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 (일)

대학알리

박성빈의 시선

어떤 게 '일반'적인 건데 ②

“그 틀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틀보다는 내 선택이 더 중요해요.”

 

※ 삶에 특정한 관문이 있다고 간주됩니다. 졸업-연애-취업-결혼-출산을 거치는 경로의 삶만이 정상이라 치부됩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정상을 성취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입니다. 경쟁은 심화되고 쟁취할 수 있는 파이의 규모는 축소되는 때에, 아직도 특정한 경로를 이행하는 삶만이 ‘정상적 삶’이라 정의되는 건 이상합니다. 청년은 그 당연하고 고작인 ‘정상’을 성취하기 위해 혈안입니다. 이만큼 버둥거려 노력해야 겨우 ‘정상’이 될 수 있다고 언급됩니다.
 

 대학알리는 특정하고 좁은 ‘정상적 세대론’에서 배제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려 합니다. 혹은 그 정상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합니다. 어떤 특정한 유형만이 ‘청년’이고 ‘정상’일 수 없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규범 같은 건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 서사

 

 

 김광석은 서른이 좀 넘어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서른’은 상징적인 숫자였다.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아님을 감각할 정도의 나이가 ‘서른’이라고 여겼다. 스무 살에 그 노래를 노래방에서 들은 적 있다. 내가 평소에 오만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불렀다. 

 

 김광석의 노래엔 자기 삶을 후회하는 화자가 있다. 그걸 부르는 이가 제대로 이해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는 후회하는 인간과 거리가 멀었다. 쓸쓸함을 자기 연민의 일종으로 해석하는 부류였다. 쓸쓸함과 후회를 이해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사랑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실패의 경험이 드물었다.
 

 실은 나는 그를 잘 몰랐다. 몇 번 포착한 그의 단편만으로 그를 재단한 것뿐이었다. 섣부른 재단에서부터 편견이 생기는데 그 때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편견을 통찰이라고 생각할 만큼 어렸다. 
 

 그는 학보사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에 응모해 입선했다. 그 때부터 그는 공공연하게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무엇을”, “어떻게” 등의 수사를 늘어놓으며 구체적인 경로까지 말하는 식이었다. 가만히 듣는데 괜히 속이 뒤틀렸다. 걱정하는 척하며 그게 꿈이냐고 물었다.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직업작가가 몇이나 있는지 알아, 이름을 공표할만한 작가가 되기까지 드는 시간과 비용과 운의 총량을 따지면, 하고 아는 체를 했다. 
 

 괜히 속이 뒤틀렸던 건 ‘꿈’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였다. 우리의 꿈은 마땅히 생존의 궤도를 모색하는 차원이어야 하는데 그는 자기 꿈에 희망을 담보하며 마냥 긍정적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아무튼 속이 뒤틀렸던 거였다. 나는 위악적이게 됐다. 그에게 심술부리고 싶었다. 
 

 그는 웃었다. 그렇게 까지 생각해본 적 없다고 했다. 나는 단지 글 쓰는 게 좋아졌을 뿐이라고 했다. 할 때까지 하고 안 되면 말고 직업으로 정착하면 더 좋은 일이고. 
 

 나는 그걸 현실감각의 결여로 해석했다. 어차피 우리 모두 정해진 궤도를 걸어야 한다. 생존해야 한다. 나 하나쯤 책임지는 인간이 어른이고 꿈은 나를 책임지는데 방해로 작동하는 부산물이다. 생존과 꿈은 병존할 수 없다. 꿈에 대한 욕망은 그 궤도에서 일탈하는 행위다. 나는 그를 현실감각 없는 인간으로 규정했다. 
 

 가끔 그의 소식을 들었다. 매해 대학 문학상과 문예지에 응모하는데 떨어진다고 했다. 어쩌다 그가 쓴 소설의 양을 본 적 있다.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 노력들을 다 현실감각의 결여라고 해석하는 게 온당할까. 무엇보다 나는 이렇게 열렬한 적이 있었는지. 
 

