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2 (토)

대학알리

이화여자대학교

김맛누리 12월의 맛 : 술 - 품격있는 삶

어려서부터 나는 이맘때에 참 헛헛했다. 쉴 새 없이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캐럴, 시골 여자앤 가본 적도 없는 여느 대도시들의 번화한 트리 장식, 엄마가 일 나간 방구석에 들어와서 내복 차림으로 TV를 켜면 나오던 케빈, 브리짓, 그런 이국 소년 중년은 참 더럽게도 끝없이 명랑했고, 다만 나는 그것들과는 별개로 헛헛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나는 어쩐지 이맘때만 되면 온 우주의 기운이 살을 쏴대기라도 하듯 그냥 끝없이 침잠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인가, 이미 환절기와 함께 지나간 몸의 감기는 12월 초엽에 이르러서야 언제나 마음의 감기로 돌아온다.

몸이 감기에 걸리면 우리가 으레 약방을 찾아 약을 짓고 뜨순 밥을 먹고 때마다 알약이나 한약 한 첩씩 목구녕을 때리며 털어넣듯이, 마음에 감기가 찾아들 때 나는 술을 먹는다. <어린 왕자> 속 술주정뱅이처럼 슬퍼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셔서 슬프고, 그래서 또 술을 먹는 멍청한 짓거리를 벌인다. 좀 멍청하면 어떤가. 좀 취하면 어떤가. 좀 슬프면 어떤가. 좀 과하면 어떤가. 세상엔 이보다 더한 이들과 일들이 쌔고 쌨는데. 나는 이 나쁜 술을, 어쩌면 나쁜 세상을 마셔서 다 없앨 테다.

다만 내가 그럴 때에 어떻게든 갖추려 하는 것은 품격이다. 하수구에서도 장미는 피어나리라 믿고,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꿀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다움, 최소한의 품격. 윤동주 시인이 별 하나에 사랑과 동경을 그려내듯이, 나는 술 한잔에 사랑과 사람. 그에 갖출 내 품격을 그려내려 한다. 내가 품격을 되찾고 싶을 때, 품격을 생각할 때 찾는 곳과 마시는 것들과 거기서 향유하는 문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어졌다. 요즘이야말로 이 사회의 품격이란 게 땅에 떨어지다 못해 내핵까지 뚫고 들어간 때 아닌가. 그래서 오늘의 김맛누리는 술, 술이다.

글= 김한누리 기자 h0tnuri@naver.com

사진= 강민경 기자 kcotek@gmail.com

디자인= 정원희 기자 wonywink@naver.com

 

 

르뱅

 

Q1. 르뱅은?

르뱅이란?: 프랑스어로 목욕탕이란 뜻. 칵테일바 이름이 목욕탕이라니, 나는 어쩐지 황당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골수문과의 기질을 발휘하여, ‘아, 이곳은 술과 대화를 통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때끼고 절은 마음을 씻어내리는 마음의 목욕탕이고나!’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장피셜에 의하면, 뉴욕에 있는 동명의 루프탑클럽의 분위기가 너무 맘에 들어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위치는 연세로 안쪽, 일명 다모토리 골목에서 쭉 대로 반대방향으로 직진하다 보면 나오는 구석 건물들의 지하에 있다. 맥줏집인 거품, 피맥집(피자+맥주)인 네이버후드. 전통 술집인 향꽃등 꽤 괜찮은 술집들이 모여 있으니 혹시 르뱅을 찾지 못하더라도 본전은 건졌다!

 

Q2. 마신 것은?

주종/이름: 칵테일/와일드 플라워

들어가는 것: 버번위스키 + 아마레또 리큐르(아몬드) + 피치트리 리큐르(복숭아)

가격:12000원

가니쉬: 민트, 레몬, 로즈마리, 꽃잎

도수: 약 20도

용량: 3.5온스, 약 90~100ml

 

이 술을 처음 접했던 것은, 칵테일바에 본격적으로 다니며 메뚜기처럼 온갖 바들을 돌아다니던 스물한 살, 올해 여름이었다. 그전까지 마시던 술은 조선민족의 영원한 가양주1, 소맥 아니었겠나. 당연히 내게 있어 좋은 술이란 곧 후딱 가게(?)만들어 주는 술이었다. 칵테일 이름은 너무나 어려웠고, 이왕 술을 마시는 김에 좋은 술을 먹고 싶었으니, 당연히 내 입에서 나오는 주문은 이러했다. ‘세고, 맛있는 거로 주세요!’ 술도 결국 입술과 혀끝을 스쳐 입안을 채우고 목울대를 젖혀 목구녕을 적시며 위벽을 때리는 음식이기에, 김맛누리는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이많고 남들보다는 여전히 젊은, 사촌오빠 같은 어느 바텐더가 추천해준 칵테일이 바로 와일드 플라워였다.

