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대학알리

한국외국어대학교

[외-피니언] 흘러가는 대로, 스위스

* [외-피니언]은 ‘외대’와 ‘오피니언’의 합성어로, 외대알리 기자들의 오피니언 코너입니다. 학생 사회를 넘어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솔직하고 당돌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여행 많이 다녀야 해, 나중에는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인턴 3개월 차였던 지난 11월 차장 선배의 한마디.

 

이렇다 할 해외여행 경험이 없었기에 선배의 말이 더 깊이 박혔던 걸까. 다음 날 아침 출근 버스에서 항공권을 예매했다. ‘냅다’라는 단어가 이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일 듯하다. 그리고 인턴이 끝난 2월, 곧장 스위스로 8일간 여행을 떠났다.

 

‘처음 가는 유럽인데 한 곳만 가면 아쉽지 않나?’ 생각이 들어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루트도 고민했지만, 인턴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서 그런지 외국에서까지 시간에 쫓기며 여행하긴 싫었다. 그래서 스위스에만 머무르며 여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고즈넉한 구시가지, 베른


장장 22시간에 걸쳐 도착한 취리히 공항. 숙소가 있는 그린델발트로 가기 전 수도 베른을 먼저 찾았다. 스위스의 옛 정경이 온전히 남아 있는 베른 구시가지.

 

<베른 구시가지. 베른=박정준 기자>

 

베른은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13세기에 지어진 치트글로게 시계탑, 470여년에 걸쳐 올린 대성당 등을 포함한 옛 건물과 거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베른 대성당. 베른=박정준 기자>

 

고요한 구시가지를 천천히 걸으며 다리 건너 있는 곰 공원과 장미 공원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장미는 물론 베른의 상징인 곰을 볼 순 없었지만, 장미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중턱에서 걸어왔던 구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장미공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베른. 베른=박정준 기자>


아이거산과 함께한 동화 같은 마을, 그린델발트


2시간 남짓 베른을 돌아본 뒤 그린델발트에 도착해 스위스 전통가옥 샬레에 짐을 풀었다. 숙소 테라스 문을 열면 보이는 아이거산 북벽.

 

<숙소에서 바라본 아이거산 북벽. 그린델발트=박정준 기자>

 

이 경치 하나만 보고 숙소를 예약했다. 여행의 모든 아침과 밤을 이 풍경과 함께할 수 있다니, 숙소에만 있어도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교통의 중심인 인터라켄에서 약 40분 정도 떨어져 있어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와 노을이 지는 마을을 바라보면 그 40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숙소에서 바라본 마을과 노을이 지는 하늘. 그린델발트=박정준 기자>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해 지는 하늘이 우리를 환영하듯 아름답게 물들었다. 밖으로 나가 노란빛에서 주황빛으로, 주황빛에서 분홍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해에 물든 분홍빛 노을과 그림 같은 구름에 빠져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눈비가 내리기 전날이라 볼 수 있었던 노을. 다음 날 아침부터 쏟아진 눈비로 여행 2일 차에는 숙소에 머물러야 했지만, 노을을 곱씹으니 아쉬움은 사그라들었다. 아쉽게도 이 하늘은 여행 마지막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마주한 마터호른


눈이 내린 다음 날부터 날이 풀린다는 예보에 곧장 마터호른 일정을 소화했다. 해가 뜨기 전 숙소를 나섰는데 웬걸, 예보와는 달리 그린델발트역에서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이다. 일출 전이라 마터호른을 보여주는 실시간 웹캠도 소용없었다. 체르마트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최종 도착지인 고르너그라트로 올라가는 중에도 여전히 짙게 깔린 안개에 초조함만 커졌다.

 

<안개가 짙게 낀 체르마트 마을. 체르마트=박정준 기자>

 

그러던 와중, 열차가 안개를 뚫고 올라간 순간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우뚝 선 마터호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악열차에서 본 마터호른. 체르마트=박정준 기자>

 

‘와’라는 감탄만 연신 터지는 장관. 함께 열차에 탄 여행객들의 외마디 탄성도 연달아 들렸다. 열차에서 내려 전망대에 올라 제대로 마주한 마터호른은 웅장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절경이었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바라본 마터호른. 체르마트=박정준 기자>

 

내려가는 길에도 홀린 듯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매혹적인 봉우리, 마터호른은 왕복 8시간의 가치가 충분한 곳이었다.


