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綠池). '푸른 연못'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대학 최초 여성주의 교지의 이름이다.
중앙대학교(이하 중앙대) 학생들로 이뤄진 녹지는 학내 젠더폭력부터 사회 젠더 이슈까지 여성주의 의제에 대한 글을 담은 잡지를 연 2회 발행한다. 1967년 첫 발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대학 내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단체인 총여학생회의 탄생이 1980년대인 점을 고려하면, 녹지는 여성운동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학내 페미니즘 공론장 내 한 줄기 빛
지난 2021년 중앙대 총학생회는 산하 조직인 성평등위원회(이하 성평위)를 폐지했다.
성평위는 총여학생회의 부재를 대신해 성평등·반성폭력 문화 확산을 위해 설립된 단체다.
이들이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특정 성별만 생각하는 편향된 방향성을 갖고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폐지의 이유였다. 결국 중앙대에선 젠더 문제에 대한 학우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졌다. 이들의 의견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창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녹지는 그 적막 속에서도 끊임없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말하려 노력했다. 성평위가 폐지된 해에 발간된 55번째 가을호 녹지에는 '대학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중앙대학교 학부생과 졸업생의 학내 여성혐오·성차별 경험을 정리한 글이 실렸다. 학생들은 녹지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녹지가 펼친 이야기의 장은 편집위원 민아(24)씨가 2022년 2학기부터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상대방이 내 생각과 대치되는 의견을 말하면 (상대방을) 피하기 일쑤인데, 녹지에서는 더 명료한 글을 쓴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에서 자유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어 좋아요." 여성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팽배한 학내에서 녹지는 편안하게 페미니즘을 논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녹지는 글을 통해 학내 공론장을 주기적으로 활성화한다. 봄호, 가을호 발간이 끝날 때마다 여는 독자 간담회가 그 예이다. 간담회에서는 교지에 실린 글을 필자와 독자가 함께 읽고, 각자의 의문점을 묻고 답한다. 4시간이 넘도록 열띤 대화가 오가는 공론장의 탄생은 녹지가 창간됐던 당시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더 많았던 학교의 상황과도 맞닿는다. "남성 중심적 문화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집중적으로 담자는 취지로 (녹지가) 만들어진 거니까 독자 간담회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녹지를 매개로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도 덧붙였다.
연대, 녹지가 사회와 발맞추는 방법
녹지의 역할은 학교 내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덕여대의 남녀 공학 전환 반대 집회부터 윤석열OUT성차별OUT페미니스트(이하 윤OUT 페미들) 집회까지, 여성운동가들이 모인 곳에 녹지도 연대하고 있다. 민아씨는 "여성운동이 바로 성과가 나오기 힘들어서 지치기 쉬운데, 운동하는 사람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힘을 얻는다"며 연대의 이유를 설명했다.
'언론'이라는 정체성에 맞게 연대 활동을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의 이름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는 "최근 탄핵 집회를 통해 2030 여성이 내는 공통된 목소리가 주목을 받는 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이유는 '자부심'
1967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녹지지만 '사라지면 어떡하지'라는 고민도 현재진행형이다. 학생들의 무관심 때문이다. "가끔 녹지를 잘 읽고 있다는 분들이 메일을 보내주실 때가 있는데, 대부분 대학원생이에요. 녹지를 아는 사람들이 점점 졸업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죠."
학내 여성운동도 전반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지난해 중앙대 여성주의 단체 6곳이 모여 만든 '중앙대학교 페미니스트 연합'이 해체됐다. 2022년부터 단체가 하나둘씩 사라지며 녹지를 포함해 2곳만 남았기 때문이다.
'해체 위기'를 상시적으로 고민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아씨가 꾸준히 활동하는 이유는 '자부심'이다. 그는 "지금까지 발간된 녹지를 하나씩 읽다보면 '나도 이들처럼 여성주의 운동의 역사를 이어가는 데 기여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에게도 어떤 투쟁의 역사가 있었는지 알려줘야겠다는 사명감도 생긴다"고 강조했다.
녹지는 올해도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3월에도 새로운 녹지를 발간할 예정이에요. 여성 인권 측면에서 앞으로 어떤 것들이 바뀌어야 할 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어요." 녹지의 연못에는 아직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안겸비 기자(gyeombi11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