와일드 플라워, 그 이름부터 참 땡겼다. 이화여대를 다니면서, 아니 사실은 이화여대를 다니기 이전에도 사회는 나를 언제나 화병속의 꽃으로 상정했고, 제 잣대와 아귀가 맞아들지 않을 땐 언제나 나를 내팽겨쳤다. 화중지병. 욕망하되 갖지 못하는 것. 그것 참 슬프지 않은가. 타인의 욕망에 따라 내 위치가 변한다는 것은 참 슬플 따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꽃이 아니고 싶지도 않았다. 심미적 아름다움을 지향함은 내 정체성 중에서도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요컨대 그들의 욕망에 담기고 싶지 않았을 뿐, 나는 언제나 안팎으로 나를 가꾸어 아름다운 꽃이고 싶었다. 그것은 내 욕망이다. 이를테면 길가에 뿌리내려선 봄바람에 피어나고 가을바람에 눈물지으며 제 머리 떨구는, 그런 야생화이고 싶었다.

그 맛매도 참 땡겼다. 버 위스키 베이스에 아마레또, 피치트리 베이스가 들어간 우에 민트, 로즈마리, 레몬 슬라이스 올린 또 우에 수미상관 격으로 올라가는 꽃잎. 뭐 그런 가니쉬는 사실 어느 정도까지는 아무래도 좋다. 다만 아무랬던 것은 버번위스키이다. 아메리칸 위스키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보통 위스키는 맥아를 주원료로 하는 것과 달리 버번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원료로 한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 많이 경작되던 옥수수의 활용이다. 이를테면 상궤를 벗어난 위스키다. 이것 참 야생화에 참 잘 어울리는 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술을 찾을 때면 삼위일체를 느끼며 마음의 홀리한 평화에 젖는다. 상궤를 벗어난 위스키를 베이스로 한 상궤를 벗어난 칵테일을 마시는 상궤를 벗어난 오늘의 나. 에라, 상궤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지 않을진대 상궤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넉넉하고 대담한 위로를 건넬 수 있게하는 술, 와일드 플라워였다.

 

 

틸트

 

Q1. 틸트는?

이 근방에서 술 좀 마신다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주워들어본 이름이다. 사실 너무 대중적인 술집이라, 어디 구석에서 조용히 혼자 술을 꼴꼴꼴 마시면서 글이나 쓰고 생각에 잠기고 책을 읽고 싶은 나에게는 좀 덜 가게 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글 자체가 대중적인 글이기에 이에 부합한다 느껴서이기도 하고, 여기서 마신 술을 꼭 소개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위치는 이렇게 말하면 아시려나. 연세로에서 독수리 약국 건너편에 존재하는 치킨골목의 끝자락 어디쯤, 이 주위에 장군 찜닭, 내가 사랑해 마지않은 각종 해장음식집들, 더불어 기본안주계의 SM이라 볼만한 전통술집 포석정까지 있다. 그렇기에 틸트 역시 찾다가 공을 쳐도 본전은 찾는다 하겠다.

 

Q2. 마신 것은?

주종/이름: 흑맥주/올드 라스푸틴

들어가는 것: 정제수, 보리맥아, 설탕, 홉, 효모

가격: 14000원

도수: 9도

용량: 355ml

올드 라스푸틴, 라스푸틴은 누구냐? 제정 러시아 말기의 요승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타락한 성직자로, 러시아 황가의 여러 인물들과 깊은 교분을 유지하며 국정을 농단하고 장물같은 부를 축적했으며 그 끝으로 결국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아, 요새와 참 잘 어울린다는 말은 뭐 여러 가지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다만 나는 요새 교양과목에서 러시아 문학을 배우다가 생각났을 뿐이다. 다른 분들이 다른 걸 떠올렸다면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해석학적 읽기의 영역에서 존중하는 바이다. 요컨대 당신 꼴리는 대로 읽으십시오.

