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5 (금)

대학알리

청년

저는 24살이고, 우울합니다.

If: 엄마의 삶을 반추할 수밖에 없는 삶

 처음 ‘우울증’이란 단어를 마주한 건 10살 때였다. 학교에서 우울증 검사를 했는데, 반에서 내 우울 지수가 가장 높게 나왔다며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엄마도 나도 그저 사춘기가 일찍 찾아온 거라 여겼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10살의 난 우울증에 시달렸던 게 맞다. 매일 어떻게 죽을지 생각했다. 당시 내가 사는 집은 아파트 4층이었고, 낮았다. 그래서 그때의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숨을 쉬지 않는 거였다. 방에 혼자 앉아 코와 입을 막고 숨쉬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숨구멍을 꽁꽁 막는다고 해도 인간의 자가 호흡 능력은 유효했다. 그래서 죽지 못했다.

 

 22살이 되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진단을 받기까지 꽤 많은 의사를 거쳤다. 네 번째 의사를 만나서야 확실하게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의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사람들이 힘들고 지칠 때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버티라고 하는데, 저는 도무지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아요. 매 순간이 지겹고 끔찍했어요. 그저 꾸역꾸역 버틴 거예요.” 의사가 답했다. “만성이라 그래요.”

 

 상담을 진행하면서 내 정서가 PTSD, 그러니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만성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워낙 오랫동안 지속된 우울이라 우울증이라고 눈치채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의사 네 명의 판단이 제각기인 이유도 이래서였다.

 

 내 외상은 엄마였고, 아빠였다.

 


 난 엄마와 단 둘이 산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쭉 그래 왔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 후 바로 별거에 들어간 이유는 간단했다. 돈을 안 줘서. 출산 비용도, 결혼 후 생활비도 모두 엄마의 퇴직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는 짧게 만나 결혼했다. 엄마는 결혼할 당시 5개월 된 임산부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항상 고민했다. 둘의 결혼은 나 때문에 고민할 겨를도 없이 치러진 걸까. 만약 내가 없었다면 그들은 결혼했을까. 적어도 서로를 파악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을까.

 

 엄마의 불안은 자잘한 규칙들로 표출됐고, 그걸 지켜야만 하는 난 숨이 막혔다. 비싼 휴지로 벌레를 잡으면 혼이 났고, 이불을 잘못 정리하면 욕을 들어야 했다. 엄마의 고단함을 풀 구석은 나밖에 없었다. 엄마가 밖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으면 짠하다가도 지쳤다. 나 역시도 엄마를 위로하기보다는, 인내심이 부족하다며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를 보듬는 모녀지간은 없었다. 엄마는 피곤했고, 나는 답답했다. 서로를 의지하며 오붓하게 살기엔 우리 둘은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할 때마다 꾀병이라 여겼다. 좀만 참아보면 사라질 거라 그랬다. 투정으로 울먹이던 내게 지금 울 사람은 네가 아니라고 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말하면, 진짜 죽고 싶은 사람은 네가 아니라 했다. 그때의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울지 않는다. 꾀병인데 자꾸 약을 먹는다는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 약 봉투를 소리 나지 않게 찢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내 눈물을 외면했던 엄마가 밉다. 그런데 미워할 수 없다. 엄마를 가해자라고 매도하기 위해, 엄마를 원망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엄마의 발언에 납득이 가서 더 괴로운 거다.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아있는 게 용했다. 미워할 수 없어서 괴롭다.

 

 

# 엄마를 미워할 수 없어서

 

 22살 여름, 우울증은 당연히 받아들였던 내 현실을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게 했다. 내 정체성은 한순간의 욕정의 산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언젠가 이 생각을 밖으로 내뱉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사랑했을 거라고, 그러니 너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엄마와 아빠의 섹스는 사랑이었을까. 사랑하면 꼭 섹스를 해야 하는 걸까. 사랑의 결실은 섹스를 통해서만 맺어지는 걸까. 존재만이 사랑의 결실인 걸까. 존재는 꼭 사랑의 결실로만 태어나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존재는 우울해야만 하는 걸까. 우울한 존재는 그 우울을 극복해야만 하는 걸까.

 

 자꾸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마가 엄마를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가 만약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임신 중단. 임신한 사람이 자신의 임신을 지속하거나 중단할 권리를 뜻하는 단어다. 한국에서는 낙태라고 불리는 그것. 낙태는 떨어질 락(落)을 쓴다. 자연스레 ‘추락’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낙태를 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존재는 지켜진다. 낙태법으로 인해 가능성 있는 존재는 살아남고, 이미 발생한 존재의 존엄은 추락한다. 추락과 동시에 그 존재를 품어야만 하는 다른 존재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왜 태어날 존재만큼 이미 태어난 존재에 대한 존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왜 사회는 임신과 출산을 요구하면서 출산 이후에 벌어질 돌봄은, 그 일생은 모조리 가족에게 떠넘기는 걸까.

 

 엄마는 34살에 날  낳았다. 그때 기준으로는 늦은 출산이었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돼서 아빠와 별거에 들어간 이래로 날 돌봤다. 그리고 여전히 날 돌보고 있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돌봐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돌봄을 기꺼워한다. 월세를 내고, 전기세를 내기 위해, 인터넷 통신비를 내기 위해 일한다. 엄마의 노동 없이는 난 공부할 수 없다. 책을 쌓아 놓아둘 공간도, 노트북을 켜는 데 사용할 전기도, 수업을 듣기 위한 와이파이도 사용할 수 없다.

