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4년 3월에 발행한 회대알리 18호 지면에 수록한 기사입니다.
가파른 비탈길 사이로 주택들이 뒤섞여 있다. 복잡하게 얽혀 늘어진 전깃줄도 눈에 들어온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람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다. 하지만 이 고요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곳은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 중심1구역(가리봉동 115일대, 이하 1구역) 신속통합기획 대상지 일대이다.
착공을 몇 년 내로 앞두고 있는 이곳은 소위 ‘벌집촌’이 있는 곳이다. 착공 전 원주민들은 이주 철거 작업을 거치며 다른 곳으로 흩어진다. 벌집은 도시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나타난 주택 유형으로, 층별로 방을 수십 개로 쪼개 놓은 것이 특징이다. 말 그대로 ‘벌집’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벌집이 없어질 상황에 처했다.
재개발로 벌집촌은 화려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한다. 그러나 재개발은 문장 한 줄로 끝나지 않는다. 이 소식에 환호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 재개발로 가는 길을 거슬러 벌집촌으로 향했다.
가리봉동 재개발 돌아보기
이 구역은 균형발전촉진지구라는 이름으로 2003년부터 뉴타운 사업이 추진된 곳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로 재개발 사업은 다년간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2014년에 지구가 해제되었고, 도시재생활성화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시간이 흘러 2020년에 재개발을 재추진하고자 하는 주민들이 모였다. 이렇게 모인 소유주들은 2021년에 서울시가 내놓은 정비사업 중 하나인 신속통합기획 후보지 공모에 신청했다. 1차 시도는 실패했지만 2022년 말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두 번의 시도 끝에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
지난 1월 8일에는 구로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신속통합기획안 주민 의견 수렴을 위한 주민설명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시는 정비계획 수립단계에서 주민 의견을 반영하여 신속통합기획안을 확정하게 된다. 오현석 가리봉 중심1구역 재개발 추진준비위원장은 주민설명회가 개최되고 이틀 뒤인 10일 회대알리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구역 지정을 하기 위한 단계”라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구정 전후로 신속통합기획안을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리봉 중심1구역 인근 가리봉 2구역은(가리봉동 87-177일대, 이하 2구역) 1구역보다 먼저 신속통합기획안을 확정했다. 2구역은 1구역과 마찬가지로 2014년에 지구가 해제되며 도시재생활성화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시는 지난 6월 ‘가리봉동 87-177일대 재개발 신속통합기획 확정’ 보도자료를 내었다. “노후화된 벌집 밀집지역인 가리봉동 일대가 서남권 광역 일자리의 중심인 G밸리(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직주근접 배후 주거단지로 변모”한다는 게 핵심이다. 대상지가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 사이에 위치한 점을 고려해 단절된 두 개의 산업단지를 서로 연결할 수 있는 열린 단지를 조성하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1월 25일, 시는 1구역 신속통합기획안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가리봉동 115번지 일대는 2,200세대 내외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며 지난해 6월 확정된 1구역과 함께 G밸리의 직주근접 배후 주거단지로 변화한다. 가리봉 중심1구역 재개발 추진위원회 소식지 제2호에 따르면, 1구역 재개발 사업은 4월까지 구역지정을 위한 동의서 징구를 실행하게 된다.
구로공단에서 G밸리(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재개발 대상지를 비롯한 가리봉동 일대는 낙후된 주거 환경으로 인해 재개발이 그간 가리봉동의 주요 현안이었다. 여기서 ‘낙후된 주거환경’은 벌집, 즉 벌집촌을 내포한다. 가리봉동에 벌집촌이 형성된 계기는 우리나라 산업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구로공단의 공식 명칭인 한국 수출국가산업단지는 1964년 수출산업단지개발조성법에 의해 총 3단지로 조성되었다. 1단지는 구로구 구로동에, 2단지와 3단지는 금천구 가산동에 있다.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각각 북과 남에 위치한 구로공단은 1960년대 한국 수출을 책임지던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산업단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마이뉴스는 2008년 4월 5일 자 기사에서 “전성기였던 1986~88년엔 전체 고용 규모가 11만여 명이 넘었고,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10%가량 됐다”고 당시 구로공단이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노동운동 역사의 시작도 구로공단과 관련이 있다. 대학생들은 구로공단에 취업하여 노동자와 연대를 구축했다. 과거 가리봉 오거리라고 불렸던 디지털단지 오거리는 노학연대를 상징하는 투쟁의 장소였으며 1985년 구로 지역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 지지 동맹파업, 즉 구로동맹파업이 발생했던 장소였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구로공단은 1980년대 말 이후 90년대 급격한 침체기를 겪고, 열악한 산업시설과 주거 환경, 노동자 탄압 등의 어둠을 머금은 채 90년대 말 IMF를 지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경험이 구로공단 산업구조의 변화로 이어졌다. 6, 70년대에는 섬유, 의류, 봉제 등의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이었던 구로공단이 90년대 말 한국산업단지공단 설립 및 아파트형공장 대량 공급으로 산업 성격의 변화가 일면서 2000년대부터 IT 제조, 소프트웨어, 유통, 서비스업 등 첨단정보 지식산업 중심으로 재편됐다. 산업구조 재편에 맞춰 명칭 역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산업구조와 명칭만 바뀐 것은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가리봉동은 북으로 구로공단 1단지와 남으로 구로공단 2, 3단지 사이에 위치한다. 구로공단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밀집 주거지가 가리봉동인 것이다. 1970년대 노동자들의 숙소로 우후죽순 생긴 주택이 벌집이다. 구로공단과 별개로, 도시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나타난 벌집의 임대 수요층도 바뀌었다.
