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대학생이라는 이름의 ‘상징’
인터넷 커뮤니티나 내가 다니는 학교의 사이버 커뮤니케이션 공간인 ‘에브리타임’에는 이른바 ‘유사 대학생’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너는 대학생 축에도 끼지 못하는 ‘지방대생’이니까 우리 ‘대학생’ 보다는 결여되어 있는 존재인 ‘유사 대학생’이 어울린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보통 명문대 내지 서울권에 속해있는 ‘대학생’들은 학교의 이름이 가지는 ‘상징’이 그 대학생들의 능력과 역량을 보장해준다. 그러니까, 굳이 구차하게 부연설명을 하나하나 달면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아도 진중한 학문적 관심이라든가, 그사람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라든가, 열심히 살아온 과거라든가, 혹은 열정적인 삶의 ‘개척자’라든가 하는 올바른 청년모델의 담지자로서, 진정한 ‘대학생’으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유사 대학생’들은 본질적으로 부족한 존재로서 묘사된다. 그들은 학교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상징’이 전자와는 정반대로 기능하는데, 보통 그들은 능력과 역량이 부족한 존재, 너무나 게으르고 학문적 관심이 없는 존재, 꿈과 희망이 수동적이고 지적 역량이 부족한 존재로 사회 속에서 현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사 대학생들’은 ‘대학생’들과는 달리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위해 열심히 자신을 변호한다. 보통은 자신이 속한 대학교의 이름을 숨기려 “00권 대학에 다닙니다.”라든지, “저 그냥 국립대학교 다닙니다.”라든지, “00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라든지, “이런 이런 대외활동도 하고 있고, 세미나도 다니고 있고, 자격증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언어들로 말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 사회적 공간에서는 사람들은 더이상 지방대생의 서사를 먼저 궁금해 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이미 그들의 ‘학력’이 그들이 가진 능력들의 대부분을, 아니 전부를 말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치해 보이는 이 말장난 속에는 사실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입 아프게 말해오는 ‘명문대와 지방대의 이분법’말이다. 나는 대학생일까? 아니면 ‘유사 대학생’일까?
지방대생들이여 ‘이 지옥같은 공간에서 생존하라’ : 우리들의 생존가이드
지방대생들이, 아니, ‘유사 대학생’들이 ‘자유로운’ 한국 사회에서 생존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자신을 최대한 숨겨라!’라는 명령 아래 자신의 대부분의 행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지방 국립대에서 혹은 지방대에서 생존하는 친구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과 드러내지 않는 순간을 분명히 구분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은 학력이라는 ‘문화자본’과 연결되지 않거나, 혹은 그런 것들과 연결되어 내 학력이 노출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이루어진다.
사실 지방대생들의 생존공식은 ‘생활세계’에서 더 폭력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명절, 추석 등 친척들이 한 공간에 모여 서로가 지닌 ‘상징’들을 공유하고 ‘자랑’할때 지방대생들이 지닌 ‘상징’은 ‘결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해보자면, 가족들이 의례적으로 모여서 상호간의 인사가 끝나면 본격적인 ‘상징 교환’이 발생하는데, 대부분 이런 패턴이다. “00이는 대학 어디갔어?”, “00이는 철이 없네, 편입할꺼지?”, “00이 열심히 하라고 용돈 주는거야.”, “우리 00이는 열심히 해서 상위권 대학 갔는데, 공부좀 시키지 00엄마.”
친밀성의 공간, 사회생활과 억압적인 사회적 언어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하는 가족들과의 공간마저도 학벌의 문법은 금새 비집고 들어와 서열화시키고 위계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 가족은 ‘정상 가족’에서 ‘결함이 있는’, 조금은 부족한 구성원을 가진 ‘이상 가족’으로 위치지어진다. 부서지고 깨진 나의 자아와 균열난 그 공간에 비집고 들어오는 ‘결함의 낙인’은 이러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나를 감추고, 비가시화하고, 계속해서 물리적으로 이탈하려고 하는 지방대생들의 생존공식 내지 생존본능을 추동시킨다. 나는 묻는다. “엄마, 우리 언제 집가?”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기다려지는 가족행사가 우리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이 폭력적으로 각인되는 ‘정상 대학생에서의 추방’과 ‘주변부로의 배제의 공간’인 것이다.
하나의 증언을 추가하자면, 예전에 내 친구와 미용사가 나눴던 대화중에 유사 대학생의 고질적인 방어기제가 상징적으로 노출되었던 사건을 언급하고 싶다. 미용사가 친구에게 대학생이냐고 물어보고,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간 후 친구에게 학교 이름을 물어봤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는 무엇이라 대답했을까? “아, 저는 그냥 지방 국립대 다녀요.”라고 친구가 대답한 이후에 미용사는 ‘짓궂게도’ “아, 부산대? 전남대? 공부 좀 했나 보네.”라는 말과 함께 우리보다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지방 거점 국립대’의 상징을 덮어씌웠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웃으며 상황을 모면했다.
