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피어나고 거리에는 연분홍 벚꽃잎이 번졌다. 산방산 앞 노란 유채꽃이 화룡점정을 찍은 아름다운 계절, 4월. 제주에 봄이 찾아왔다.
제주도민들은 꽃내음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도민들에게는 아픔의 4월이기도 하다. 그 마음을 대변하듯 형형색색 꽃들 사이 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이 있다. 동백꽃이다. 동백꽃은 4·3의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 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4·3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꽃이다.
꽃 이름에 겨울 동(冬)자가 들어 있듯이 동백은 추운 겨울에 핀다. 강렬한 붉은 꽃잎과 추운 겨울에도 꿋꿋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모습은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하지만, 꽃이 질 때는 꽃잎이 떨어지지 않고 통꽃으로 땅에 툭 떨어진다. 76년 전 제주도에서 스러져 간 안타까운 생명들의 허무함과 일맥상통한다.
천혜의 자연, 그 아름다움 뒤에 가려진 아픈 이야기, 못다 한 말들을 대신하여 전한다.
4·3의 발단 : 3·1절 발포사건과 민관총파업
일장기가 사라진 자리에 태극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던 시기, 제주도에는 귀향민들이 대거 증가하여 생필품이 부족했다.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 군정하에서 다시 민정 경찰 역할을 맡으며 도민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도민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새 시대를 꿈꾸며 집회를 열었다. 문제없이 집회가 끝나갈 때쯤, 경찰이 타고 가던 말에 한 어린아이가 치였다. 일부 사람들은 돌을 던지는 등 거세게 항의했으나, 경찰은 이를 무시하고 경찰에 대한 습격으로 판단해 민간인에게 총을 쐈다.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남조선로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중심으로 3·1절 발포 사건 대책 투쟁 위원회가 결성됐고, 이들 주도로 3월 10일 3·1절 발포 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에 돌입했다.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가 파업에 동참했다. 심지어는 제주도 출신의 일부 경찰도 참여했다. 이 총파업은 발포 사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요구한 순수 민중 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군정은 요구를 수용하기는커녕 제주도민 모두를 좌파로 몰았다. 당시 미군 보고서에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파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 분자의 거점이라고 기록했다. 파업에 참여한 경찰들을 해임했고, 그 자리를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사람들로 충원하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1947년 도지사로 부임한 우파 인사 유해진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 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 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발언하며 탄압 정책에 매진했다. 육지에서 온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은 테러 활동을 수없이 자행했고, 총파업 참여자들을 잡아 고문하기 일쑤였다. “빨갱이(좌파)”라는 지목은 순전히 탄압 주체의 자의적 독단에 의한 것이었다.
4·3의 전개 : 무장반란과 선거 보이콧
1948년 4월 3일, 탄압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자 남로당 제주도당 중심으로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한다. 약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경찰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단체들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총칼 없이 농기구와 몽둥이만으로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진압됐다.
5·10 총선거가 한 달여 남은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무장 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 폭동으로 규정하고 응원 경찰들의 수를 증원했다. 오후 8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고 경비대를 구성해 순찰을 돌았다. 무장대는 군경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생활을 시작했다.
무장대와 군경 간 평화 협상이 있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던 회담은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발하며 결국 결렬됐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우익 청년단체가 오라리(현 오라동)를 불바다로 만든 사건이다. 그들은 군경들이 마을 사람들을 제대로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들었다. 이 사건은 미군이 공중과 지상에서 입체 촬영한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기록 영화에 생생히 수록돼 있다. 단지 우익 청년단체의 우발적 범행이라면 입체 촬영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배후에는 미군이 있었다. 만일 이때 평화 협상이 진전됐다면, 동족상잔은 여기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5·10 총선거가 진행됐다. 무장대는 도민들을 산속으로 숨기며 선거에 보이콧했다. 결국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며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됐다.
선거 이후 군경과 무장대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미군은 ‘중산간 지역 고립 및 검거 작전’을 벌였고, 그해 10월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해 “해안선으로부터 5km 바깥에 있는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허가 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11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동족상잔의 비극
군경토벌대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했다. 가족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고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즉시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식구를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처형 대상 명단을 들고 마을을 찾아가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가족을 불러내 대신 죽였다. 게다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 연습’이라며 마구잡이로 골라 총을 쐈다.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은 노인, 어린이 심지어는 갓난아기까지 남녀노소 불문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해 모조리 죽여버렸다. 한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학교 운동장으로 주민들을 집합시켜 몰살하기까지 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이 제주도민들과 연관성이 있다며 한국전쟁 중에도 ‘빨갱이 처단’이라는 핑계로 제주도민 학살은 계속됐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됐고, 극악무도한 학살 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됐다.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주도민의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고 추정되고 있다.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 희생자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늘날 제주도에서는 촌락별로 제사가 비슷한 시기에 치러진다.
수로만 따져도 인구가 적은 도서 지역에서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도에 인구학적인 영향을 줄 정도였다.
4월에는 가슴에 동백꽃을 달아주세요
제주 4·3은 4월 3일 전후가 중심이 된 사건이 아니다. 4·3이라는 명명에는 정부가 이 민간인 학살의 원인을 4월 3일 무장대의 봉기에 귀인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제주 4·3 에서 중대하게 다뤄져야 할 것은 1948년 11월부터 실시된 이승만 정부의 ‘초토화작전’이다.
아직도 제주도 어르신들은 그날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초토화작전’에 대한 말을 일절 하지 않으신다.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공론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여기에 더해서, 광복 이후 대한민국 첫 정부의 치부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기에 ‘초토화 작전’은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자세히 기술돼 있지 않다. 그래서 아직도 제주 4·3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응어리진 고통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진상 규명을 위해 손자 손녀 세대인 우리 세대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현재 오라동 거주 중인 진경식 씨는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전부 불타버린 터전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슬픔을 참고 학교를 세웠고, 과수를 심었다. 그 학교에서 내가 배우고 자랐으며, 나무에 열린 과일을 먹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것에 보답할 때”라고 말하며 제주 4·3의 진상 규명을 강력히 요구했다.
제주 4·3 희생자 유가족 양수민 씨는 “제주 4·3은 유가족을 비롯한 제주도민들에게 여전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노력이 있지만, 지금까지도 제주 4·3을 왜곡하는 일부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라고 말하며 “제주를 넘어 전국민적 관심 속에서 4·3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제주 4·3 평화재단 공식 대학생 서포터즈 김지완 씨는 “제주 청년들은 제주 4·3을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며, “제주 4·3 희생자들의 얼을 기리며, 전국적인 유대감 형성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는 것이 내 몫이다.”라며 동백 서포터즈 활동의 목표를 밝혔다.
이 땅 위의 붉은색은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와 2017년 광화문 광장의 붉은 촛불뿐만이 아니다. 극악무도한 학살터가 다시 아름다운 섬으로 바뀌는 오랜 시간 동안 땅으로 스러진 동백꽃도 붉은색이다.
제주 4·3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에 가려진 또 하나의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오늘 열리는 제76주년 4·3 희생자 추념식 슬로건은 ‘불어라 4·3의 봄바람, 날아라 평화의 씨’다. 부디 슬로건처럼 제주 4·3 추념 물결이 바다 건너 육지까지 닿기를 바란다.
마음이 아리다. 짧은 인생 여러 문장 엮어보았지만 그들의 삶에 작은 쉼표 하나 없기에 마침표를 찍는 내 마음이 참 무겁다.
김태훈 기자(dhfkehd438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