설산에서 즐기는 액티비티, 피르스트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를 오가며 8시간을 열차만 탔고, 루체른 리기산까지는 유람선과 열차를 번갈아 타며 이동하는 데만 왕복 9시간을 쏟다 보니 피곤함이 쌓여갔다. 오랜 이동으로 무료함이 커지던 여행 6일 차. 색다른 체험이 필요했던 우린 왕복 6시간이 걸리는 취리히에 가기로 한 원래 계획을 바꿔 액티비티의 성지, ‘하늘 아래 첫 마을’ 피르스트(First)로 향했다.

 

먼저 ‘클리프 워크’에 들러 암벽을 따라 설치된 철길을 걸으며 해발 2,168m에 위치한 전망대에 들렀다.

 

<피르스트 클리프워크. 그린델발트 피르스트=박정준 기자>

 

<피르스트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프스 봉우리들. 그린델발트 피르스트=박정준 기자>

 

클리프 워크를 끝낸 뒤 오픈 시간에 맞춰 ‘플라이어’와 ‘글라이더’를 체험했다. 플라이어는 피르스트에서 출발해 바로 전역인 슈렉펠트까지 내려가는 액티비티로, 피르스트를 둘러싼 알프스산맥을 볼 수 있다.

 

<플라이어 출발을 기다리며. 그린델발트 피르스트=박정준 기자>

 

<플라이어를 타고 내려다본 설산과 눈밭. 그린델발트 피르스트=박정준 기자>

 

글라이더는 4명이 몸을 완전히 엎드린 상태로 슈렉펠트에서 출발해 피르스트까지 뒤로 올라간 뒤 다시 내려오는 방식이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볼 수 없는 채 뒤로 올라갈 때 느껴지는 긴장감은 자이로드롭의 그것과 같았다. 와이어 하나에 의지한 채 맨몸으로 바람을 맞는 스릴은 곤돌라나 케이블카를 타고 높이 올라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이 두 액티비티만으로도 일주일간 쌓인 피로를 한 번에 씻어낼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스위스를 여행하며 돌아본 마터호른, 융프라우 같은 대표적인 여행지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계획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찾아오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이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 속에서 느끼는 뜻밖의 평화로움, 이 모순에서 나는 이번 여행의 의미를 찾았다.

 

‘변수’ 자체를 기피하는 나로선 변수투성이인 스위스의 겨울이 짜증 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안개가 껴 있어 해가 나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눈비가 내리기도 했다. 마터호른을 보러 가는 날에는 열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40분 연착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융프라우에 갔을 땐 눈이 무릎까지 쌓여 1시간가량 제설을 기다린 후에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역별 웹캠, 날씨 예보, 열차 시간표를 아무리 꼼꼼히 살펴도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는 스위스였다. 한국에서라면 예상치 못할 일들까지 모두 대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나였지만 초행길 스위스에서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래서 변수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여행 며칠 차에 어디를 가고, 몇 시 몇 분 열차를 타고, 몇 시에 관광을 마친 뒤 밥을 먹고, 몇 시에 숙소로 돌아와야 한다는 시간표를 유연함 없이 지키려 애쓰다 보면 여행은 더 힘들어지기 마련이더라.

 

‘흘러가는 대로’. 열차가 연착할 때는 주변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새로운 풍경을 맛보면 된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와 숙소에서 요리를 해먹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이동 시간이 길면 창밖으로 스치는 경치를 눈에 담으며 스위스를 더 깊이 느끼면 될 일이다.

 

<열차를 타고 가며 찍은 풍경. 인터라켄=박정준 기자>

 

<유람선 연착 덕에 볼 수 있었던 베기스 마을. 베기스=박정준 기자>

 

<유람선 연착으로 돌아본 베기스 앞 호수. 베기스=박정준 기자>

 

생각을 바꿔보자. 첫날 마주한 하늘처럼, 다음날 내릴 눈이 아름다움을 선물하기도 한다면 오히려 감사할 스위스의 변수다.

 

무엇보다,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스위스에 있다는 자체가 제일 의미 있는 것 아니겠는가. 눈이 오든 안개가 짙든 열차를 타지 못하든 간에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 평범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를 느낄 수 있다는 걸 떠올리면 날씨 같은 변수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테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스위스, 스위스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박정준 기자 (wjdwns35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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