역사와 마주하는 벌집
벌집이 만들어진 주요 원인은 가리봉동의 위치적 특성과 가혹한 노동시간이다. 당시 12시간 내외의 장시간 근무와 2~3교대가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였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늦은 새벽에 퇴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노동자 중 어린 여성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1977년 10월 18일 자 기사에서 “전체 노동자 중 20세 이하 어린 여공이 35%, 25세 이하 여공이 60%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이런 환경과 더불어 가리봉동이 구로공단 1단지와 구로공단 2, 3단지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을 헤아려보면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리봉동의 B부동산중개업소 대표는 벌집의 형성 과정을 묻자 “당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에 다가구를 지을 때 방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임대를 많이 내놓을 수 있도록 지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방을 많이 만드는 대신 화장실은 외부에 설치하여 공용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했다”며 벌집 구조를 설명하기도 했다.
가리봉동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숙소로, 현재는 재중 동포(조선족)의 터전으로 변모했다. 벌집의 임대 수요층이 바뀐 것이다. 재중 동포는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한국 입국을 시작하여 2000년대부터 서서히 증가하다, 2007년 방문취업제 도입과 함께 급격히 늘어났다. 재중 동포는 주로 구로, 금천, 영등포구에 몰려 산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가리봉동은 ‘조선족 타운’이라고 불릴 만큼 재중 동포의 수가 많다. 2012년 서울시 주민등록 인구를 기준으로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재중 동포 수는 6,111명이며 이는 가리봉동 전체 인구 대비 30.02%에 해당한다.
오 추진준비위원장은 가리봉동에 재중 동포가 많은 이유를 설명했다. “남구로역에 큰 인력시장이 있어요. 인력시장이 있는 가리봉동에 최대한 저렴한 숙소를 구해야 하는데 쪽방이 고시원보다 싸거든요. 그래서 벌집에서 지내시는 거예요.”
가리봉동은 재개발 구역이다.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가리봉동에 벌집촌이 형성되었다. 작가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인 <외딴 방>에서 작가는 그녀가 사는 곳인 벌집을 37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은 곳이라고 설명한다. ‘37’이라는 숫자는 벌집의 극악한 주거 수준을 절감하게 한다. 회대알리는 가리봉 일대를 취재해 벌집촌 실태를 살펴봤다.
여전히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숙소
오후 3시 08분, 가리봉 시장 앞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 출구로 나오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보였다.
오르막길이 끝나자마자 보이는 건물을 보고 벌집촌이 시작됐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흔한 다가구주택이다. 그러나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건물 측면에 계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중앙에 계단이 있었다. 정중앙에 배치한 계단은 목적이 분명해 보여 ‘여러 명이 공용으로 계단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일까?’ 짐작했다.
걸어온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었다.
월세방을 팔기 위한 홍보물이 전봇대와 건물 외벽 곳곳에 부착되어 있었다. ‘월세방’이라는 크고 분명한 글자 하단엔 보증금과 월 차임 비용, 개인 전화번호가 기입되어 있었다. 화장실, 주방과 같은 시설이나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과 같은 생활필수품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해당 정보도 함께 기입되어 있다. 포함되지 않을 경우 공용 시설을 이용하거나 따로 장만해야 한다.
30분간 돌아다니면서 열 개에 가까운 홍보물을 볼 수 있었다. 보증금은 50만 혹은 100만 원 정도였다. 월 차임은 20만 원에서 40만 원까지 형성되었으나 20만 원 대가 대부분이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골목 곳곳을 다니며 여러 벌집을 보았다.
