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5 (금)

대학알리

알리가 본 세상

길고양이와 반려, 짐승

1. 우리의 풍경, 집 안

 

나는 이 기사를 쓰면서 한가로이 누워 있는 고양이를 본다. 마찬가지로 고양이도 나를 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고양이(이하 C)는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착각했지만, 눈을 흐릿하게 찌푸려 보니 C는 내 머리 위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비슷한 기억들이 있다. 본가의 강아지(이하 D)는 늘 나를 바라봤다. 적어도 나는 D가 우리 집에 온 후 몇 년 동안은 그랬다고 생각했다.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쳐다보다가, D의 작은 동공이 실은 항상 내가 아닌 내 머리 위에 흐릿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녀의 다섯 번째 생일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D에게 백내장이 발병했다는 걸 안 것도 아마 그때쯤이었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고양이와 강아지들은 정말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때로는 한껏 멍한 눈으로, 때로는 적의가 가득 담긴 눈으로 어딘가를 본다. 이에 대해 이미 몇몇 현명한 어른들은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은 적이 있고 나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언젠가 D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걸 가리키며, D가 귀신을 보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흰 강아지들은 귀신을 내쫓거든. 저 봐라, 고개가 휙휙 돌아가잖니"   

 

할머니는 정말로 흰 개가 귀신을 쫓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개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또 D가 객관적으로 흰 개가 아니며 흰 얼룩이 배 쪽에 조금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D는 별 반대 없이 우리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어쩌면 이것이 우리 집이 제사를 지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한다. 우리가 모시는 조상신이니 귀신이니 하는 영적인 것들이 모든 것에 대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D가 우리 가족이 된 것은, 그러한 유교적 가치를 꽤나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유한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다시 이야기의 머리채를 끌고 돌아온다. 만약 내가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말을 할머니가 듣게 된다면, (아직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 그깟 요물 내다 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고양이는 영악해, 주인도 못 알아보고, 성질도 고약하고, 충성심도없고. 게다가 족보도 없는 도둑고양이 아니니"

"그치만 흰 고양이인걸요, 귀신을 쫓.."

"그건 개나 그렇다는 거고, 고양이는 귀신 못 쫓아."

 

여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사실이 있다. 아마도 첫 번째는 개나 고양이나 귀신을 쫓는 능력 따위는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고양이가 성질이 고약하며, 충성심이 없고, 족보도 없다는 것이다. 휴머니즘이나 배려 나눔 충성 모성애 따위의 인간적 가치를 쌈 싸 잡순 이 고양이라는 생물은 정말로 이기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쨌거나 C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 해도, C는 크게 개의치 않아 할 것이다. 아니 사실, C가  ‘주인’ 의  존재를 기억하는지조차 의문이다. 사실 어떻게 나를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과학적으로 고양이의 시력은 형편없고, 나는 매일 다른 향수를 뿌리고 담배를 피우고 다니며, 구제시장에서 사 모은 괴상한 실루엣의 옷들을 입고 머리를 손질하기 때문에, 고양이의 입장에서 나는 매일 다른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당사자성(?)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나는 고양이인 C와 이제 햇수로 삼 년째 같이 살고 있는데, 정말로 빈말로라도 C가 예의 바르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손목과 팔 곳곳에는 C가 남긴 꽤 깊은 흉터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생활 패턴이 정상적인 C는 아침마다 밥 내놓으라고 날 깨우고, 보통 아침에 자고 저녁에 일어나는 불량한 생활 패턴을 가진 나는 밥을 줄 수 없다고 버티다가 C에게 한 대 얻어맞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아침 풍경이다.    

 

2. 나, 너, 우리

나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분명 반려는 동물에게 국한되는 범주는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에게 먼저 적용되어 왔다. 애초 동물에게 ‘반려’라는 단어는 동물행동학자인 로렌츠의 8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고작해야 40년 정도 된 표현이며, 그전까지는 ‘애완 Pet’이라고 불렸다. 그러니 당시 '반려동물 Companion Species'이라는 단어를 쓰는 행위는, 동물 애호가가 보이는 극단적이고 히스테리컬한 광증으로 치부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간 ‘동물과 반려한다’라는 표현은, 은연중 인간의 지위를 동물에게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버릇의  신호탄이 되었다. 여기에 싱어주의와 같은 휴머니즘적 담론은 ‘동물도 우리와 똑같이 느낀다’라는 논리를 통해 이를 정당화했다.  

