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일)

대학알리

한국외국어대학교

나만의 테라피 루틴을 찾아서 : ‘디깅’

“내 삶은 디깅 전과 후로 나뉜다.”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든 취미 생활

‘디깅(Digging)’이란 광산에서 채굴하는 행동을 일컫는 말로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자신이 관심 있는 영역에 깊게 파고드는 것’으로 확장됐다. 디깅 문화를 영위하는 이들을 두고 ‘디깅러’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디깅러란 자신의 관심 분야에 맞춰 소비 패턴을 발전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디깅 시장 규모가 확대되면서 다양한 ‘문화’와 ‘취향’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는 문화 산업의 전반적인 확대로 이어졌다.

 

‘슬램덩크’는 디깅의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국내에서 470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하며 농구 신드롬을 일으켰다. 영화 관련 소비의 증가는 농구를 포함한 의류나 기타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외대알리는 슬램덩크 팬의 생생한 증언뿐만 아니라 뮤지컬, 캐릭터 물품 수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깅 소비를 즐기고 있는 한국외대 디깅러들을 만나봤다.

 


 

“슬램덩크”

 

Q1. 슬램덩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올해 초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계기였어요. 사실 개봉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개봉 후 몇 달이 지나도 계속 상영 중이더라고요. ‘그렇게 재미있나?’ 궁금해져 극장에 갔어요. 러닝타임 동안 몇 년 치 희로애락을 다 겪은 것 같아요. 후반부 클러치 타임에서는 친구의 팔을 부여잡고 파들파들 떨 정도로 몰입했죠. 극장을 나서는 길에 깨달았어요. ‘내 인생은 이 작품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정신 차려보니 원작 전권을 결제한 상태였어요. (웃음)

 

Q2. 슬램덩크를 좋아하게 된 후 어떤 디깅 소비를 했나요?

 

A. 원작 만화책과 리소스북, 외전 <그로부터 10일 후>까지 모두 정독했어요. 농구 만화를 좋아하다 보니 실제 농구 경기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특히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 <나바호 바스켓볼 다이어리>, <빌 러셀: 레전드>, <라스트 챈스 대학: 바스켓볼> 등 다큐멘터리를 보며 농구 선수들의 열정에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원래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슬램덩크>를 기점으로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된 걸 보면 신기해요.

 

 

여러 굿즈도 사 봤어요. 카카오톡 이모티콘이나 폰케이스, 포토카드, 핀뱃지, 키링 등 조금씩 모았네요. 굿즈는 애정의 표식이자 저에 대한 단서라고 생각해요. 은근히 관심사를 드러내면서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발견해주길 기대하는 거죠. (슬램덩크) 팬분들께서 알아봐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Q3. ‘나 이런 것까지 해봤다’라고 할 수 있는 농구 관련 이색 경험이 있으신가요? 

 

A. 생전 처음 대학 농구 경기를 직관했어요. 경기장에서 직접 관람하는 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행위 같아요.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에 열광하고 있다’는 벅찬 유대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며칠 전엔 노시로공고(<슬램덩크> 내 ‘산왕공고’의 모티브가 된 실제 학교) 농구부의 휠체어 농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재밌게 봤어요. 다음에는 휠체어농구 경기를 직접 보러 가고 싶어요.

 

 

 

Q4. 디깅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A. 디깅은 저만의 테라피 루틴(therapy routine) 같아요. 좋아했던 것, 좋아하는 것, 좋아할 것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피로가 풀리고 행복해져요. 취향인 것들을 스스로에게 처방하고 꼭꼭 씹어 먹으면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미래가 불투명해 막막할 때면 농구 콘텐츠를 봐요. 어느 쪽이 이길지는 알 수 없지만 농구 선수들은 매번 열과 성을 다해 경기에 임하죠.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덩달아 용기를 얻고 도전할 마음이 생겨요. 슬램덩크가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농구’라는 세계를 알게 되면서, 제 삶의 책임감도 키울 수 있던 것 같아요.

 

 

“뮤지컬”

 

Q1.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A. 대학에 입학했을 때 코로나19가 유행해 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알바를 해서 꽤 많은 돈을 모았는데 이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되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뮤지컬 <위키드>를 보게 된 뒤 ‘뮤지컬이 주는 감동이 엄청나다’고 느꼈어요. 15만 원이라는 티켓값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죠. 그렇게 한 달에 두세 번씩 보게 됐어요.

 

Q2. 가장 인상깊게 봤던 뮤지컬이 있나요?

 

A. 가장 재밌게 봤던 작품 두 개를 소개할게요. 첫 번째는 <웨딩 플레이어>로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성장해 나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예요. 대학교 1학년 때 이 작품을 처음 봤어요. 작품을 보면서, 무대에 오르고 싶었지만 학업 때문에 포기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주인공을 보고 다시 꿈에 도전할 용기를 얻어 대학생 극단에 들어갔죠. 직접 무대에 선 짜릿했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현실에 부딪혀 꿈을 이룰 수 없던 어린 나를 위로하고 안아줄 수 있는 건 현재의 나 자신임을 깨달았어요.

