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우리의 두 선배들은 팍팍하고, 생각보다 평범한 신입사원 생활을 털어놓았다. 이번 호에는 어떤 이야기를 보내왔을까.
솔직한 두 남자의 ‘신입사원 퇴근일지’.
* ‘신입사원 퇴근일지’는 실제 우리학교를 졸업한 선배님들이 솔직담백하게 작성한 일기로, 한 달에 한번 <외대알리>에서 연재됩니다. 사기업 마케팅부서와 언론계에 입사한 선배님이 각각 이야기를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지난호 퇴근일지를 보고 싶은 독자님은 hufsalli@gmail.com 으로 문의바랍니다.
권혁일(언론정보 07)
: 2013년 10월 1일 호남지역 모 일간지에 수습기자로 입사
12월 8일
48번째 퇴근.
토요일(12월 7일)에 취재 두 건이 잡혔었다. 하나는 아침에 연탄배달봉사 행사 사진을 찍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쪽 지역에 유명한 야구선수가 방문한다고 해서 그걸 취재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나는 귀중한 휴일의 세 시간을 회사에 바쳤다. 그리고 오늘 출근해서는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썼고, 찍은 사진들을 정리해 올렸다.
하루에 단순 사건 스트레이트 기사를 적게는 서너 개, 많으면 열 개씩 쓰고 있다.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경찰 일일보고를 바탕으로 담당 경찰관에게 경위를 묻고 기사를 써내는 데까지 건당 30분도 안 걸리게 됐다. 단순 사건 스트레이트는 그냥 말 그대로 단순한 것이라, 미리 짜여진 리드-보충-보충2의 3단 구성에 사건마다의 팩트를 빈칸채우기 하듯 집어넣으면 작성이 끝난다.
하지만 쓸 때마다, 이 기사는 대체 왜 써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솔직히 그런 자잘하고 단편적인 사건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그 단순해 보이는 사건사고의 집합 속에서 심층적인 의미를 뽑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의미를 찾아내고 원인을 분석하는 등의 후속조치가 따르지 않고 무작정, 일회용으로 찍어내는 식이라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단순사건사고 스트레이트 기사의 대부분은 대개 사회부의 가장 막내에게 맡겨진다. 그러니까 수습기자. 취재를 하기도, 기사를 쓰기도 쉬우니 '트레이닝'을 시킨다는 명분이 붙어있다. 확실히 스트레이트 문체를 반복해서 쓰다 보면 그게 손에 익고, 또 단순한 기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팩트의 중요성이 높으니 육하원칙에 입각해 질문하는 게 익숙해지는 효과는 있다. 일단은 그렇다.
하지만 그건 ‘기술’에 불과하다. 나는 아직 인권보도준칙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고, 써도 되는 기사와 써서는 안 되는 기사에 대해 설명 받지 못했다. 마와리를 돌고 스트레이트를 쓰는 것 말고는 ‘트레이닝’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신문사 내에 보도윤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게는 그런 게 전혀 공유되고 있지 않다.
최대한 신중하게 진실에 접근하려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배웠는데, 단순한 사건사고 하나하나에 단독이네, 물먹었네, 이러면서 긴장해야 하는 걸 보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다. 긴장해야 할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
* 참고(2014년 6월 25일 작성됨): 최근 미국에서 스탯 몽키라는 알고리즘이 개발됐는데, 이 프로그램은 지역 야구 경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단어를 조합해 스트레이트 기사를 자동으로 작성한다. 머지않아 단순 스트레이트 기사 작성은 이와 같은 알고리즘에 맡겨질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관련 내용 출처: 강정수, “로봇 저널리즘 (상): 로봇은 지식을 생산할 수 있을까”)
Soorm(29)
: 2014년 4월 21일 S모기업 마케팅부 정식사원 입사
6월 2일
31번째 퇴근.