 

 전통적 반려 관계는 부부의 영역이었다. 더더욱이 전통적으로, 두말할 것 없이 이는 이성애 부부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고 믿으며 걸어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또 나는 반려 伴侶-짝과 짝- 이라는 말을 들으면 황혼의 노년  부부를 떠올릴 수 있다. 한편, 반려伴侶 라는 말이나 영어의 동반자 Companion 라는 단어는 모두 (사전적으로도)  대칭성을 지닌다. 반려하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도중에는, 개인은 스스로의 존재를 반려 대상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 반려의 운명이 제공하는 필연성이다. 반려는 기본적으로 꼭 맞는 한 벌을 가정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칭성을 띤 공존이 반려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이 된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정의되어 왔다. 1983년 이후로 반려라는 표현이 인간 외 종-주로 개나 고양이-에게 적용됨에 따라, 반려의 관계에서 유지되던 대칭성은 깨지게 되었다. 대칭성은 언어라는 소통 수단을 지닌, 오직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유효했기 때문이며, 이제는 언어가 없는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도 반려라는 개념이 적용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은 이제, 아주 작은 인간의 지위를 지니게 되었다.  반려는 한순간에 동물과 인간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것이다.

 

 동물농장의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하이디’ 가 사라지고 어느새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의 강형욱이 등장한 것처럼, 최근에는 동물 행동을 보다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조직화하는 시도가 반려동물에게 적용되고 있다. 동물행동학은 본래 자연 내에서 동물의 행동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분석하고, 이를 종 전체에 일반론적으로 적용시키는, 발달 심리학의 한 갈래다.

 

동물 행동학은 네 발 달린 포유류 반려종의 언어 대신 행동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동물의 행동을 배우고 또 그들에게 사용하는 것은, 동물에게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이해시키려는 단선적인 시도보다 복잡한 층위를 가지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동물이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꽤나 상호소통적인 동시에 탈-인간 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행동학의 방법론은 동물과 인간관계 사이에 자리잡은 일련의 명료한 과학적 사실Fact들을 오직 사실로서만 제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 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석의 방향성과 그 방향성이 인도하는 새로운 이야기다. 동물행동학이 제시하는 동물 행동에 대한 해석은 어떤 의도도 없는 순수한 객관적 사실들로만 이끌어낸 결론이라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해석의 방향성이 동물행동학의 뿌리인 심리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물학과 심리학을  넘어선 이야기가, 픽션이, 서사가 필요하다.  

 

‘반려종 선언’ 의 저자인 해러웨이에 따르면 ‘사실(Fact)’ 은 끝난 것, 고정된 것, 입증된 것, 성취된 것의 의미를 지니며, ‘픽션’ 은 진행 중이고, 아직 문제로 남아 있는 동시에 사실과 어긋날 가능성이 있고, 조만간 알게 될 것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해진다. 픽션은 하나의 대안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진행 중인 이야기다. 우리가 반려 개념에서 벗어나 동물을 보기 위해서는, 사실(Fact) 과 거짓(False) 의 전통적인 이분법적 구도를 사실과 픽션의 구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거짓은 사실의 형태적 역으로서 마찬가지로 정적이며 끝난 것, 고정된 것, 입증된 것의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픽션(Fiction) 에는 진행되는 이야기와,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사실을 압도하는 맥락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픽션은 우리의 아주 효율적인 무기다. 가설(Hypothesis)이 그 자체로 동적 성격을 지니지만 종국에는 사실(Fact)을 향해 나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과는 반대로, 픽션은 우리의 이야기로부터 뻗어 나와 우리가 사는 오래된 동네를 한 바퀴 돈 뒤 다시 우리의 안락한 집으로 돌아온다는 차이가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인간과  함께하는, 역사성을 가진 소외된 유기체들과의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한 것이다. 인간과 소외된 동물이 가지는 역사성을 다른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 나아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 발화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인간중심적인 관점 밖에서 탐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머나먼 자연의 세계로 떠난다. 그곳에는 야생 동물들이 있다. 그렇다면 왜 초원에는 코뿔소가 있고, 도시에는 길고양이와 비둘기가 있으며, 집 안에는 잘 길들여진 강아지가 있는가? 내가 길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도시에 길고양이가 있는 이유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3. 진행 중인 역사, 자연의 구성

