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대학알리

박성빈의 시선

구의역에서

 
 2020년 8월 6일 구의역

 

 

 당신은 2016년 5월 28일 구의역에서 죽었습니다. 당신의 생일 전날 이었습니다. 당신이 죽은 시간은 5시55분입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고 시민들이 귀가할 무렵이었습니다. 당신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도중에 정차하는 지하철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죽고 당신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작업복엔 검댕이 묻어 있었습니다. 지우려 시도하면 더 번지는 얼룩이었습니다. 당신은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가방 안엔 공구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기름때 냄새가 날카로웠습니다. 포장을 뜯지 않은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나무젓가락과 수저가 기름 때 묻은 스패너와 같이 굴러다녔습니다.

 

 당신이 수행하던 노동의 모습이 환기됐습니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10분 안에 수리해야 패널티가 부과되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1시간 내로 고장에 대응해야 한다는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급여를 삭감하며 이를 지키도록 종용했습니다. 안전한 현장을 이룩하기 위한 매뉴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해당 스크린도어 수리를 완료하면 바로 을지로 3가 역에 가야 했습니다. 당신은 급여를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흔적을 보며 울었습니다. 당신이 소화하던 일정을 보며 분노했습니다. 당신은 스무 살이었습니다. 당신의 가방이 당신이 겪었던 노동의 모양을 짐작케 했습니다. 공구와 컵라면과 스테인리스 수저를 같은 곳에 보관해야 하는 노동을 보통의 “노동”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겁니다. 밥 먹는 시간도 할애되지 않는 노동은 노동이 아닙니다. 당신이 수행하던 노동은 “고되고 촉박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은 노동이라는 명목으로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분노는 죽음의 책임을 명확히 따져야 한다는 여론으로 표현됐습니다. 스무 살 청년의 삶을 고되고 촉박하게 한 주체가 있을 거라는 식이었습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을 가려내야 한다고 목소리가 끓었습니다. “메피아”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당신이 죽고 나흘 뒤 였습니다.

 

 “메피아”는 서울시 지하철 1~4호선을 관리하는 “서울메트로”와 범죄조직을 뜻하는 “마피아”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서울메트로의 고위 인사들이 당신이 근무했던 은성 PSD의 간부로 채용됐다는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채용과정에서 별도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그들이 “메피아”였습니다. 2인 1조의 안전 절차가 작동하지 않은 이유도, 당신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이유도, 당신이 죽은 이유도 “메피아” 탓이었습니다. 당신 같은 비정규직 인원들이 최저시급을 받으며 착취당할 때 “메피아”들은 당신의 월급 두 배를 받으며 노동 현장을 방치했습니다. 간부 인력을 축소하여 그 비용으로 안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판국에 그들은 자기 몫을 보존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쥐어짰습니다. 메피아는 죽음의 원인이며 악행의 주체였습니다.

 

 과거에도 당신 같은 죽음이 있었음이 확인됐습니다. 목소리는 더 끓었습니다. 2013년 성수역에서, 2015년 강남역에서 비정규직 수리 기사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정차하는 지하철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메피아”는 청산돼야 할 절대 악으로 규정됐습니다.

 

 당신 개인의 과실이라며 선을 그었던 서울메트로는 말을 바꿔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메피아들은 해고됐습니다. 당신의 죽음에 책임을 가진 이들이 물러나는 수순을 지켜보며 우리는 안도했습니다. 정의가 구현되는 양상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분노는 끓어오르는 증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금방 식기 마련입니다. 당신 죽음의 구조적 인과를 파악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책임 있는 이들이 해고당한 이후 발화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는 당신의 죽음 이후 노동조건을 개선하려 시도했습니다. “위험의 외주화”를 제거해야한다는 주장에 동조한 결과였습니다. 비정규직이 감수하는 열악한 환경이 당신 죽음에 일조한 것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서울시장은 당신이 죽은 다음 달 “안전 업무직을 정규직 수준의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연봉은 3300만원 수준으로 설계하겠다고”고 말했습니다.

 

 실상은 달랐습니다. 여전히 ‘정규직 수준’에 미달되는 기준이었습니다. 인사 규정, 취업 규칙 등이 모두 정규직과 달랐습니다. 3300만원이란 연봉은 모든 수당을 포함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상여금과 수당이 명세서에 찍힌 달에 받을 수 있는 월급은 160만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없는 달엔 140만원이 급여로 책정됐습니다. ‘정규직 수준’일 뿐 정규직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해인 2017년 7월 서울시장은 서울시 공공부문 무기계약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청와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을 국정과제로 거론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부당한 노동이 개인의 삶까지도 부당한 조건으로 만드는 광경을 더 이상 묵인할 수 없다는 의식의 발로였을까요. 당신의 동료들은 희망에 차올랐습니다. 세상이 베푼 아량이 신기했습니다.

 

 9월부터 교통공사에서 정규직 전환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무기계약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선발하겠다는 서울시장의 발표와 다르게 사측은 직군, 직종, 직급에 따라 전환 과정을 다르게 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공채를 통해 뽑힌 정규직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없고, 같은 정규직이지만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론도 또 다시 끓었습니다. “무기충”이란 말이 돌았습니다. 당신의 죽음에 분노했던 우리는 당신 동료들에게 “시체팔이를 해서 정규직이 되려 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각박한 경쟁을 통과해야 기어이 진입할 수 있는 대열이 정규직인데 당신의 동료들이 무슨 자격으로 그 대열을 기웃거리냐며 비난을 쏟았습니다.