두 번째는 <유진과 유진>이예요. 이 뮤지컬은 친구 관계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관계도 다룬 작품이에요. 이 작품만 2달 동안 15번을 봤네요. (웃음) 처음에는 친구랑 함께 봤는데, 가족 이야기가 나오니 처음으로 부모님과 함께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부모님과 재관람을 했죠. <유진과 유진>은 여러모로 제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 준 작품이에요.

 

Q3. ‘나 이런 것까지 해봤다’라고 할 수 있는 뮤지컬 관련 이색 경험이 있나요?

 

A.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본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금까지 총 10번이나 감상했어요. 작품이 주는 메시지와 배우들의 시너지가 흥미로워 관람할 때마다 감상평을 썼더니 A4용지로 45장이라는 분량이 나왔죠. 문서를 정리해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뮤지컬 관련 잡지사에서 소식지를 함께 쓰자는 제의를 받아 1년 동안 활동하기도 했어요.

또 <위키드>는 총 세 번 밖에 못 봐서 너무 아쉬운 마음에 부산까지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공연 다음 날 서울에서 아침 9시에 일정이 있었는데, 뮤지컬 관람 후 새벽 6시 비행기를 타고 올라온 경험이 기억에 남아요.

 

Q4. 디깅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A. 뮤지컬은 고민이 많던 진로 방향을 확고하게 만들어 줬어요. 앞서 말한 <웨딩 플레이어>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이 뮤지컬이 너무 좋은 작품인 걸 알기에 어떻게든 홍보하고 싶었죠. 제가 공연계 기자가 되면 작품을 공식적으로 홍보할 수 있더라고요. 이를 계기로 문화부 기자라는 꿈을 갖게 됐어요.

 

 

“캐릭터”

 

Q1. 캐릭터 물품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A. 고등학생 때 취미로 학용품을 샀던 것에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귀여운 샤프를 찾아보다가 ‘산리오’의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보고 푹 빠지게 됐죠. 

산리오 캐릭터 중에서는 ‘시나모롤’을 가장 좋아해요. 파란색을 가장 좋아해서 푸른색 캐릭터 시나모롤을 제일 먼저 좋아하게 됐죠. 산리오라는 브랜드 자체를 좋아하게 되면서 선호하지 않는 색깔인 분홍색 캐릭터들도 좋아하게 됐네요. (웃음)

 

Q2. 많은 캐릭터 중 왜 산리오를 디깅하게 됐나요?

 

A. 산리오 캐릭터는 언뜻 보면 단순히 귀여운 캐릭터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표정부터 몸까지 디테일해요. 또 상품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갖죠. 문구류뿐만 아니라 생활용품도 정말 많이 나와요. 실제로 숟가락, 포크, 컵은 물론 심지어 화장대까지 저의 모든 게 산리오 제품이에요. 찾아보면 정말 없는 게 없을 정도죠.

 

 

Q3. 산리오를 좋아하게 된 후 어떤 디깅 소비를 했나요?

 

A. 시나모롤 스티커를 얻으려고 아이스크림을 정말 많이 사 먹었어요. 산리오와 씨유(CU) 편의점이 콜라보를 해서 아이스크림에 스티커가 하나씩 들어있었죠. 평소 커스터드 맛을 좋아하지 않지만, 시나모롤 스티커를 포기할 수 없어서 정말 많이 사 먹었던 기억이 나요. 

 

또 일본에서 구입한 산리오 다이어리를 사용하는데, 한국처럼 요일이 ‘일, 월, 화’ 순이 아니라 일본식 표기인 ‘월, 화, 수’ 순으로 적혀있어요. 기념일도 일본 기념일만 적혀 있어 제가 한국 기념일도 하나하나 적어 놨어요. 이 정도 불편함 쯤이야 감수할 수 있죠. (웃음)

 

Q4. 디깅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고등학생 때는 산리오 학용품을 사면서 간간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그쳤다면, 이젠 제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산리오 제품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캐릭터 굿즈를 살 때 만족감과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산리오 디깅은 단순히 취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 생활의 전부가 된 것 같아요. 어떤 샤프를 살지 찾아본 게 이렇게 ‘산리오 수집가’의 길로 이어지게 됐네요.

 


 

취향 및 덕질에 대한 관심은 항상 존재해 왔지만, 최근 들어 ‘디깅러’와 ‘디깅 소비’가 유독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소비를 아끼지 않는 MZ세대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SNS가 발달함에 따라 디깅 역시 온라인 상의 과시와 공유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소통과 공유에 중점을 두는 ‘디깅러’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인터뷰이들처럼 ‘디깅 소비’는 관심 영역에 깊이 파고들며 자기 성장을 이뤄내고,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각자 좋아하는 것을 찾고 몰입하는 시간을 가지며 '디깅러'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김서진 기자(seojin1122@naver.com) 

안윤지 기자(julie6415@naver.com) 

 

*해당 기사는 외대알리 지면 38호: '청년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은'에 실린 기사로, 2023년 7월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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