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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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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하는 욕망들 속 파괴되고 피로한 청년들의 이야기_<피로사회>편

 

<피로사회> 한병철 저.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과 지속되는 일상의 무기력함, 피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특별히’ 신경 써서 교정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흔한 노력의 산물이며 ‘성장통’이라는 신화 속에서 정당화되고 일상화된다. 이러한 개인들의 일상은 흔히 아르바이트, 직장 생활, 학교생활 등등 여러 가지 개별적인 과정들에 의해 진행 되지만 그들은 모두 ‘피로’하다.

 

 하지만 이러한 피로함을 그저 노력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하는 긍정성의 언어들로 충분히 포섭하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개개인들의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적신호’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답은 ‘아픔과 자기파괴를 동력으로 삼고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일까? 수많은 자기계발담론들 혹은 어른들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조언들은 보통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나도,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분명 좁아지는 취업시장의 문제로, 태생적인 가난과 물질적 빈곤으로, 학력이라는 상징자본으로 위치 지어지는 ‘위계’로, 다양한 정체성에서 소수자라는 이유로, 그들은 사회가 제공한 ‘자유로운 환경에서 마음껏 경쟁하라!’라는 명령아래 수없이 경합하고 배제되고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 속에 자신을 있는 힘껏 던져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우리들을 수없이 절망에 빠트리고 끊임없는 경쟁과 피로 속에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우리를 파괴시켜버리고 무력감이라는 지옥에 구겨 넣고야 마는 그 한마디. “더, 더,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지금 겪는 고통을 성공의 동력으로!”, “노력하면 조건들? 장벽들? 다 극복됩니다.” 순식간에 우리들의 현재적이고 ‘미래적’일 피로들과 고통들, ‘기회’의 불평등과 말 못할 차별들은 이와 같은 말들에 의해 여과되고 순화되어 모든 사회적 문제들을 자기 자신의 총제적인 부족으로 치환시키고 너무나도 순응적이면서 ‘자기 파괴적인 인간’으로 재탄생시킨다.

 

 이러한 ‘보편적인’ 우리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이 우리의 ‘심각함’을 잘 이야기해주고 있을까? 이런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질문 안에서 나는 <피로사회>를 꺼내들었다.

 

끊임없는 자기합리화와 사회의 욕망

 청년 00씨의 하루는 이렇다. 대학을 졸업한 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경쟁을 위한 생계비를 유지하고 나머지 시간은 취업을 위한 공부에 전념한다. 보통 8시간 정도를 자지만 무언가 충분히 잔다는 느낌도, 그렇다고 피로가 해소된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다. 때로는 이게 신체적인 피로인지 정신적인 피로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의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자. 00씨는 노동을 한다고 한다. 즉 일정 정도의 ‘성과’를 내서 생계비를 벌기 위해 진상들의 파괴적인 행동에도 웃으며 자신을 희생시키고 사장의 ‘선 넘는’ 행동에도 나름의 사회생활 경험으로 융통성 있게 넘긴다. 문득 국가기구가 알바를 줄일 수 있을 정도의 생활 자금을 지급해줬으면 하는 ‘불순한’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건 미디어나 어른들이 늘 해왔던 말처럼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게으르고 기회주의적’인 생각은 내가 부족하다는 징표니까. 그렇게 순간순간의 의문과 회의를 사회적으로 훈계된 언어들과 타협하며 끊임없이 자책하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지극히 ‘평범’한 청년들의 일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피로’를 정상성의 범주에 두고 청년의 성장통이라고 취급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기까지 하다. 다음과 같은 책의 구절은 이러한 자기착취적인 청년들의 공통된 태도와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형하는 기업가이다. ····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히 드러내준다. ····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피로사회>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23p~24p, 25p

 

 확실히 그렇다. 나 자신도 그렇고 내 주변의 학우들도 더 이상 부정하고 의문하고 회의하고 질문하는 것. 그런 것에서 피어나는 ‘가능성’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부조리함과 구조적인 불평등을 감각한 채 사회가 부여한 실용주의적인 삶의 태도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마음 한편에 있는 ‘불편한 생각들’을 끊임없이 억압하거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불평만 늘어놓는 ‘잉여인간’이라고 말하며 그를 기어코 순응시키고 훈육시키려 한다.

 

 청년 00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는 사소한 불편함들, 차별들, 폭력들(일을 하다보면 신고하기는 애매하지만 분명히 ‘폭력’인 행위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있다.)을 온몸으로 느끼고 복기하며 폭력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걸 처리하는 방식은 상당히 깔끔하다. 그냥 사회에서 가르쳐준 대로, 어른들이 훈계한 대로 “다 경험이다 생각하고 버텨야 돼.”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면서 웃으며 응대하면 된다. 그게 서비스업의 규율이자 철칙이니까. 더 나아가 이러한 일상화된 폭력 속에서 일정정도의 성과를 내야 급여가 나오니 성과사회의 주체들, 아니 보통청년들은 오늘도 “yes, we can”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역설적으로 자유롭다는 생각아래 이루어지며, 자신을 위해 자신을 착취한다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고야 마는, 그런 모순 안에서 지금도 나는, 우리는 웃고 있다.

 

 ▲사진 출저 : Pixels

 

진지한 담론이 사라졌다? 너무 ‘착한’ 존재들의 울음소리

 21세기 대학사회에서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그들의 현재적인 욕망을 상시적으로 투영하는 공간은 ‘에브리타임’이다. 지금 대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대학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에브리타임을 하진 않아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정도로 많은 감정들, 욕망들, 담론들이 상호 교차하며 공론의 장이 창출되는 공간이 에브리타임이다. 또한 사회의 공론장도 더 이상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물리적으로 전단지를 뿌리고 그걸 보고 집합하여 저항 운동을 하거나 집합적인 논쟁의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고, 디지털화된 공간에서 상시적으로 홍보하고 연결하고 논쟁하거나 실제 오프라인 사회운동과 연결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연결을 끊으며 종료된다.

