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발 생성형 AI 혁명이 전 세계를 강타한 지 3년이 지났다. 놀라운 기술 발전의 이면에는 ‘디지털 문화 제국주의’라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챗GPT(ChatGPT)와 같은 글로벌 거대언어모델(LLM)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지만, 비영어권 국가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전히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국의 데이터와 인프라로 AI를 구축하는 ‘소버린 AI(Sovereign AI, 주권 AI)’가 국가 생존 전략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이게 삼계탕?"… 시각화로 드러난 AI의 문화 왜곡
글로벌 AI 모델의 한계는 실제 테스트 결과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VANK)’가 진행한 글로벌 상용 AI 모델의 이미지 생성 실험은 데이터 편향이 어떻게 문화 왜곡으로 이어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의 대표 보양식인 ‘삼계탕’이다. ‘삼계탕을 그려달라’는 요청에 글로벌 AI는 뚝배기에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전통적인 모습(오른쪽)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면발이 둥둥 떠 있는 이미지(가운데, 왼쪽)를 생성했다. 마치 일본의 라멘이나 베트남·태국 등의 쌀국수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해당 사례를 AI가 학습한 데이터셋에서 ‘Asian Soup(아시아 수프)’라는 포괄적 범주 안에 한국 음식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탓으로 분석한다. 상대적으로 데이터 비중이 높은 타 국가 음식 이미지가 한국 고유 음식의 표준처럼 재현된 것이다.
이에 관해 네이버 하정우 AI센터장은 “우리 문화를 제대로 학습하지 않은 AI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 미래 세대는 AI가 제시하는 왜곡된 이미지를 한국의 표준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다”며 “이는 단순한 오류를 넘어 문화적 종속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비영어권 국가들이 자체 AI 구축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버린 AI는 기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 편향으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 훼손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AI 선발전 : 높아진 ‘디지털 방파제’의 문턱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소버린 AI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닌 필수가 됐다. 소버린 AI란 국가나 기업이 자국의 법·제도·문화를 반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체 인프라를 통해 구축·운영하는 독립적인 AI를 의미한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자국 AI 구축 경쟁은 단순한 기술 확보 단계를 넘어, ‘얼마나 독자적인가’를 가리는 냉혹한 검증 국면에 진입했다.
한국에서도 그 기준은 예상보다 훨씬 엄격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최근 발표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사업’ 1차 평가 결과는 업계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지난 15일 공개된 국가대표 AI 선발전에서, 그간 한국 소버린 AI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네이버클라우드가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탈락의 결정적 사유는 ‘독자성’ 부족이었다. 네이버클라우드가 중국 알리바바의 오픈소스 모델인 ‘큐엔(Qwen)’을 일부 활용한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네이버 측은 전략적 활용일 뿐 핵심 기술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했지만, 평가위원회의 판단은 달랐다. 이는 한국 정부가 지향하는 소버린 AI가 단순한 ‘국산 서비스’가 아니라, 코드 한 줄까지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완전한 기술 주권’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글로벌 소버린 AI… 각국의 ‘생존 방정식’
한국이 내부 검증의 기준을 높이는 동안, 세계 각국 역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소버린 AI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중국은 ‘국가 통제 하의 자립’을 선택했다. 미국의 고강도 반도체 제재 속에서도 알리바바와 바이두 등 자국 기업이 내수 시장을 장악했으며, 큐엔(Qwen)과 같은 오픈소스 모델을 통해 기술 생태계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유럽은 ‘규제와 연대’라는 해법을 택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미스트랄 AI(Mistral AI)’는 미국 빅테크의 폐쇄적 모델에 맞서 오픈소스를 전면에 내세우며 유럽 연합 차원의 연대를 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유럽연합(EU)의 강력한 ‘AI 법(AI Act)’은 글로벌 빅테크의 무분별한 시장 침투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제도적 방패로 기능하고 있다.
21세기 디지털 독립운동, “문화가 곧 안보”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2024년 2월 두바이 세계정부정상회의에서 "모든 국가는 자신의 데이터를 스스로 소유하고 처리할 권리가 있다"며 소버린 AI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빅테크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대가로 데이터 주권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삼계탕’을 ‘라멘’으로 인식하며 자라나는 미래 세대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버린 AI는 단순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AI가 우리의 법을 이해하고, 우리의 정서를 공감하며, 우리의 데이터를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디지털 헌법’에 가깝다. 총성 없는 AI 패권 경쟁 속에서, 문화적 주권을 지키기 위한 소버린 AI 구축은 21세기형 디지털 독립운동의 최전선으로 부상하고 있다.
디지털 독립운동의 다음 질문
그러나 소버린 AI가 곧바로 ‘문화적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산 모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인 정당성을 부여받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 집중을 외면하게 된다. 과연 누가 ‘한국의 데이터’를 정의하는가. 어떤 언어와 시선이 학습 대상에서 배제되는가.
수도권 중심의 표준어, 기업과 정부가 선별한 데이터만으로 훈련된 AI가 ‘한국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칫 소버린 AI는 빅테크 종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국가 주도의 새로운 필터가 될 위험도 내포한다.
문화 주권을 논하려면 기술의 국적보다 먼저, 데이터가 생산·선별·학습되는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민주적인지 묻는 질문이 선행돼야 한다. 진짜 위협은 외국 AI가 삼계탕을 라멘으로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한국다움’으로 고정해 버리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이루원 기자(cruwxn1@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