6월의 첫 날이다. 날씨도 화창하고, 월드컵도 2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5월에 이어 또 한 번의 황금연휴가 있다. 세계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외계인의 침공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6월 이지만 우리 사무실 분위기는 그리 안녕하지 못하다. 5월까지의 실적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뭐, 우리가 잘못한 건 아니다. 시장이 작년에 비해 많이 위축된 탓이긴 하지만 비상이라면 비상인 상황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 사업부는 오늘 아침 산행을 했다. 일종의 반성회이자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그런 자리라고 했다.
사실 나는 어떤 논리에서 실적이 좋지 않으니 산행을 하게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마치 ‘이번 월드컵 국가대표의 경기력이 좋지 않으니 선수들은 짬뽕 대신 짜장면을 먹는다’ 정도의 터무니없는 논리로 느껴졌다. 산행을 하면 못 벌던 돈을 벌어올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물음에 과장님은 ‘대표로부터 한 소리 듣기 전에 우리 이렇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는 제스쳐를 보여주는거지’하면서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참 회사란 곳이 때로는 빈틈이 없는 곳이구나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오늘만큼은 참 회사라는 곳도 미신적이고 무식한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6월 9일
35번째 퇴근.
또 한 번의 황금연휴가 끝났다. 이제 휴일은 몇 달간 없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휴일이 있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올해처럼 한 달에 몰려서 푹 쉬는 게 좋은지, 아직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해보지 못해서 판단하기가 힘들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일하기가 싫다. 정말로. 과 후배에게서 문자 연락이 왔다. '회사는 어때요?' 짧게 '재미없다' 네 글자만 찍어 답장을 했더니 '형은 왠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할 것 같아요'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왜 내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할 것 같다고 상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런 회사는 없어'라고 짐짓 회사생활을 몇 년 한 사람 같은 어투로 답장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보내온 답장 '구글은 왠지 크리에이티브 할 것 같아요' 이 문자에 답장을 보내진 않았지만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자료를 취합하고 보고서를 쓰고 결재를 받고 하는 우리 같은 사무직들은 구글이 아니라 천국에서 일을 한다한들(구원자 명부 관리직이나 범죄 추심팀 같은 직군으로!) 여전히 월요일에는 출근하기가 싫을 것이라고.
6월 12일
38번째 퇴근.
우리 막내 대리님이 곧 회사를 그만 두신다.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더 좋은 조건에 이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팀 내에서는 나와 나이차도 제일 적게 나고 여러모로 맞는 부분도 있어서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편이라 아쉽기도 하고 더 좋은 조건으로 가신다기에 좋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요즘 건강이 좀 안 좋아서 술은 좀 그렇고 커피나 한 잔 하자면서 둘이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 번이나 강조했던 건 '하고 싶은 거 해'라는 말이었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밝히긴 힘들지만, 벌써부터 매너리즘에 빠져 들어가려는 나에게 대리님은 하고 싶은걸 분명하게 설정하고 거기에 맞게 현재를 조금씩 수정하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책이나, 텔레비전이나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이런저런 힘든 상황을 겪고도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한 단계 도약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하고 싶은 거 해' 하는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돈다. 하고 싶은걸 하려면 일단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알아야 할 텐데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분명히 지금처럼 상무님이 쓴 경비처리나 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6월 18일
42번째 퇴근.
오늘은 러시아와의 월드컵 조별 예선 첫 경기가 있는 날. 상무님이 아침 일곱시에 회사 휴게실에서 경기를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은 같이 보자고 하셨다. 그 말인즉슨 나는 같이 경기를 보고싶든 보고싶지 않든 혹은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든(사실은 아주 많다) 여섯시 반에는 출근해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TV를 세팅하고 하는 등의 일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다. 버스를 타고 영동대교를 건너고 영동대로를 지나간다. 영동대로 한켠에는 거리 응원이 준비되어 있다. 가수 싸이가 온 모양이다.
아침 여섯시라기에는 지나치게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열광한다. 평일 아침 시간에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싶어서 나는 내심 놀란다. 신기한 일이다. 내가 1년 정도 백수 노릇을 할 때는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출근을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 내가 출근을 하니 출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저 사람들은 대체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작년 한 해가 그 때만큼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