우리는 수많은 동물들이 몸담고 있는 자연의 구성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아마도 아주 거친 방식으로 이분화하자면 자원과 가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은 자원일 수도 있고, 자원 역시 가족일 수도 있다. 동시에 자원이 아닌 가족과 가족이 아닌 자원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당에서 도둑을 지켜 온 개는, 훌륭한 가족인 동시에 좋은 자원이다. 개와 인류는 항상 그런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럼 돼지는 어떨까? 돼지는 가족은 아니지만, 좋은 자원이다. 돼지, 소, 양, 말, 벌, 누에고치 등등 가축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런 지위를 차지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식용 가능한 식물 종들과 해양생물들이 차지하는 카테고리이기도 하다. 가족이 아닌 자원으로서의 자연의 경우 해당 종은 인간에 의해 효율적으로 비육되고 살해된다.

 

 그러나 동물들이 언제나 조직적으로 사육당하는 것은 아니다.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여전히 가족이 아닌 자원으로서의 자연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라거나, 사자, 곰, 하이에나, 고래들은 인간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가?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인간을 찢을 수도 있는 아주 무시무시한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비교적 온순하다고 알려진 임팔라, 얼룩말들이 인간을 상대로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인간을 죽일 수 있는 포유류가 그렇지 않은 포유류보다 많긴 하다) 하여튼간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보호된다. 물론 생명윤리 따위의  거창한 이유는 아니며, 생태계 균형 파괴를 우려하는 쪽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가족도 자원도 아닌 동물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때때로 죽여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 멸종 위기 단계에서 가장 낮은 ‘최소 관심’ 을 받은 동물이거나,  ‘유해조수’로 분류된 동물은 수렵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개체수가 많아서 좀 살해한다고 생태계 균형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물론 고라니는 멸종 위기 등급 ‘취약’ 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내에서 전 세계 개체 90% 이상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또 인간에게 손해를 끼치는 유해조수라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멧돼지나 뉴트리아도 비슷한 이유로 포획된다. 법적인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죽여서 데려가면 현상금까지 받을 수 있기에 수렵 철이 되면 이들 유해조수를 수렵해서 보상금을 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도시의 한 가운데, 인간 이익의 틈바구니 사이에  길고양이와 비둘기들, 때로는 족제비와 너구리들이 있다. 이들은 수렵해 봤자 보상금도 없으며, 끼치는 피해도 상대적으로 미미하기에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틈새의 존재’ 들이다. 반려의 범주, 생명윤리의 범주, 인간의 이익 범주 그 어디에도 이들은 없다. 더불어 동물과 인간의 관계맺음의 범위는 역사적으로도 앞의 세 가지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 도시 유해생물들과 도시민들의 관계맺음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모든 보호적 제도로부터 내팽개쳐져 있지만, 반대로 오히려 그렇기에 존재 대 존재로서 우리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 다시 도시로

먼 야생의 세계로부터, 나는 다시 도시로, 나아가 내 집의 안락한 소파로 돌아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시민들은 고라니나 멧돼지, 뉴트리아와 같은 동물들을 일상적으로 마주할 일이 거의 없다. 내가 도시에서 마주하는 유해동물 내지는 생태계 교란 생물은 고작해야 비둘기나 길고양이 정도다. 우선 비둘기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직까지 우리는 서로 건조한 빵 부스러기와 축축한 새똥을 주고받은 후 헤어지는, 아주 단순하고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묶여 있는 존재들이다. 관계맺음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분명 그렇다. 오히려 전문적인 브리더들은, 비둘기와 보다 나은 방향으로 관계맺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고양이는, 나를 쳐다본다고 느낀다. 응시한다고 느낀다. 빤히 바라보다가 도망가 버린다고 생각한다. 혹은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쩌면 그건 고양이의 크고 둥근, 인간을 닮은 두 눈 때문이다. 