한국 사회의 대학 서열화가 치명적이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명문대와 지방대의 담론 구조 안에는 ‘국립대와 사립대’, ‘지방 거점 국립대와 지방 사립대’, ‘4년제와 전문대’ 등 아주 촘촘하고 섬세한 계층구조가 존재한다. 그니까, 같은 지방 국립대라도 다 같은 지방 국립대가 아니고 ‘우리는 지방‘거점’국립대인데, 너네 같은 일반 지방 국립대가 우리와 같은 학력 자본의 경계에 침범하려 하느냐’는 의식, ‘우리가 아무리 지방 사립대라도 지방 전문대보다는 낫다.’는 그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계층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주눅 들지 않았다! 왜냐고? 이런 건 일상적이니까. 사실 말의 형태만 바뀔 뿐 본질은 비슷한 지방대 배제의 담론은 일상에서 재생산된다. 예전에 내가 만났었던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 들었던 그 한 마디는 한국 사회의 지방대생이라는 정체성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카페에서 여자친구가 부모님에게 나의 존재를 알렸을 때, 동시에 내 학력이 부모님에게 소개되었다. 그때 여자친구에게 여자친구 부모님이 하신 말씀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유령’이 유령이 아니라 ‘실재’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너무나 강렬했던 그 한마디. “그런 근본 없는 놈을 왜 만나니 너는?”
자기규율, 인정-불인정의 경계, 그리고 ‘삶의 가치를 박탈당한 존재들’
다시 되돌아가자면, 이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닥치고 일상화되면 나름의 행동규칙 내지 자아의식이 생긴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첫째, ‘나를 최대한 숨기자. 나를 보여주는 건 학력과는 상관없는 상황일 때 만이다.’, 둘째, ‘나는 ‘서울권 대학생’이 되기에는 부족하고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유사 대학생’에 만족하자.’, 셋째, ‘내 학력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적당히’ 먹고 살 길을 찾자.’ 이러한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대부분의 행동들이 조직된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 대학생들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삶의 주권은 이미 반쯤은 사회적 시선에 양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내가 책방에 앉아 계속 읽기만 하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지방 국립대’는 갔다고, 효도한다고, 자랑스럽다고 좋아하셨다. 그런데, 나는 한동안 부모님의 자랑과 사회적 시선의 경계에 걸쳐 있다가 결국 유사 대학생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는 부모님의 따듯한 시야를 떨쳐버리고 위계에 순응하며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인정과 사회적 불인정 사이의 ‘인정투쟁’ 속에서 나는 ‘비 승인된’ 대학생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유사 대학생’들은 못난이 사과와 비슷하다. 내가 예전에 친구들에게 들었던 말이 이를 완벽하게 증언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야! 우리 4명이 다 합쳐야 00대학에 비빌수 있을 걸?” 시장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못난이 사과.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는’ 그 못난이 사과는 여러개를 묶어서 ‘보통’사과보다 값싼 가격에 팔린다. 그리고 우린 보통 그 못난이 사과가 얼마나 당도가 높은지, 어쩌다가 그렇게 하자가 생겼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고 의심도 하지 않고 그 사과는 일반 사과보다 ‘못나 보이기에’ 열등한 것으로 취급된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학벌이라는 ‘하자’를 가지고 그들 각각의 변주하는 배경과 서사 그리고 내용은 제거 된 채 값싸게 묶여서 팔려나가는 못난이 사과같은 존재.
‘대학생’을 넘어 ‘우리’로 : ‘삶의 인정’을 위한 저항적 실천을 향하여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나는 ‘유사 대학생’인가 ‘대학생’인가? 학벌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논리적으로 논파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의 불합리성과 대학교육제도의 개혁 방안을 정책적으로 논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아니, 우리의 서사가 ‘폭력의 증언’으로 들리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렇게 들린다면, 이 ‘일상성’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언젠가 우리들은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저항의 방식이 그저 ‘유사 대학생-대학생’의 이분법적 구조를 융화시켜 ‘유사 대학생’을 ‘대학생’의 상징에 편입하는 것이라면 ‘상징폭력'의 본질을 파고들지 못한다. 이는 ‘대학생-비 대학생’이라는 또다른 위계적 정체성으로 고정되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저항적 실천’은 ‘삶의 인정’이지 ‘대학생’이라는 ‘상징자본’을 획득하고자 하는 문화적 투쟁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학생’이 되기 위한 거부와 저항은 단순히 ‘학력 헤게모니’를 둘러싼 갈등과 경합 그 이상의 무엇, 즉 우리들의 삶과 정체성을 학력보다 우선시하고 우리들의 서사를 정면에 드러내는 것, 학력이라는 폭력적 경계로는 규정지을 수 없는 나의 가치와 다양성, 가능성을 끊임없이 전면에 가시화하는 것이다.
“파레시아는 위험에 맞서는 용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파레시아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파레시아는 언제나 ‘아래’로부터 생겨나 ‘위’로 향합니다.”
<담론과 진실 : 파레시아> 미셸 푸코 저.
결국, 미셸 푸코가 지적했 듯 우리들의 삶의 서사가 지닌 상처를 적극적으로 사회에 드러내고 그것을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 사회적 모순들이 재생산되는 구조에 우리들의 서사를 기입하고 계속해서 증언하는 것을 통해 우리를 ‘공적 공간’에 드러내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다. 억압되지 않고 수면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우리들의 ‘진실’은 ‘발화될 때’ 즉 ‘말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의 삶의 형식을, 서사를 진정으로 대변할 때, 변화의 가능성, 저항의 가능성은 그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삶의 저항적인 형식이 확장되어 나갈 때 지방대생들의 새로운 ‘사회적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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