 

 

 왜 엄마의 돌봄은, 엄마의 노동은 ‘강인한 엄마’ ‘대단한 엄마’ ‘좋은 엄마’라는 단어로 지워지는 걸까. 왜 당연시되는 걸까. 엄마가 노동하며 느꼈던 모멸감과 빨래를 널고 나서 느끼는 허리의 통증은 왜 아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왜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걸까. 왜 생로병사의 일로만 치부되는 걸까. 

 

 아빠는 몇 년 전까지는 친할머니와 같이 살았고, 지금은 그의 누나의 가족과 함께 산다. 그를 향한 그의 혈육의 돌봄은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월급으로 경마를 하고 도박을 한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채 전화해 그의 딸에게 “네가 크면 다 알게 될 거라고.” “크면 다 알려주겠다.”라고 한다. 그 소리가 그의 딸 인생의 절반을 맴돌았다. 아빠의 비행과 무책임함은 ‘남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말로 설명됐다. 내 아빠는 수많은 나쁜 아빠 중 하나일 뿐이다.

 

 왜 아빠의 폭언은, 왜 그의 폭력성과 일방성은 ‘나쁜 아빠’라는 한 단어로 설명되는 걸까. 그 한 단어가 아빠의 모든 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걸까. 왜 아빠는 나빠도 되는 걸까. 왜 나쁜 아빠보다 나쁜 엄마가 더 나빠 보일까. 아빠는 우리 둘과 교류가 없으면서도 절대 이혼은 안 해줬다. 나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지 못해서였다. 내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는 상관없이 그에겐 내가 자신의 딸이라는 법적 권리가 가장 중요했다.

 

 왜 아빠가 주장했던 나에 대한 친권은 아빠와 엄마 중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거였을까. 왜 나를 돌보지 않는 아빠가 내 친권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빠에게 소유물이었던 거다. 정력의 산물. 정상 가족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증거.

 

 아빠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엄마의 책임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엄마는 내 존재를 원망하진 않을까? 왜 엄마는 날 데리고 살았을까. 왜 아빠처럼 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까. 왜 여전히 내 끼니를 걱정하는 걸까. 엄마니까, 라는 말이 엄마의 사랑을, 엄마의 책임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는 걸까.

 

# If: 엄마의 삶을 반추할 수밖에 없는 삶

 

 내 우울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엄마의 사랑이 사실 엄마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세상이 엄마에게 나에 대한 사랑을 억지로 강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 오묘한 사랑은 부담스럽고 불안했다. 그래서 존재 자체로 사랑받으려 하기보단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증명하는 편이 오히려 편했다. 열 아들보다 잘 키운 딸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열 아들을 이길 수 있는 건 ‘잘’ ‘자란’ 딸이었다. 예쁘고 착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딸. 딸 앞에 주어지는 무수한 수식어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은 무엇이든 둘로 나누길 좋아했다. ‘자연과 문화, 감성과 이성, 야만과 문명,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세계에서 성장은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다. 성장하기 위해선 우울로부터 초연해져야 했다. 내 감정은 관리의 대상이었다.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았다. 참고 버티다 보면 성장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그 성공과 성장이 나에게 가당키나 한 것이었을까. 그들이 말하는 성공과 성장의 주체는 내가 아니었다. 엄마에게 그리고 나에게 허락된 성장은 따로 있었다. 결혼-임신-출산을 통한 ‘모성’의 획득만이 오로지 여성의 성장으로 가시화되었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남학생들은 아내의 얼굴이 바뀌었고, 여학생들은 남편의 월급이 바뀌었다.


 이런 세상에서 엄마는 엄마가 됐고, 난 그의 딸로 자랐다. 우리를 '결손'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살았다. 그 부족함 때문에 죄책감과 우울감에 살았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라고, 지긋지긋한 가부장제 때문이라고. 이게 다 뭐 같은 세상 때문이라고, 내 탓이 아니라고. 엄마 당신의 탓이, 우리의 탓이 아니라고 외치고 달래도, 엄마는 여전히 자책한다.

 

 그래서 생각한다.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엄마를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엄마가 만약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면.

 

 '만약’이라는 가정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생각이란 걸 안다. 부질없는 일이다. 아무리 상상해도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이 우울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직행길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할 수밖에 없다. '만약'이라는 상상을 통해서만 엄마의 삶을 해석할 수 있다. 엄마의 삶을 알아내지 않고서는 나를 알아낼 수 없다. 내 우울의 기저를 알아낼 수 없다. 사실 엄마의 우울이다. 살아남기 위해 엄마가 되어야만 했던 자의 우울이다. 그'녀'의 우울이다.

 

 우울의 이유를 해석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유를 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듯이. 그럼에도 우울함을 쓰는 이유는 이 우울로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함에 죽고 싶다가도 언젠가 이 우울함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하지만 우울의 기저를 알아낸 지금, 내 우울이 끝날 거라 장담할 수 없다. 끝내야겠다는 다짐도 접었다. 우울은 꼭 끝내야만 하는 걸까. 이 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다. 사실 나만 우울한 게 아니라는 것. 너와 나는 저마다의 이유로, 아니 사실은 같은 이유로 아프다는 것. 우리의 감정이 여성의 감정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런 것들을 보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살고 싶어졌다. 살아야 성장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거니까. 사실 그 '성장'이란 단어를 짓밟고 싶어 살고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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