 

 어쩌면, 이러한 정보사회와 기술의 물결 속에서 대학생들이 선도적으로 무언가 불만을 이야기하고, 문제를 공유하고, 자신의 절망적이고도 파괴적인 상황을 전면에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은 효과라는 측면에서 에브리타임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공간은 더 이상 진지한 이야기를 꺼낼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사회적으로 훈육되고 부여된 욕망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오락과 향락들, 성공을 위한 정보들, 사적인 서사들, 차별과 폭력의 상호 배제, 퇴폐적이고 성적인 이야기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에브리타임에서 심심하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우리 학교 나오면 어디까지 취업 가능해?”, “우리 학벌가지고 되겠냐?”, “난 그냥 중소기업이나 가야겠다.. 그게 내 위치인 듯”, “길냥이들 4컷”, “성생활 파트너 구합니다.”

<목포대학교 에브리타임 자유게시판, 어른들의 놀이터 제목 부분발췌> 2020. 10. 11

 

“너네 00과목 성적 어떻게 됐어?”, “패논패의 문제점”, “이번 총학 제일 맘에 드는 건”, “재미있는 짤 모음”, “성향 맞는 파트너 구합니다.”

<홍익대학교 에브리타임 자유게시판, 성 게시판 제목 부분발췌>2020. 12. 21

 

“에렝베르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탈갈등화”는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와 이를 수반하는 사회의 탈이념화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 사회의 긍정화가 폭력을 철폐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분쟁이나 갈등의 부정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의의 긍정성도 폭력의 원천이 된다.“

<피로사회> 우울사회. 101p

 

 물론 이와 같은 오락적·퇴폐적·자기 배제적·기능적인 담론들 말고도 지엽적인 불만들이나 혹은 교직원의 성추문 같은 것들이 공론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범죄 수준의 ‘폭력’이거나 임계점에 도달한 어떤 결정적 사건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겪는 일상화되고 자기착취적인 성과사회의 시스템적인 폭력, 즉 “열심히 하면 다 극복할 수 있어” 라는 사회적 명령이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위계와 폭력(학벌주의, 청년 빈곤문제, ‘공정성’담론 등)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반발의식이 생겨도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착하고 성실한 청춘’은 불만과 저항이라는 사치를 ‘긍정성’이 만들어내는 자기착취적인 메커니즘 속에 가두어놓고 끝없이 자기를 탓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면서 끊임없는 피로의 무덤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간다.

 

 절대로 누굴 탓하면 안되고 내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해야 하는 것, 혹은 내 노력의 부족을 탓해야 하는 것은 세련되고 성실한 이시대의 ‘청년’이다. 그런 청년의 모델은 어디서나 심심하지 않게 들을 수 있도록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추어진 일상화된 폭력들, 누군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숨죽이며 울고, 불합리와 부조리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거울을 보고는 웃고, 생활 리듬을 쪼개고 쪼개가며 피로를 동력으로 삼아 열심히 노동을 하는 청년들은 누군가의 상상 속에나 존재할 법한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건 ‘현실’이고 조금만 시선을 돌려 ‘주위’를 돌려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청년들의 이런 상황은 지금도 반복된다.

 

그들의 증언을 정치적인 것으로

 어디선가 늘 들려오는 말이다. “청년 세대의 실업난 심각해”, “공정한 사회를 위한 첫걸음”, “국가비전 2020” 나에게 그리고 청년들에게 이러한 공허한 공적인 담론은 하나의 ‘폭력’이다. 전혀 구체적인 삶을 표상하지도, 반영하지도 않고 사회적 ‘표준’에 맞춰 정책화되어 개개인들에게 부여되는 복지들, 혹은 제도권 언론에서 표집하여 통계화시킨 통계지표들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부분, 혹은 구체적인 삶의 부분들을 포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을 제도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청춘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다.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겪는 일상화된 폭력들, 원룸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청춘들,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자신을 최대한 착취해가며 노동현장으로 시시각각 출근하는 학우들, 일상 속 학력, 성별, 지역, 소수자 정체성 등에서 비롯되는 폭력들을 더 이상 묵인하거나 정당화시키고 주변화 시키는 주류 담론의 공허함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서사와 폭력의 증언들을 충분히 듣고 공공영역에서 문제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다음과 같은 대안은 적절하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나는 그저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 조차 않은” 친절의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를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를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 한트케는 이런 “근본적인 피로” 위에다 활동성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모든 생존과 공존의 형식을 모아들인다.”

<피로사회> 피로사회. 68p

 

 나는 이러한 대안을 이런 식으로 독해하고 싶다. 더 이상 자기착취적인 성과주체로서의 자아가 아닌 그들의 아픔과 피로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표상하며 문제화시키고 개방하는 자아로서 새로운 세계와 가능성을 마음껏 ‘상상’해야 한다. 또한 더 이상 상호 배제와 폭력의 비교의식이 아니라 청년들에게 공통된 ‘피로’라는 육체적 고통과 그에 대한 원인들로 존재하는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사회구조를 포착하며, 더 나아가 공통된 피로의 다양한 형태들, 즉 소득수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학력자본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는 구체적인 개개인들의 고통의 서사를 충분히 드러내야 한다. 자신들의 삶을 증언하고 논의하고 저항하는 생존과 공존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들을 가시화시키고 제대로 마주하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편집하지 않고 ‘생방송’으로 세상에 송출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피로의 원인들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기사 대표이미지 사진 출저 : Pi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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