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 (일)

대학알리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

노동은 비싸야 한다 ➁

 

 

1. 참으면 조금만 더 참으면

 

 

 K가 직장을 그만뒀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K는 고등학생 때부터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용돈이 부족하다며 부모님 지갑을 뒤적거릴 나이일 때 K는 노동하고 돈을 벌며 자신을 돌봤다. 나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인데 그렇게 일하면 서글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부모에게 의지하는 게 당연한 나이인데, 나였으면 남의 사정과 비교하며 일하는 스스로 박탈감이 들었을 거라 말했다. K는 전혀 그런 적 없다고 했다. 적어도 K는 나보다 노동의 의미를 잘 알았다. 그에게 노동은 자립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는 일이었다. 단지 돈을 벌고 생계를 이어가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K는 노동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K는 은행에서 2년간 일했다. 특성화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한 곳이었다.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은행이었고 월급이 밀리거나 퇴근을 늦게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이른 나이부터 자립심을 키워 좋은 곳에 취업한 K를 부러워했다. 이제 K는 초조하게 비탈을 오르는 일보다 느긋한 마음으로 앞을 걸으면 될 거였다.

 

 오랜만에 K를 봤다. 직장을 그만뒀다는 K는 지쳐 보였다. 나는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왜’를 닦달했다. 대체 왜 그런 거냐.

 

 K는 8시까지 출근하여 개장 준비를 마치면 곧바로 창구 업무를 봤다. 별의별 인간을 다 봤다. 반말하는 손님은 차라리 약과였다. 서로가 얼마나 더 무례한지 경쟁하는 것 같았다. 최악의 하루라고 생각한 어제와 그보다 더한 내일이 이어졌다. 무례를 경험할 때마다 내가 어리고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참으면 승진하여 더 나은 처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는데, K는 문득 환멸이 났던 경험을 들려줬다.

 

 중년 고객을 상대할 때였다. 필수 지참할 서류를 갖추지 않아 요청하신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말하자 고객은 고함치고 반말하고 욕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너 같은 게. 그런 문장도 들었다. 밖에 나가 울고 들어왔는데 고객은 지점장과 대화하고 있었다. 지점장은 굽실거렸다. 알고 보니 그는 유력 국회의원의 보좌관이었다.

 

 회사는 그 이후 자사 직원인 K의 안위를 살피거나 고객 대응 메뉴얼을 강화하는 대신 ‘높은’ 고객의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그때 짜증과 분노가 퍽 났다고 했다. 더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자각하게 됐다고 했다.

 

 은행은 K가 다녔던 학교를 제외하고도 여러 특성화고와 연계돼 있었다. 해마다 직원이 바뀌었다. 업무가 힘들어 그만두는 인원이 많아서였다. 은행은 자사의 시스템을 개선하고 직원 복지를 증강하는 방법 대신 새로운 인원을 수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어차피 매해 지원자는 많고, 이력서는 쌓여 있어서 연계된 특성화고 졸업생 중 똘똘해 보이는 인원을 고르면 그만이었다. 그게 싸게 먹혔다. K는 자신이 그런 소모품의 인력으로 쓰인다는 현실에 환멸 난 거라고 말했다. 나는 겉으로는 그렇구나, 하며 위로의 시늉을 했지만, 그때까지도 K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취업하려고 혈안인 마당에 그래도 참으면 됐던 거 아니야? 참으면. 조금 더 참으면.

 

 

2.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쉬운 우리

 

 

 지난 10일 서울 강북구의 아파트 경비원이 자살했다. 아파트주민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과 폭행을 당한 전적이 확인됐다. 책 <임계장 이야기>를 통해 노인 노동의 열악한 처우를 환기했던 조정진 선생님은 내게 메일을 보내주셨다. 선생님과는 몇 번 메일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노동 문제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어 인터뷰 요청을 하면서였다. 그는 보도를 접하고 참을 수 없이 마음이 아렸다고 했다. 무력하다고도 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메일엔 죽은 경비 노동자의 유서가 첨부돼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 그러나 억울하다는 말. 결백을 밝혀달라는 말. 나는 그토록 삶이 눅진하게 달라붙은 언어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절박한 호소의 언어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유서를 쓰고 자살을 택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테다. 삶을 포기하기 이전에 부당함과 억울함을 호소한 일이 아주 많았을 테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고 목소리를 키우면 노력하지 않는 노동자로 취급돼 금방 해고되는 현실에서 그가 느꼈을 절망의 맥락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테다.