 

 당신은 잊히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의 죽음이 “시체팔이”란 단어로 대체될 수 있었던 건 구태여 더 이상 당신을 애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겠죠. 아니면 당신의 가족 또는 동료들과 ‘우리’가 정의한 애도의 방식이 달랐던 건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가족과 동료는 당신 같은 죽음이 일어나지 않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애도라고 생각했습니다. 100만원 남짓의 급여를 받고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비정규 노동에 투신한 결과가 당신의 죽음이었기에, 노동자를 노동하는 존엄한 개인으로 간주 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소모하고 대체할 수 있는 비정규 노동자로 치부해서 발생한 일이 당신의 죽음이었기에. 당신은 때때로 빛을 봤고 누군가에게 이름이 호명되며 성장하는 고유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고유함을 알았습니다. 당신 같은 죽음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 그들의 애도는 종료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애도란 슬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슬퍼하는 일이었습니다. 눈물 흘리고 며칠간 묵념하고 나서 자기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애도였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조롱하고 ‘시체’로 불렀습니다.

 

 2018년 9월 법원은 쫓겨났던 “메피아”들의 복직을 명령합니다. 당신 죽음의 주범으로 거론돼 해고했는데 해당 조치가 부당하다는 판결이었습니다.

 

 은성psd는 스크린도어 유지·관리를 전담하는 서울메트로의 외주회사입니다. 우리가 “메피아”라고 지목했던 이들은 서울메트로에서 일하다가 정년을 연장하기 위해 이직한 이들이었습니다. 임금은 서울메트로의 60~80%였지만 고용은 3년 더 보장했기에 서울메트로의 정직원들 중 여럿이 은성psd로 옮겼습니다.

 

 은성psd의 노동조건은 열악했습니다. 가동할 수 있는 인력을 착취하고 비정규직 인원들의 급여를 삭감할 정도로 인건비를 아꼈습니다. “공공기관 경영효율화”가 신앙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추진된 공공기관 경영효율화의 흐름은 인원감축과 외주화를 동반했습니다. 경영효율화란 결국 적자를 메꾸고 재정을 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익창출과 무관한 공공의 영역도 기업과 같은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는 기치였습니다. 은성psd가 설립된 것도 그래서 였습니다. 서울 메트로의 인원 감축 목표치를 위해 스크린도어 업무를 비정규직 하청 인력에게 맡긴 겁니다. 

 

 우리가 “메피아”라고 부르던 이들은 2015년부터 구호를 외쳤습니다. “서울시와 서울메트로는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민간 위탁과 비정규직 양산을 즉시 중단하고...(중략) 스크린도어 외주용역을 즉시 철폐하고 직영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당신이 죽은 건 메피아 탓이 아니었습니다. 메피아 역시 개선이 필요하다고 외쳤지만 시스템은 거기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환경은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신이 죽은 건 구조 탓이었습니다. 인간의 노동을 비용과 수치로만 계량하는 시스템 탓이었습니다. 외주화를 이룩하고 재정 긴축을 위해 비정규직 인원을 착취하는 서울메트로, 나아가 비정규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밖으로 내몰며 기업화니 혁신이니 거창한 문장을 외치는 세력에게 동조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노동함으로써 인간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는 것이 노동이고, 우리는 노동함으로써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집에 있습니다. 노동에서부터 인간의 기본 여건이 마련됩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온당하게 보장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노동이 망가지면 그 여건들 역시 망가집니다. 인간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비정규 노동을 정규 노동으로 전환하는 맥락도 거기에 있습니다. 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섭니다.

 

 우리는 노동에 위계를 매깁니다. 정규직으로의 진입이 어려운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정규직은 어려움을 뚫고 성취해야 하는 것의 일종으로 간주됩니다. 어렵지 않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비정규 노동이기에, 비정규직이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2016년 기준으로 비정규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5.4%입니다. 이 숫자가 축소될 거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온당하게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올해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처럼 죽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4월 29일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노동자 38명이 죽었습니다. 그곳은 2008년 1월 40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망한 노동자들 태반이 일용직이고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시공사에서 하청을 받은 업체들이 일감을 나눠 또 다시 하청을 놓는 구조였습니다.

 

 

지난 6월 20일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서 열린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희생자 합동 영결식

출처 : 연합뉴스

 

 

 우리나라의 산업안전보건법은 노동자 개인의 과실로 산재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거나 산업 재해에 휘말리면 기업의 안전보건 시스템을 따져 노동자를 어떻게 관리했는지 묻는 게 아니라 노동자 개인의 규정위반 행태를 조사합니다. 기업이 안전규정을 지켰는지, 안전 여부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하청 업체를 활용해 산업안전보건법에서 회피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외주를 맡겨서 잘 모른다”며 자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시스템은 있었는데 노동자가 이를 어겼다”고 말합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은 파이를 늘리는 일입니다. 더 많은 이들이 삶의 기본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거나 부당한 처사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예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슷한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에, 부당해고에 맞서는 KTX 승무원과 쌍용차 노조에게 “공정하지 않고 날로 정규직이 되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을 비정규직이라면 으레 겪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타인의 삶과 투쟁을 자기계발과 노력이라는 잣대만으로 해석합니다.

 

또 얼마나 많은 당신이 죽을까요. 왜 우리는 같은 자리를 공전할까요. 왜 우리의 분노는 위로 향하지 못할까요.
 

 

 

참고문헌

조원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3년, 우리가 찾았던 악당>, 한국일보, 19.05.26

선담은, <'무기충'시달리다 정규직된 철도 정비공>, 한겨레, 18.10.30

김완, <'무기계약직' 82년생 김민규씨의 목숨은 누가 앗아갔나>, 한겨레, 17.12.17

전혜원,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시사인, 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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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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