벌집은 주로 2~3층 높이의 다가구주택 모습을 하고 있었다. 층마다 통로를 따라 적게는 3개, 많게는 5개씩 방이 이어졌다. 지상은 물론 지하에도 방들이 늘어서 있고, 터널처럼 매우 좁고 어두운 통로 입구만 보이는 곳도 있었기에 보다 많은 사실을 목도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다시 가리봉시장 출구 앞 오르막길로 향했다.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사진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서 평지에 다다르자 우측에 작은 슈퍼가 보였다. 모퉁이 슈퍼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더 좁은 골목을 볼 수 있었다.
딱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이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제는 뚜렷했다. 회대알리는 벌집촌의 문제를 ▲험준한 비탈길 ▲열악한 주거 환경(벌집) ▲매우 좁은 길로 정리했다.
가파른 경사는 숙달된 차량 운전자도 다닐 엄두를 내기 힘들 정도였다. 발목이 꺾일 정도의 비탈길은 노약자 등 이동이 조심스러운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다. 눈이나 비가 오면 위험은 배로 커진다.
2~3층의 주택에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벌집의 구조를 고려하면, 편의시설은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 추진준비위원장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과 작은 책상 하나 들여놓을 수 있는 정도”라며 방의 크기를 설명했다.
매우 좁은 길은 통행에 제약이 있어 문제를 불러들인다. 오 추진준비위원장은 화재 상황을 예로 들어 문제를 설명했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길에 불이 나면 소방차가 당연히 들어가지 못해요. 벌집촌은 좁고 굽은 길이 많아 대피하기도 힘들어요. 그러면 초기 진압이 어려워 인명 피해는 더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소방차가 드나들 수 있는 폭은 4미터다. 그러나 벌집촌에는 4미터가 채 안되는 도로에 접한 주택이 많았다.
'재개발'로 끝나지 않은 숙제
1구역의 신속통합기획안이 최근에 확정됐다. ‘G밸리 배후 주거단지로의 변화’가 두 기획안의 주요 골자다. 재개발은 주민들 의지에 힘입어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의 주거 문화에서 ‘아파트’는 대표적이며, 한국 아파트의 역사는 전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특수성을 가진다. 한국 재개발의 진화 과정은 이러한 진실에 기인하기도 한다. 주거 시설을 허물고 대단지 아파트를 세우는 한국 재개발의 흐름 속 가리봉동 재개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
오 추진준비위원장은 거주하는 곳이 낙후되어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는 말이 주변 주민들 사이에서 오갔고, 그렇게 인원이 모여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에 조미혜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교수는 회대알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 시각으로만 이 문제를 대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상권 발달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기 전에 ‘다각도’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미혜 교수는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도시 기반 시설을 만들기 위해선 전면 재개발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상권을 살리기 위해 대형 복합물을 만들어 사람들이 오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이게 도시를 위한 좋은 대안이냐”고 되물었다. 이어 “뭐가 ‘좋다’ ‘나쁘다’, ‘어때야 한다’라는 판단을 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다양한 각도로 살펴봐야 한다”며 “’뭐부터 생각해야 할지’를 고려하는 것이 대안의 첫 출발”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도시 내 주택 유형이 획일화됨을 우려하여, 다양한 주택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련 전문가들이 있다. 도시 내 주택 다양성에 대한 의견을 묻자 조미혜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당연히 도시 내에 다양한 주택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다양한 직업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들이 거주할 공간 역시 도시 내에 있어야 하는데 도시는 다양한 주택을 주지 못한다.” 조미혜 교수는 도시 혹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선 이 문제를 지나칠 수 없고, 그러기 위해 “임대주택과 같은 다양한 주택 유형을 생각해야 한다”며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발달을 가져온 노동자의 희생과 더불어 가리봉동의 역사가 지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이 문제에 조미혜 교수는 ‘공론’이 이루어져야 함을 거듭 강조했다. “역사적 증거를 남기고 기억하기 위해 박물관 같은 공간을 만들곤 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나 시의 판단에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의사 결정 방식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역사나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세금 문제 등 당위로서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실행하는 것 사이에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좀 더 복잡하게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는 뜻이다. 이어 조미혜 교수는 주민의 동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경제, 시민사회, 행정 등 모든 것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주민들은 각자의 처지가 있고 원하는 게 다 다르다. 결국 강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를 하고 모든 문제를 끄집어내서 합의에 따라 결정할 수밖에 없다.”
깔끔함과 편리함은 도시의 모두가 바라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시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가리봉동 재개발이라는 ‘길’은 막 초입에 들어섰다. 재개발이라는 길 앞에서 도시의 복잡한 면을 외면한 채 깔끔하고 편리한 길을 찾으려 하기보다 가리봉동의 특수성을 되짚어 봐야 한다. 그런 다음, 가리봉동이라는 도시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얘기해야 한다. 도시 역시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사람을 잊은 도시는 존재할 수 없다.
취재, 글, 사진 = 고은수 기자
디자인 = 고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