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가 주류 데이터만 학습해 문화적 획일화를 강화한다는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정부가 향후 4년의 문화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최근 「제2차 문화다양성 보호 및 증진 기본계획(2025~2028)」을 발표했다. 문화다양성을 단순한 ‘이주민 포용’의 범주를 넘어 국가 지속가능성과 AI 시대의 문화 주권을 지키기 위한 핵심 가치로 규정한 것이 골자다. 특히 정부가 공식 문서에서 AI 알고리즘에 따른 문화 편향 위험을 명확히 인정하고 대응책을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AI 편향 대응이 첫머리에… “데이터 주권 확보가 곧 문화 권력”
이번 계획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디지털 환경에 대한 대응이다. 정부는 AI와 플랫폼이 특정 문화나 집단 중심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면, 편견이 재생산되고 다양한 목소리가 배제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한국형 소버린 AI(Sovereign AI)’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고유한 디지털 문화 자원 구축에 나선다. 전통 건축, 문양, 의복, 국악 등 한국적 맥락을 담은 데이터를 확보해 국내 AI 모델이 보다 다층적인 한국 문화를 학습하도록 지원하겠다는 구상이다.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 등 국산 AI 모델에도 직접적 영향을 줄 전망이다.
또한 알고리즘 추천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정보통신망법 개정도 추진된다. 이는 사용자 선택권을 보장하고, 추천 서비스로 인한 확증 편향을 완화하려는 목적이다. ‘문화다양성’이 기술 종속을 막는 일종의 문화안보 개념으로 확장된 셈이다.
지역 소멸 대응은 ‘고유성’에서 찾는다
저출생과 청년 인구 유출로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 소멸 위기 속에서, 정부는 지역 고유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다양성 거점도시’ 전략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반복적인 지역 축제나 천편일률적 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각 지역만의 서사를 발굴해 지역 생태계를 살린다는 목표다.
2025년 시범 지역의 주제 역시 각 지역의 현실을 반영해 선정됐다. 충북은 내륙 지역 특성과 이주민 증가를 반영한 ‘디아스포라(이주)’, 전남은 풍부한 자연환경을 살린 ‘생태다양성’, 부산은 고령화·장애 접근성 문제를 반영한 ‘세대·장애’를 중심 과제로 삼았다.
지역어(사투리) 보존 정책도 강화된다. 유네스코가 이미 제주어를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한 만큼, 정부는 지역어 조사 범위를 넓히고 이를 AI 학습용 말뭉치로 구축해 디지털 시대에도 지역 언어가 사라지지 않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종(種) 다양성’ 넘어선다... 인디·독립문화 지원 확대
대규모 자본 중심의 주류 문화 뒤로 밀려난 인디·독립문화에 대한 지원도 본격화된다. 정부는 건강한 문화 생태계를 위해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문화예술 종 다양성’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독립예술영화의 상영 기회를 넓히기 위해 멀티플렉스 내 지원 제도를 신설하고, 인디게임 기획·제작 및 해외 진출 지원도 확대한다.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위한 ‘모두예술극장’과 시각예술 공간 ‘모두미술공간’ 운영을 통해 접근성과 창작 기반을 강화하는 정책도 포함됐다.
예산은 줄고 계획은 늘고… “실행력이 관건”
이번 기본계획은 AI 시대, 지역 불균형, 인구 구조 변화 등 거대한 흐름을 문화 정책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예산이 문제다. 2021~2024년 중앙부처의 문화다양성 관련 예산은 연평균 4% 이상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AI 데이터 구축과 지역 거점 도시 조성은 대규모 재정 투입이 필수적이어서, 예산 확보 없이는 계획이 선언적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간 영역의 참여가 낮은 점도 과제다. 국내 기업의 문화다양성 종합 점수는 42.5점으로 외국계 기업(51.5점)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정부는 ESG 경영과 연계해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기업이 움직일 만한 유인책은 충분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문화다양성은 더 이상 ‘도덕적 가치’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AI 시대의 문화 주권을 지키고, 소멸 위기에 놓인 지역을 되살리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정부가 제시한 4년의 청사진이 실질적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재정 계획과 민간 협력을 이끌 실행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문화다양성 실현의 타임라인을 한눈에, 4년의 로드맵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제2차 문화다양성 보호 및 증진 기본계획」은 2025년부터 2028년까지 4년간 추진될 정책 로드맵이다. 계획은 사회 통합, 문화 자산 확충, 생태계 조성의 3대 전략 아래 세부 과제를 단계적으로 배치했다.
2025년에는 문화다양성 거점도시 시범 운영, APEC ‘문화산업고위급대화’ 개최, 인디게임 지원 확대 등 기반 구축에 집중한다. 202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와 무형유산 국제화 사업 등 대외 확산이 본격화된다. 2027년에는 국가보고서 제출 등 성과 점검이 이뤄지며, 2028년에는 계획 종료와 함께 종합 평가가 진행된다.
이 밖에도 문화다양성 실태조사(2년 주기), 국회 보고(매년 8월), 국제 신탁기금 공여 등을 전 기간에 걸쳐 지속 추진될 핵심 과제로 언급했다.
자본 중심의 흐름에서 벗어난 건강한 문화 생태계는 앞으로 청년 세대가 이어받아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 이번 계획이 예산 제약 속에서도 실효성을 확보해, 대학가와 청년 창작자들의 숨통을 틔우는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이루원 기자 (cruwxn1@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