제외됐다. 밀폐된 대기공간임에도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섬식정류장 가운데 하나인 ‘탐라장애인종합복지관’ 정류장 앞에는 시각장애인의 보행을 돕는 점자블록을 가로막는 조경수가 설치돼 있다. 선형 점자블록(유도선)을 두 갈래로 끊어버린 이 구조물은 현장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 앞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가로막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셈이다.

 

 

본보는 해당 조경수의 설치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확인하기 위해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지혁 대리와 만나 2025년 대중교통 모니터링 결과를 들었다. 이 대리는 “휠체어 이용자의 버스 이용 만족도는 낮고 위험 요소는 많다. 장애인콜택시(교통약자 이동 지원 차량)에는 휠체어 고정장치 외에도 안전벨트나 보호 장치가 갖춰져 있지만, 시내버스에는 휠체어 고정장치 외 신체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없어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휠체어 이용자가 버스를 이용하려면 기사 도움을 받아 고정 장치를 착용해야 한다. 기사들은 연 1회 관련 교육을 받는다. 이에 대해 이 대리는 “실제 현장에서 능숙하게 대응하기엔 교육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장치를 고정하는 데 10분 이상 걸리는 경우도 흔하다”고 전했다.


접근성 문제는 장애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주시 10년째 거주 중인 손어진(25) 씨는 “섬식정류장까지 건너오는 동선이 쉽지 않다. 기존 정류장에 익숙한 어르신들은 헷갈려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도로 한가운데에 정류장을 설치한 구조 자체가 보행 약자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10월 27일, 제주도는 결국 ‘제주형 BRT 고급화 사업’을 잠정 중단했다. 오영훈 도지사는 이날 서광로 섬식정류장을 방문해 “‘시민 불편 문제와 교통난’을 먼저 해결하겠다” 며 동광로 노선 확대 계획 역시 전면 보류했다.

 

 

겉으로는 ‘누구나 탈 수 있는 버스’를 내걸었지만, 현실에선 ‘아무나 탈 수 없는 버스’에 가깝다는 게 현실이다. 교통 약자를 포괄하겠다는 제주도의 취지와 달리, 실제로 이동이 절실한 이들은 제도의 외곽에 머물러 있다.

 

지금 제주의 과제는 새로운 성과를 이뤄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만들어진 제도와 시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다시 점검하는 일이다. 도로 위에 세워진 정류장이 진정한 ‘공공 교통’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닌 포용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송연주(thdduswn8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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