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할만한 존재, 친밀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미디어의 화법
일전에 친구와 한 종편 예능프로그램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예능 프로그램이 너무나도 재미있기 때문에 더 무섭다고 고백했다. 남성연대와 서열문화가 눈에 뻔히 보인다. 훼손과 무모함, 그 안에 숨겨진 폭력을 남성성으로 애써 감춰 포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술자리 모습을 재밌게 풀어내고 동의에 근거하지 않은 일상의 폭력들을 평범하고 때로는 재밌기까지 한 상황으로 풀어내는 그 화법에 익숙해진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질서에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는 것은 사소하기에 더 위험하다. 비판과 경계가 아니라 습관과 익숙함의 옷을 입고 있기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런 영향이 있기는 했는지 따질 틈을 주지 않는다.
지난달 1일 한겨레 신문에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선생의 칼럼이 올라왔다. ‘내 슬픔은 누구에게 등을 보이고 누구의 얼굴을 바라보나’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이 밀려왔다. 모 기업가의 죽음은 온종일 포털과 지면을 달굴 정도로, 해석될만한 죽음으로 애도 되었다. 그의 서사는 많은 사람의 관심과 눈물 속에서 영광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마치 그의 공과 과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훌륭한 기업가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는 꼭지를 보도하는 기사도 쏟아졌다. 마치 그것이 세련되고 핵심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주장인 것처럼 말이다.
출처: 한겨레 신문, 2020년 11월 1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8019.html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다. 몇몇 언론사가 신문의 한 지면을 통째로 할애해야 할 정도로 집에 돌아가지 못했던 이들의 죽음은 많았다.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궤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할 공간은 없다. 칼럼의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영광된 기업가의 모습은 노동자들의 시체를 딛고 억울한 목소리를 차단하며 올라왔음에도 말이다. 이라영 선생의 칼럼을 읽고 다시 생각하고 싶어졌다. 무엇이 애도할만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무엇이 그 존재와 그렇게도 친밀한 관계를 맺게끔 해주고 있을까.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교집합조차 없을 거대한 권력에 선뜻 공감해줄 수 있게 만드는 일상의 사고패턴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당신이 보고 있는 친밀한 권력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업의 이름들이 자주 들린다. 정확하게는 뉴스에서나 오르내리는 기업 총수나 고위관리직들의 이름이다. 오락 프로그램에서 은유적으로 회자되기도 하며 때로는 하나의 웃음 요소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상표로서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개그 코드가 되어 간다. 유튜브에서도 그들의 얼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능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마치 우리 곁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자 다국적 기업 급의 규모를 가진 기업의 총수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한다. 오히려 권위 없이 소탈해 보이게 한다.
출처: tvN 예능 프로그램 ‘신서유기’
출처: tvN 예능 프로그램 ‘신서유기 4’
예능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유튜브를 즐겨보는 입장에서 그런 미디어의 문법을 쭉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가까워진다. 친근해 보인다. 칭찬하고 싶지는 않더라도 이입된다. 우스꽝스러운 대화가 지인들의 모임처럼 느껴진다. 한 회사의 이사직에 놓인 사람이지만 원래 알았던 편한 사람처럼 괜스레 푸근한 인상을 준다. 모두가 아는 어떤 빵집의 상표명을 맞추는 퀴즈를 보고 있으면 어째 친숙하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기업의 이름을 알면서도 자막으로 애써 감추는 것도 요즘 예능의 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듯하다.
기업의 총수라는 사람이 나와 연예인의 농담과 애드리브에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인간미가 느껴진다. 징그러운 말이지만 때로는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인간들이 많았는지 모 대기업 총수의 소탈함을 다루는 유튜브 영상 조회 수가 100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가 너무나 불쌍해 보였는지 회장의 죽음 이후 기업의 총수가 내야 할 상속세까지 걱정해주곤 한다.
나의 경험, 그리고 권력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은 위험하다. 단순히 ‘배부른 걱정을 하고 있네’라는 핀잔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우리가 언어로 꺼내기 이전부터 형성되었을 감정과 사고패턴이 기득권에 이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우리의 관점에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근한 존재로 그려지는 기업, 신비주의를 벗은 재계 총수들의 유튜버라는 최근의 동향은 ‘나’와 동일한 맥락을 가진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없애며 쌓아온 부와 다른 존재들을 죽이며 비정상적으로 견인되어 온 한국 사회에 대해 날카롭게 볼 겨를은 없다. 비판적 거리는 생기지 않는다.
출처: 정용진 신세계 회장이 이마트 유튜브에 출연한 이마트 라이브 영상
출처: MBC 콘텐츠 채널 엠빅뉴스 유튜브 영상 섬네일
출처: 네고왕 1화에 출연한 제네시스 BBQ 윤홍근 회장
우리가 그들을 친근해 하고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업의 횡포는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는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형태로만 남겨둔다. 죽지 않게 해달라는 당연하고도 최소한의 요구마저 타협의 대상이 된다. 여성 인재 중용을 앞세우지만, 사실 지독한 착취의 정점에 서 있다. 기업의 이윤에 노동자의 건강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노조는 죄악이 된다. 우리가 예능에서 깔깔대며 본, “친근해 보이는” 바로 그 기업과 기업가들이 만든, 사회 구조 속에서 말이다.
누군가는 말 한 번 했다고, 세상 뭘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냐고 푸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당신 곁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듯해 보이는, 우스워 보이는, 혹은 어쩐지 귀여워 보이는 그들의 웃음을 웃음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찜찜하다. 조직의 유지와 이윤을 앞세워 밟고 외면해왔을 많은 사람이 얽혀있다.
그들은 불편한 권력이다. 방송에 나와 곤란해하고 당황해하고, 실실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 따위로, 소위 귀엽게 의인화되어 재현된다고 한들 누군가의 생사를 쥐고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끝끝내 모른 체 할 수 있는 폭력이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위한 노조를 늘 불쾌해하며 조직적으로 부술 수도 있는 권력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정규직으로 돌려 써가며 갈아 끼울 수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은 방송에 등장한 기업의 실제 잘못은 그게 아니네, 기업가가 실제로 잘못한 것은 아니네, 어쩔 수 없네 하는 허수아비 같은 논쟁이 아니다. 바로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상징으로 들어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순박하게 웃고 있는’, ‘권위적이지 않은’ 따위의 비판적 거리 없는 이미지를 선점했을 때 생길 사람들의 반응과 증상들에 대한 것이다.
‘친근한 권력’이라는 미디어의 문법은 당신 바로 옆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약자가 아닌, 접점조차 없을 권력에 아주 손쉽게 공감하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최근 대기업의 회장의 죽음을 마치 제 일처럼 아쉬워하고 슬퍼했던 자들이 눈에 선하다. 재계 총수들의 신비주의 탈피 전략, 예능 출연은 꽤 잘 먹힌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상속세 여론만 보더라도 그들의 선택과 어쭙잖은 변명에도 귀 기울여주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기억하자. 당신이 가까이 해야할 것은 그들의 “억울한” 상속세가 아니다. 규제로 대기업이 죽어난다는 헛소리도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것이라는 쓸모없는 공감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