 

내가 구태여 길고양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이유는, 길고양이는 반려 문화 아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게 길고양이는 분명 반려동물이 아니다. 그들은 집에 사는 개나 고양이, 가축에 비하면 비교적 꽤나 자연적인 존재들이다. 전혀 보호되지도 않으며, 구태여 내가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야 할 어떤 법적, 윤리적 의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길고양이가 장소에 따라서는 반려동물임을 잘 알고 있다.  현대 문명으로 가득 찬 좁은 방 속에 사는 고양이의 경우, 인간적이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만약 노트북 위에 올라가기라도 한다면 얘가 컴퓨터를 할 줄 아네, 라며 까르륵대고, 혹여 책 위에서 잠에 든다면 세상에, 학구열이 엄청나게 뛰어나잖아! 라고 농담 삼아 말하지 않던가. 또  바닥에다 밥을 쏟아 줘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접시에 담아 밥을 제공한다. 이것은 인간의 법칙 속에서 이해되는 고양이의 모습이다. 

 

그러나 방 밖에서의 길고양이의 룰은 가혹하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 인간 기준에서 윤리적으로 ‘먹지 말아야 할 음식’, 혹은 가족을 대하는 방식은 인간의 그것과 판이하다. 길고양이들을 반려의 룰 안에 집어넣으려고 시도할 때 비로소 균열이 발생한다. 친구를 뜯어먹는 고양이, 자식과 교배하는 어미 고양이, 동성과 교미하는 고양이, 동료의 시체 앞에서 태연하게 밥을 먹는 고양이들은 모조리 인간 문법 범주 밖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집 안에 있는 고양이들과 완벽히 같은 종이다. 길고양이가 일으키는 문법의 파열은 우리가 반려 고양이에게 투사하는 인간성의 실체를 의심하게 한다. 오직 반려 동물 안에서만 재현되는 인간성이란 그래서, 아주 얄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 길고양이는 꽤 특별한 존재다. 내가 반려동물과 쌓아 온  아주아주 많은 잘못된 전제들이 나와 길고양이의 관계에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고양이의 관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계맺음하면서,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생겼다. 그냥 그랬어, 라는 사실들을 나는 픽션적인 방향성으로 엮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사실이자 역사이기도 하고, 어쩌면 고양이와 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에 있다. 만남에 대한 아주 건조한 이야기는 모든 문명들을 발가벗긴 후 우리를 이야기의 세계, 뮈토스의 세계로 보낸다. 더불어 이것은, 우리의 오랜 오해에 대한 바로잡음이기도 하다. 

 

5. 그냥 고양이 이야기  

 

나는 옥탑방에서 살고 있는데, 종종 담배를 피우며 주택가 골목들을 내려다본다. 지금 우리 집 근처에는 검은 바탕에 흰 무늬를 가진 턱시도 고양이들과 검은색, 흰색, 노란색이 마구잡이로 섞인 카오스(Chaos) 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주로 새벽에 이애옹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인간의 평화로운 수면을 방해한다. 또 종종 음식물 쓰레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아 도시 악취의 주범이 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길고양이를 미워하지만, 다행히 우리 이웃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벌써 삼 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다.  원래 이 동네에 자리 잡고 살고 있던 것은 턱시도 고양이와 노란 치즈 고양이 한 마리였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고양이 두 마리가 주택 하나를 끼고 같이 살았다. 내가 아는 것은 그뿐이다. 아마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연연하는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 외에,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물학적으로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고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들이 싸우는 걸 본 적은 없다.  