 

 <임계장 이야기>엔 부당함과 불합리한 시급 노동의 현장이 건조한 언어로 쓰여있다. 선생님은 탁송물품을 싣다가 다쳐 회사에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상사는 오히려 그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하며 해고한다. 버스회사에서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는 건 교통사고 하나뿐이고 회사에 책임을 묻는 게 도리어 무능함의 증명이라는 거다. 어차피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을 자처하는 노인이 태반이고 그들은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기에. 선생님은 시급노동에 종사하며 자신 같은 부류가 임계장과 고다자로 호명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삶을 포기한 아파트 경비 노동자 역시 임계장이며 고다자였다.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호소해도 들어주는 이 없었다. 아무도 자기 절박함을 알아주지 않았다. 다른 임계장으로 대체하면 그만인 시스템에서 개인의 온당한 권리와 인권은 뭉개졌다. 목소리 작은 사람을, 기계처럼 일만 하는 사람을 다음에 뽑으면 그만이다. 이력서는 쌓여 있다. 이를 용납할 수 없으면 아파트 주민이 돼야 하고 국회의원 보좌관이 돼야 한다.

 

 나는 K가 직장을 그만둔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청년이었지만 금방 소모되고 대체된다는 점에서 임계장이며 고다자였다. K의 지친 얼굴을 다시 되뇌어 본다. 거기엔 무력감과 절망감이 내포된 거였다. 아르바이트할 무렵 그는 노동하며 자기 존재를 확인했다고 말했지만, 그때까지는 노동의 이면을 몰랐던 셈이다. 노동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비싸야 한다는 것.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의 죽음은 단지 열악한 노인 노동 시스템을 환기하는 차원의 맥락이 아니다. 그 이상의 맥락이 있다. 경비원의 죽음은 이 사회의 불합리한 노동 구조 자체를 보여줬다. 노동자를 쉽게 소모하고 대체하며 죽음까지 내모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그 죽음에 있다. 선생님이 메일에서 쓰셨던 것처럼 그의 죽음은 엄연한 사회적 타살이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지켜보는 일이다. 시스템이 바뀌는지. 누가 이 죽음을 이용하는지. 정치는 이 불합리를 어떻게 해소하는지. 시민은 약자를 비롯한 다른 시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므로. 그게 시민의 역할이므로.

 

아래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메일 전문을 첨부한다.

 

 

 

 

3. <임계장 이야기>

 

 

 저는 "임계장이야기"의 저자 조정진입니다.

 

 오늘 밤늦게 퇴근하고 나서야 뉴스를 보고, 서울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 막아보려고, 제가 병상에서 모르핀 진통제를 맞아가며 책을 썼는데. 세상은 그 어떤 외침도 다 외면하고 마는 것일까요? 저의 책 77페이지에 쓴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오래된 아파트, 이중 삼중 주차, 폭언 폭행.

 

 억울해도 말할 곳이 없는 설움. 노조도 없고, 노동청이나 구청에 신고해도 아파트의 눈치를 먼저 살피고. 나이 60이 넘어 아파트 경비원 하는 노인이 살아보고자 아파트 경비를 했지, 이렇게 죽으려고 노동을 했겠습니까? 고령이 되면 세상을 살아온 연륜이 있어 충동적으로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억울하고 분해도, 말할 곳도 없고, 들어주는 이도 없어 그냥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착한 분이었다고 해요. 법 없이도 살 분이었다고 주위 동료들이 말하네요.

 

 아, 돌아가신 분이 남긴 유서가 보도되었습니다. 유서에 쓰인 몇 자 안 되는 글씨에 눈물이 계속 납니다.

 