 따지고 보면 나는 이런 식이었다. 타인을 함부로 평가했다. 타인이 결정한 삶의 경로를 내 주관대로 해석했다. 어떤 기준을 두고 타인의 선택이 거기 미달한다고 판단하면 속으로는 얕보는 것이었다. 
 

 그가 ‘서른 즈음에’를 부를 때. 자기 나름의 계획을 이야기 할 때. 내 잣대를 적용하여 해석했다. 잣대란 것도 각자의 주관에 따라 제각각인데 나는 내 잣대를 객관적인 것으로 여겼다. 지금보다 훨씬 철이 없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나는 요즘 이력서를 쓴다. 기업에게 팔릴만한 인간이 되기 위해 가공의 나를 만들어낸다. 기업이 원하는 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틀, 궤도가 있다고 여겼는데 진짜 거기 맞추려니 나를 부정하는 것 같다. 이상하다. 그가 생각난다. 스무 살에 서른 즈음에를 불러도 어색해하지 않는 그였다. 주어진 궤도대로 걸을 생각이 없었던 그가 작가의 꿈을 이뤘을지 궁금하다. 이뤘으면 좋겠다.

 

 

 

 

박진영의 서사

 

 

 

 중학생 때는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멋있었거든요. 선생과 학생의 관계엔 분명 위계가 있는데 시선과 위치가 다름에도 학생들과 어울리는 선생님의 모습이 멋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막연하게 교사란 꿈을 가진 듯해요. 
 

 교사가 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잖아요. 실은 무엇이 되거나 이룩하려면 당연히 노력이 수반돼야 하잖아요. 그때는 그걸 몰랐어요. 그냥 놀았어요. 남들 관심 받는 게 즐겁고 집단 중심에 서 있는 게 짜릿해서 그런 것들로 우월감을 느끼던 때였어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옅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되고 싶은 게 바뀌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먼데이키즈가 가수가 된 계기를 말하는 걸 들었어요. 얀의 <슬픈 동화>를 들었을 때 자기 마음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내 마음이 움직였던 것처럼 노래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싶었다, 마음에 미동을 일으키는 사람은 여럿인데 나는 그걸 노래로 하고 싶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슬픈동화>를 듣자마자 가수가 될 방법을 열심히 모색한 건 아니겠죠. 미약하게 품은 마음에 절차를 매기고 하나씩 실천해나가면서, 거기서 겪는 수많은 착오들이 가수의 꿈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을 거에요. 사람들은 벽에 가로막히면 다른 길을 둘러보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벽을 뚫겠다는 오기를 품으니까. 그때는 이런 것조차 인지하지 않은 때입니다. 아무튼 먼데이키즈가 작은 이유로 이 악물고 가수가 된데 충격 받았고 그러면서 저도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어요. 이해가세요? 따지고 보면 구체적인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거창한 꿈과 계기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엄청나게 성공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서 자기 성공과 꿈 사이의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혈안인데 꿈의 크기에 따라 성공이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명분을 부여하고 싶나 봐요. 내가 이만큼 성공한 걸 알리고 싶고 성공의 방식은 정당했다고 신화를 쓰고 싶은 건가. 그런 사람들은 자존심이 너무 세요. 아무튼.
 

 옥상에서 노래 연습을 많이 했어요. 온전히 내 힘으로 가수가 돼 자립하고 싶었습니다. 가족들이랑도 이 때 제일 많이 싸운 듯해요. 부모님 속도 엄청 썩이고. 그런 건 아무나 되는 줄 아냐. 근데 그런 말을 들으면 더 오기가 생겨요. 가수가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뿌리로 정착한 것도 이때에요. 
 

 연예기획사에 오디션을 보려 다녔어요.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오렌지 엔터테인먼트란 곳에서 연락이 와서 최종까지 갔습니다. 떨어졌어요. 그러면서 자신감을 잃었어요. 눈 돌리면 더 많은 기회가 분명 즐비하게 있었을 텐데. 계속 떨어지고 실패하고 뭔가 됐다고 생각한 곳도 떨어지니까 의욕도 같이 잃었던거에요. 그 뒤로 노래가 잘 안 불러지고 노래 연습도 안하게 되고.