 

여느 여름날, 노란 치즈 고양이가 갑작스레 죽었다. 더러운 박스 안에 노란 고양이는 혀를 길게 빼고 누워 있었고, 그 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시체 옆에는 마치 고양이의 영혼을 위로라도 하듯 누군가가 놔둔 말린 북어 반 토막이 있었다. 나는 한켠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걸 지켜봤다. 그때 어디선가 턱시도가 나타나 킁킁 냄새를 맡더니, 북어포를 물고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후 노란 고양이는 미화원에 의해  종량제 속에 담겨 떠났다. 한동안 매일 밤 시끄럽게 울곤 하던 턱시도는, 어느 날 자신과 꼭 닮은 턱시도와 카오스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고양이들은 거의 같이 다녔다.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는데, 대개의 경우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렇게 어미 턱시도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장성한 두 고양이만이 동네에 눌어붙어 살게 되었다.

 

우리 집에도 한동안 고양이인 ‘콕이’가  있었다. 우리는 종종 집 밖으로 나가곤 했다. 때로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대문을 지나서 골목길까지 걷다가 돌아왔다. 하루는 골목길에 나서자마자 카오스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카오스는 눈이 잔뜩 커진 채 다가와  나와 콕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냄새를 맡았다. 나 한번 보고, 콕이 한 번 보고, 그런 식으로 계속 두리번거렸다.  잠시 앉아 있던 콕이는 별 흥미 없다는 듯 하품하더니  사뿐사뿐 집으로 돌아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어쩐지 카오스는 아주 놀란 표정으로 우리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그 일 이후로 어째서인지 카오스는  나를 예전만큼 피하지는 않았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피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때쯤 해서 동네에 흰 고양이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덩치 큰 흰 고양이는 종종 턱시도와 카오스를 위협했다. 쥐어패기도 하고 물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로 그루밍을 해 주고, 밥을 나눠 먹다가도 갑작스럽게 싸웠다. 어쨌거나 그들은 계속 같이 다니며 낮잠도 자고 밥도 같이 먹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작스럽게  턱시도가 죽었다. 흰 고양이에게 물린 상처가 감염되어 번진 탓이었다.  추운 늦겨울날. 먹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인가.  흰 고양이와 카오스는 턱시도의 시신을 뜯어 먹었다. 그래도 카오스는 흰 고양이와 같이 다녔다. 밥을 같이 먹고, 늘 그랬듯 낮잠도 같이 잤다. 카오스는 흰 고양이의 새끼를 낳았지만,  이내 모두 죽어 버렸다. 그 겨울 이후 나는 동네에서 그  흰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 그저 카오스가 홀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났다. 편의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골목길 한켠 주택의 창문이 쾅, 열리고 집주인이 격앙된 표정으로 막대기를 창 밖으로 휘둘렀다. 곧이어 주택 문 아래로 카오스가 툭 튀어나왔고 쏜쌀같이 골목길을 따라 달려갔다. 통통하던 카오스는 꾀죄죄하고 말라 보였고, 털이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다.나는 한동안 카오스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를 뒤쫓아 갔다. 골목길 끝 한적한 차도에는 카오스는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허탈한 나머지 담배를 찾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다 얇은 지갑을 꺼냈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동네 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 준 적이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제일 비싼 캔을 샀다. 내 하루 밥값의 삼 분의 일 정도였던 것 같다. 비린내가 나는 캔을 따서 골목길 한켠에 놔 두고 나는 그 옆에 서서 담배를 폈다. 그때 골목 안쪽에서 카오스가 나타났다. 카오스는 곧 캔의 존재를 알아채고, 비틀거리며 걸어 와 캔을 먹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먹긴 했지만, 절반 정도는 땅바닥에 흘리며 먹었는데, 아마 구내염 때문인지 뭔지 입이 아픈 것 같았다. 어찌저찌 캔의 반 정도를 먹고는 내 옆에 앉았다. 털썩 주저앉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한번도 이렇게 가까이 서로를 둔 적이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오 분 정도가 흘렀다. 카오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째서인지. 나는 카오스를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길고양이도 나와 이렇게 가까이 앉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잠깐, 우리는 어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었던 것 같다. 비록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6. 살아지는 존재들, 마무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새 도시의 길고양이들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길 위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친구들은 종량제 봉투 따위에 담겨 일반 쓰레기로 분류된다. 그저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 존재들은 우리의 가족이었던 적도, 친구였던 적도 없다. 이들이 인간과 관계맺음 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나는 이들이 누군가의 철천지 원수라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음을 서로가 알고 있다면 그 순간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론적인 안무를 펼친다. 

