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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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허락한 비판? 독재 정권의 흔적 ‘대자보 허가제’

대자보 철거 대학 재학생들, “기본권 침해” 주장
비판과 저항의 상징인 대자보
독재 정권이 남긴 흔적, 대자보 허가제

“일종의 검열 아닌가요?”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2학년 정 씨가 물었다. 정 씨의 학교는 작년 12월 캠퍼스 내 설치된 윤석열 규탄 대자보를 부착 하루 만에 철거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대자보 철거에 이은 두 번째 대자보 철거였다. 두 대자보는 모두 ‘사전에 승인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철거됐다. 당시 청강대는 학칙에 근거해 인쇄물을 부착하거나 집회를 열기 전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1,022명의 재학생이 학칙 폐지 서명운동을 벌여 학교 측에 전달했고, 학교는 검토 중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정 씨는 해당 학칙에 대해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허가제로 만드는 것은 기본권 침해에 가깝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대자보는 ‘큰 글씨로 적은 종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빠르게 쓰고 읽을 수 있다는 장점 덕에 오래전부터 ‘비판과 저항’의 상징으로 쓰였다. 우리나라 대학가에 대자보가 퍼지게 된 배경에는 1980년대 신군부가 있다. 당시 언론은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고, 출판물은 검열을 거쳐야 했다. 학생들에게는 자유가 보장되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민주화를 주장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했다. 그렇게 대자보는 대학 캠퍼스를 뒤덮었다.

대자보 열풍은 독재 시대가 끝나며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러나 2013년 12월,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붙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다시 사회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자보에는 밀양 주민 음독자살, 국정원 대선 개입, 쌍용자동차 노조 등 당시의 사회 이슈를 나열하며 ‘이런 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고 묻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해당 대자보는 타 대학 캠퍼스와 정치계, 연예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한국 사회가 출렁일 때마다 대학가에는 ‘안녕들 하십니까?’의 뒤를 잇는 대자보들이 등장했다. 이름 대신 ‘김치녀’로 불리던 당시의 여성들, 학사 비리에 분노한 대학생들, 부패한 정권을 끌어내리려는 시민들 사이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가 오갔다. 이처럼 대자보는 보통의 시민들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알릴 수 있는 매체였다.

 

수단이 된 대자보 허가제

 

대자보 허가제로 논란이 됐던 일부 학교는 “쾌적한 학습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해당 제도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외부 업체의 상업 홍보물 등을 막기 위해 허가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자보 허가제의 이유라는 ‘쾌적한 학습환경’은 학생들의 의견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동덕여자대학교 인문대학에 재학 중인 23학번 이 씨와 친구들이 붙인 대자보는 교직원들에 의해 철거됐다. 학생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공학 전환에 반대하고, 학교의 사학 비리 조사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였다. 교직원들은 “총장님이 교내 미화를 위해 떼라고 하셨다”는 설명과 함께 학생들의 대자보를 찢어 바닥에 던졌다.

 

이 씨는 “나중엔 그런 설명도 없이 대자보를 붙여놓을 때마다 교직원들이 우르르 나와 게시물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대자보를 무단으로 철거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씨는 “대자보를 붙여 의견을 표출하는 건 적법하고 평화로운 방식”이라며 “교내 지정된 게시판에 붙인 대자보까지 철거하는 것은 학생들을 억압하는 행위”라 비판했다.

 

독재의 흔적인 대자보 허가제


헌법 제21조 2항의 ‘언론ㆍ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ㆍ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1975년, 이 조항을 어기는 규정이 탄생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학도호국단’이라는 학생 자치 기구의 규정이었다. 향토방위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 기구는 △10명 이상의 집회 △교내외 광고·인쇄물 배부 △외부 인사 초청 등 학생 활동 전반에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다. 학도호국단은 사라졌지만, 학생 통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규정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 2018년 학칙에 대자보 허가제를 명시한 학교는 전국 4년제 대학 184곳 중 133곳으로, 전체의 72.3%에 해당했다. 학교 미관, 홍보게시물 질서 등의 ‘시설물 관리 규정’은 학교의 자율성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22년 대자보 허가 제도를 ‘기본권 침해 행위’라 규정, 관련 지침 개정을 권고한 바 있다. 인권위는 해당 권고에서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와 자치활동을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도록 교내 홍보물 게시 및 관리지침을 개정하라’고 밝혔다. 하지만 인권위의 권고는 강제성이 없어, 올해까지도 대자보 허가제로 인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다.

 

최세희기자(darang12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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