원래 타락하고 못되고 나쁜 것이 매력 있다 하였다. 올드 라스푸틴 또한 그러해서, 잔에 천천히 따르면 농밀한 거품이 차오르는 것에 희열마저 느끼곤 한다. 그것을 입에 갖다댄 내 첫 느낌은 얄궂게도 세안제의 질감이었다. 일본에 여행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남은 엔화를 싸그리 긁어모아 산다는 바로 그 세안제, 시세이도 계열의 브랜드인 센카의 퍼펙트휩 클렌저. 그 퍼펙트한 휩의 쫀쫀하고 농밀한 질감. 나는 그것이 떠올랐다. 캬, 이맛은 쇼와시대 버블경제 붕괴직전의 맛이다! 지나치게 달고 지나치게 쓴. 바로 그 맛. 그 터무니없이 호화로운 농밀함은 이다지도 헛헛한 내 요새의 마음과 맞물려 잘도 목구멍을 때렸다.

이즈음에서 고개를 까닥이며 병의 성분표를 보자. 정제수, 보리맥아, 설탕, 홉, 효모. 단순한 구성이 이토록 치밀하고 호화로운 농밀한 맛을 내는 게 놀랍기도 하다. 하긴 뭐 요새 벌어지는 그 치밀하고 호화로운 부정축재들의 주체의 상식이나 의식수준이 그토록 단순한 걸 본다면 이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주어는 없고 상식의 폭은 넓으며 필자의 저술방향은 본지의 의견과 궤를 달리할 수도 있음을 다시 한 번 공지한다. 라스푸틴을 마셔서 그런가, 참 요상하게 글이 써졌다. 단순한 요요미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오늘의 요사함을 고찰하게 하는 오래된 맛, 올드 라스푸틴이었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도 마음에 찰 것 같지 않으며, 마무리를 하고 싶지 않음이 오늘의 내 맘이다. 요즈음의 우리는 모두 깊은 허무감에 침잠되어가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분노하고 다음 타석을 골몰해야하는 중차대한 의무를 족쇄처럼 달고 살기에, 더 길고 지난한 개인적 사견으로 그대들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

보통 선배들이 지친 후배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신임을 받기 위해 진리처럼 지니는 한 가지 말이 있다.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 그리하면 너는 살리라.’ 나는 뭐 지갑도 두껍지 않고, 모두의 선배도 아니니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로 이 글을 건네겠다.

어쩌면 요즈음의 우리는 상을 당한건지도 모른다. 어떤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의 사망, 위정자들에 대한 신뢰의 사망, 그래서 민주주의의 사망. 민民으로서 우리는 상을 당했고, 그래서 슬퍼 마땅하다. 그러나 어디 상주가 죽음 앞에서 슬퍼하기만 할 텐가. 상주는 마땅히 경황없는 속에서도 격을 갖추어 장례를 치러야만 한다. 어떤 근원적인 악과 어떤 그릇된 욕망의 소산들...어쩌면 우리 모두의 방조로 일어난 재앙. 이에 사망을 선고하고 이를 수습하고 품격을 갖추어 장례를 치러내는 것은 마땅히 우리 시민들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주民主일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서 하나 생각해볼만한 것은 모든 장례에는 끝이 있단 것이다. 국장이든, 삼일장이든, 49제든. 어떻게든 다 끝이 있고, 그 끝에는 한국식 타령이건, 불교식 염불이건, 기독교식 송가건 장송곡이 존재한다. 장례를 치르면서 우리가 막걸리나 소주를 기울이듯이, 우리도 우리 사회의 장례를 치르면서 술을 마셔보자. 그리하여 이 힘들고 슬픈 일들 속에서도, 그 다음에도 존재해야 할 우리 존재의 유의미함, 우리 삶의 존엄함을 닦아내자. 어쩐지 술이 많이 땡기는 2016년의 12월을, 진정한 민주주의의 품격 있는 상주가 되어 우리, 같이 술잔 기울이며 살아가자.

우리, 품격 좀 갖추자.

 


1   집에서 만든 술.

 

 

기사 = 김한누리 (h0tnuri@naver.com) 기자

온라인 편집 = 임영진 (yjlim530@gmail.com)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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