 제가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한 첫날, 아파트 경비원 한 분이 투신하였는데, 또다시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의 동료였던 60~70대의 아파트 경비원들께서, 자기들은 글이 부족해 쓰지 못하니, ​그분들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가 대신 책으로 써 달라고 저를 격려하였습니다. 그 격려에 힘입어 임계장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 곳에 하소연할 곳이 없어 제가 임계장 이야기를 통해 아파트 경비원의 외침을 세상에 전했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제 책은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아무 소용도 닿지 않고, 세상이 들어주지도 않을 일을 해서 동료들에게 죄송하고, 저 자신의 무기력에 한없이 괴롭습니다. ​제깐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한 일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너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제가 아파트에 근무할 때 만났던 대다수 주민은, 선량하고 상식(常識)을 가진 시민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실상을 아직 몰라서 그렇지, 현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아파트 경비원들의 노동여건이 나아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책이 나온 이후에, 이런 일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제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할 때 갑질을 가장 심하게 했던 김갑두에 대해 책에 썼습니다. 강북구 아파트에서 늙은 경비를 구타한 주민은 그 김갑두 보다 훨씬 더 악한 사람입니다.​저는 김갑두가 무릎 꿇고 빌라고 할 때, 그때,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삶의 의지란 그런 상황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때, 저는 저의 노동이, 경비원이라는 직업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하려니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탈고에서 출판에 이르기까지 1년 넘게 걸렸던 이유가 그 망설임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제 가족이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 분명히 아파할 것 같아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이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훨씬 적은 제가, ​이 세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이것이라 생각하여 책을 냈습니다. 제가 진솔하게 사정을 알리면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개선이라도 분명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무기력함을 절감합니다. 노인 노동자가 아프면 무조건 “노환”이라 하더군요. 그리고 바로 해고합니다. 일하다 부상을 입어도 마찬가지로 노환이라 합니다. 그러면 서울에서 생을 마감하신 이 경비원의 죽음도 노환인가요? 아닙니다.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모두 임계장들입니다. 임시계약직 노인장들.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너무 쉬워서 “고다자”라는 준말로 불리는 아파트 경비원, 그리고 청소원, 주차관리원들. 그리고 이천 물류창고에서 안전관리자도 없이 철골 구조물에 갇혀 불길을 피하지 못한 노동자들. 이들이 바로 고다자입니다.

 

 그러나 그분들 모두 우리 이웃입니다. 내 친구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내왕이 뜸한 내 친척 중의 한 명일 수도 있어요. 노인 근로자가 450만 명입니다.

 

 노인 노동자의 문제는, 노인이라 불리는 고령자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노인 노동 문제는 청년 비정규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청년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노인이 되어 일하고자 원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청년들이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급노동자로 일했던 다섯 곳의 일터에서 만난 경비원 동료들은 자기 자녀들을 비정규직 안 시키려고, 그런 이유 하나로 일터로 나오는 분이 아주 많았습니다. 자기 자식을 비정규직 시키지 않으려고 늙은 아비가 비정규직이 된 것이지요.

 

 문과대학 졸업자의 10%만이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는 현실에서, 내 새끼는 비정규직 안 시키려고. 그래서 내 자녀가 정규직 취업할 때까지, 공무원 시험 합격할 때까지. 기약 없는 세월을 매연, 배기가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오늘도 일하는 노인 노동자들입니다. 자신의 자녀를 비정규직 시키지 않겠다는 부모의 소망을 이기심이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부모 된 이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므로.

 

 제가 고층빌딩에서, 또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일할 때, 그 빌딩과 터미널을 움직이는 인력의 80%가 비정규직 청년들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저를 경비아저씨라고 친근하게 여겨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청년들의 현실과 청년들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난 이 청년 분들도 이 “고다자” 인력, 고르기도, 다루기도, 자르기도 쉬운 인력이었습니다.​ 헐값에 젊음이 팔리고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 일터로 나와 일과 공부를 함께하는 자랑스러운 청년들이었습니다. 그 청년과 노인이 "고다자" 라는 어이없는 동의어로 묶여 있었습니다.

 

 “노동에서 나오는 결과물들의 가치”는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동 자체의 가치”는 모두가 다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동이 신성한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아파트 경비원으로서 일하며, 그 동료들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책으로 썼던 제가 이제 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이번 아파트 경비원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외면하지 말고 그가 왜 죽음을 선택하였는지 살피고 헤아려 주십시오. 세상은 예전처럼 찰나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다시 언젠가 억울한 죽음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음에 대해 무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노동, 고용, 복지, 안전을 담당하는 정부부처가, 수사를 담당하는 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주십시오. ​그리고 이 사회의 건강한 시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에도 이것을 그 흔한 갑질 중 하나라고, 그냥 노인 경비원 하나 죽은 일이라고,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됩니다. 분명한 사회적 타살입니다. 그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개선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초등학생처럼 삐뚤빼뚤한 글씨로 남겨진 피맺힌 유서, 서너 줄 밖에 안되는 마지막 외침을 들어주십시오.

 저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이런 일을 막아보고자 혼신을 다해 노력해 보았지만, 너무도 무기력한 노인의 한 사람이라는 슬픔이 밀려옵니다. 혼자서 엉엉 울다가 문득 이렇게라도 호소하는 것이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는 지금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빈소에 조문도 갈 수 없습니다. 하루를 쉬려면 대체근무자를 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돌아가신 경비원의 심정만은 제가 알 수 있습니다. 그분도 살기 위해 노동을 한 것이지 그렇게 죽으려고 노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호소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5.11. 02:00

임계장 조 정 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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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기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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