 

 

울타리 내부에 있고 싶었는데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자퇴하여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 시간을 오롯이 음악에 투신했을까요. 고민의 결론은 일단 학교를 다니자는 거였습니다. 더 이상 엄마 속을 썩이고 싶지 않았어요.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의식만 있고 막상 하는 건 없고. 어디에도 화살을 겨냥할 수 없는 비관이나 분노, 불만은 쌓이는데 풀 곳은 없는 상태. 그 때 도와달라고 해야 했어요. 가족들에게든 어디에든 도와달라고 했으면 어떤 윤곽 같은 게 잡힐 수 있었을 거에요. 근데 하지 않았죠. 자존심은 알량하게 아직 남아있어서. 무엇이든 혼자 성취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때도 엄청 컸거든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의식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놀았어요. 무엇도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노래 부르는 것도. 
 

 후회하는 시기가 있다면 그 때에요. 그 때가 제일 무엇이든 하기 좋은 때였어요. 나한테 주어진 반경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그저 노래만 하면 됐던 때인데. 후회스러워요.
 

 후회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요. 있다고요? 아니 어떻게 후회를 안 할 수가 있지. 자기가 집행한 선택이 모두 올바르다고 느끼는 게 가능한가.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에 미련을 두지 않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건 자기 과오를 합리화하는 거 아니에요? 인정하기 싫다거나.
 

 남들처럼 대학은 가고 싶었어요. 모두 실용음악과에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지원하면서도 붙을까 자문했고 붙어도 문제였죠. 등록금이나 이후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래하고 싶은 꿈은 아직 여전해서 서울로 올라와 아르바이트 하며 노래연습을 계속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돈을 버는데 서글프더라고요. ‘이것 말고’의 경우가 계속 떠오르고, 대학이라든지 회사라든지 학교라든지 우리는 울타리 내부에서 어느 정도 보호 받고 내 주변은 다 그렇게 사는 거 같은데. 나만 거기서 괴리된 느낌이었어요. 지금이야 그런 생각 들지 않지만. 스무 살 무렵엔 그랬어요. 내가 나를 보호하고 있는 게 맞는지. 보호할 수 있는지. 어딘가에 편입되고 싶다고 느꼈어요.
 

 정신차려보니 스물셋 이었습니다. 다행히 군대는 다녀왔어요. 내 모습을 보는데 내가 10년 전 그렸던 미래와 너무 다른 거 에요. 발등에 불 떨어졌다는 말 있잖아요.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데 그냥 보고 있고, 살갗이 타서 검게 칠돼도 그저 보고 있고, 발등이 익고 다른 피부로 번지는데, 그 때 자각했어요. 이렇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 
 

 그 이후로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까지 왔네요. 둘째 형의 친구 분이 보컬 트레이너여서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가 생겼죠. 이제 내가 노력하면 돼요. 

 

 

‘정상’이란

 

 

 대학가고 취업하고 가정을 이루는 삶을 ‘일반적’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런 게 있다고 주입 받는다기보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거기 속하지 않으면 대열에서 이탈한 것 같은 체감이 들고 그래서 그렇게 사려고 혈안이겠죠. 과거에 나도 그랬지만, 요즘은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무엇다워야 한다는 감각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늘어나잖아요.
 

 출생률을 지표로 삼고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 2750년엔 인구가 0에 수렴할거다, 라고 하는데 신라시대 사람이 조선시대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는 게 지금 내 행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된 게 없어요. 그게 당연하니까. 그래야 하니까. 다 그런 거 에요. 그것도 개인의 삶을 어떤 틀에 가두려는 이데올로기 같아요. 그 틀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틀보다는 내 선택이 더 중요해요. 내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게 선행돼야 해요.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고 하는 것들은 부수적인 겁니다. 선택하고 안하고의 문제입니다.
 

 장벽이 낮아졌다고 느껴요. 경로가 다양해졌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우선 노래를 더 열심히 부르고 실력이 늘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보겠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문화 예술에 투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를 정비해 줬으면 좋겠어요. 지금 있는 제도들이 활성화됐다고 느끼지도 않고요. 이를테면 공간 같은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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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기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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