 

당신과 나는 같은 인간 종으로서 엇비슷한 수준에서의 공감 능력을 공유한다. 우리 종 대부분은 말할 수 있는 이유로 서로를 이야기한다. 그것만이 정상적인 범주에서의 이상적인 소통이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젠더-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들, 스스로의 육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정상성에서 한없이 벗어난 무법자들은 분명 말할 수 없는 공간을, 장소를,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든 발화할 수 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그러한 가능성은 인간 종에 한해서만 인정되어 왔다. 기존의 동물권 담론에서 인간 권리와 이익, 그리고 시선을 뜯어내 개인적인 관계로 재구성하는 일은 새로운 범주의 정체성 담론인 동시에, 기존의 정체성 정치가 저지른 실수- 수많은 정체화된 이름들 사이에 갇혀버린 언어 없는 것들- 로부터 존재들을 건져 올린다.  

 

나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예술이 발화라면, 개인과 개인이 아닌 집단이 참여해서 이끌어 나가는 발화에는 픽션이 없다. 거기에는 오직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시선과 집단의 이익을 위한 가치만이 포함된다. 모두의 예술은 바꿔 말하자면 당신들의 예술이고, 예술이 쉽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시선은 발화에 대한 폭력적인 차단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당신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정당-정치적 연대를 넘어, 우리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시도, 말할 수 없게 하는 힘에 대항해서 끊임없이 말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 글의 핵심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는 것,  말할 수 없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길고양이들은 파괴적이다. 질서를 부수는 그들의 행위는 반려의 자격을 가진 동물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깨끗하고 쾌적한 방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속에서 동물들은 인간에게 허용된 행위만을 할 수 있다. 동족상잔, 근친교배, 동성애, 죽음에 대한 무감각은 길고양이들의 능력이다. 길고양이와 관계맺음 하는 누구라도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를 눈치챌 수 있다. 혹은 끝까지 그들이 작은 인간이라 믿으며, 혹은 우정이나 사랑, 의리, 품위 등의 인간적 가치를 지닐 것이라 믿을 수도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꽤 많은 길 위의 고양이들을 떠나보냈고, 그때마다 못내 미안해하며 울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임종 직전 고양이의 쓸쓸함을 느꼈다고 믿었다. 나는 고양이가 슬퍼했을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상상하며 슬퍼했다. 자기연민에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다시는 고양이들과 함께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관계맺음이 한순간에, 일방적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관계맺음이 다시 시작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과 명확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나는 참 많이도 닳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길고양이 조력자들은, 길고양이들이 그저 왔다가 갈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연의 법칙 따위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길고양이 조력자들은 그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도시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용히 밥을 놓고 떠난다. 주변을 정리하고 관찰한다. 아파 보인다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들이 먼 곳으로 떠난다면 그저 그뿐이다. 인간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우리는 그들이 떠나고 돌아와도 지속적으로 관계맺음을 유지할 수 있다. 같이 살아감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건조하고, 무심하다. 그런 건조함이 비로소 우리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한다. 모든 인과율과 인간적 투영이 말라비틀어진 곳,  그곳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같이 살아감을 완벽하게 수행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카오스가 내 옆에 잠시 앉았다 영원히 떠났듯, 그저 아주 잠깐이라도 서로를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면, 어쩌면 그건 탈인간중심적 관계맺음과 인간적 연민이 타협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계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거나 나 역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고양이의 밥을 챙긴다. 그저 그뿐이지만 만족하며 집으로 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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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근 기자

문명을 야만의 이야기로, 빛을 어둠으로 거두고자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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