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 (일)

대학알리

여성·젠더

섹스 그리고 여성 질, 병

미디어가 침묵하는 섹스 이후의 이야기

짠, 여기 우연한 계기로 만난 두 남녀가 술잔을 부딪친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꽤 즐거워하는 두 사람. 초록색 소주병들이 테이블 구석탱이에 쌓이고, 주인공들은 혀가 꼬인 목소리로 진솔하고 대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급격히 마음의 벽을 허문다. 계산하고 나와서도 집에 가기 아쉬운지 술집 밖 담벼락에서 갑자기 키스를 시작하고, 키스는 남자주인공(거의!) 집 침대에서 이어진다. 애석하게도 방심위 심의 문제로 중간 과정은 생략. 그리곤 아침에 눈을 뜨는 두 사람. 어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여자는(혹은 남자도) 너무 쪽팔린 나머지 급하게 자리를 피한다 -남자는 벗고 여자는 꼭 나시를 입고 있다. 대체 왜..?- 집 와서 쪽팔림에 이불킥 한 번 날려주지만, 거짓말처럼 두 주인공은 원나잇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미디어 속 원나잇 연출은 더는 낯설지 않다. 섹스 묘사하는 장면 좀 나왔다고 19금 딱지 붙는 건 옛날이야기다. 원나잇은 보통 주인공 두 명의 서사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면으로써 쓰인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원나잇 이후 드라마 속 여자주인공의 걱정이라곤 ‘아, 앞으로 저 남자 어떻게 보냐’ 뿐이다. 과연, 술김에 원나잇 한 여자들이 부끄러워하며 이불이나 쾅쾅 찰까? 절대 아닐걸. 

 

콘돔은 꼈나? 몇 번 했더라? 아 이 새끼.. 안에 한거 아냐? 얘 성병 있으면 어떡하지? 설마..몰카는 없겠지?

 

원나잇 한 여자는 이런 걱정을 한다. 그런데 지금껏 원나잇을 소재로 사용했던 미디어는 죄다 이 사실을 외면한다. 드라마가 현실을 얼마나 잘 구현했는가, 이름하여 ‘현실 고증’을 잘 수행하는 것이 잘 만든 드라마의 중요한 기준인 지금, 왜 섹스 이후 벌어지는 다양한 일에 대해서는 왜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평가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가? 우린 왜 섹스 이후의 여성에게 이토록 무관심한가.

 

네? 제가 성병이라고요?

A(25)는 작년 5월 성병 진단을 받았다. 평소 산부인과 검진을 꺼리는 편이 아니었으며, 문제가 생기면 자연스레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내원하여 검진받았으나, 성병 검사를 따로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와 관계 중 콘돔에 피가 살짝 비친 것을 발견했고, 생리 전 증상이겠거니 짐작했으나 며칠이 지나고도 생리를 시작하지 않아 산부인과에 내원했다. 초음파를 보던 중 자궁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이 출혈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곤지름(콘딜로마, 성기 사마귀)까지 진단받았다. 

 

“청천벽력이었어. 너무 당황했지. 큰일 났다, 아니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진짜 무서웠던 것 같아. 내가 성병에 걸리다니?”

 

A는 산부인과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이전에 성병 검사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현 애인 이전에 유일하게 관계를 맺었던 전 남자친구가, 성관계는 처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병이란 모르는 사람과도 별 개의치 않고 잠자리를 많이 가지는 사람이라던가, 성을 사고파는 일을 하는 성 노동자, 혹은 성 매수 남성들이 걸리는 병이라고 알고 있었다. 단 두 명과 관계를 맺어도 걸릴 수 있을 정도로 흔한 병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곤지름은 보통 HPV 바이러스 중 6번, 11번 바이러스를 통해서 발병한다. 다행히 자궁경부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 바이러스는 아니다. 하지만 약을 바르는 중에도 병변이 주변부로 번질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옮고, 바이러스가 활성화되어있는 기간(평균 1년 6개월~2년) 동안엔 재발률이 높아 의사에게도 ‘진짜 사람 피곤하게 하는 병’으로 불린다. A 역시 재발을 피할 수 없었고, 치료를 위해 두 달 동안 네 번에 걸쳐 병원을 방문했다.

 

“곤지름은 겉으로 표가 나는 성병인데도, 나는 그동안 불편하거나 가려웠던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어. 심지어는 진단받고 난 후에 거울로 확인을 해봐도 이게 곤지름인지 잘 모르겠는 거야. 인터넷에서 병변 사진을 많이 찾아봤는데, 딱히 그거랑 비슷한 것 같지도 않았어.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병변이 잔디처럼 작게 깔려 있는 케이스라 육안으로 판단이 어려울 수 있다더라고. 그래도 불안하니까 매일같이 방문을 걸어잠그고 병변이 더 번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는데 그 과정이 되게 불편하고 스트레스였어.” 

 

처음 진단을 받고 집에 돌아왔을 때, A는 성병에 걸렸다는 충격과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부모님께 들킬까 전전긍긍했다. 곤지름을 진단받았을 때, 자궁 안에 다른 문제가 발견되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수술 사실은 부모님께 알려야 하는데, 성병을 진단받았다는 사실은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수술 때문에 앞으로 계속 산부인과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고,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알게 될까봐 두려웠어. 가뜩이나 부모님 세대는 지금 2030 여성들보다 산부인과를 더 꺼리잖아. 대부분 보수적이고, 심하면 곰팡이성 질염에 대해서도 ‘병원에 왜 갔냐. 소금물 풀고 좌욕해라'고 말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 

 

“한국 사회에서 부모님에게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말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심지어 성병이 옮았대. 딸로 살면서 부모에게 성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래서 부모님이 연말정산 때 의료보험 기록을 조회할까 봐 너무 걱정이었고, 타인이 병원 방문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지 계속 찾아봤어.” 

 

 A는 곤지름을 진단받은 이후 유튜브나 논문을 통해 성병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고,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자궁경부암 유발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 HPV 바이러스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균이 아닌 바이러스는 콘돔을 껴도 흔하게 옮는다는 걸 알고, 생각보다 여성들이 자궁경부암에 걸릴 수 있는 환경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비단 자궁경부암뿐만이 아니다. 술, 담배 다음으로 비인두암을 유발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구강성교다. 비인두암의 경우 다른 암에 비해 발생률은 낮지만, 고통스럽고 차도도 없는 암 중 하나이다. 구강성교로 전파될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은 언급이 잘 되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안전하게 구강성교를 하는 방법이 아예 하지 말던가, 콘돔을 끼고 하는 거래. 아니, (웃음) 그게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잖아. 콘돔 위에 윤활유가 발라져 있는데, 그럼 그걸 먹게 될 거 아냐. 물론 성관계를 하는 방법에 있어서, 상호 합의와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는 전제로 ‘일반적’이라는 건 없고 사람마다 다른 거지만, 내 상식에서는 윤활유를 직접 입에 닿게 한다는 게 상상하기도 싫고, 조금 역겨운 일인 거야. 그런데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그것 뿐이라는거지.”

 

야동은 당연한데, 성병 이야기는 왜?

 

지상파 예능 방송에서 남자 아이돌을 향해 “솔직히, 야동 봤죠?”라고 묻는 건 무례가 아니라, 대범하고 솔직한 질문으로 그려진다. ‘야동=남자라면 누구나 보는 것’이 공식화된 지는 오래다. 이제 우린 모두가 야동을 포함한 다양한 성인 콘텐츠를 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보편화된 ‘음지의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성교 방법이 연출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사회로 침투한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 유튜브나 인터넷 방송을 통해 생산되는 웹 콘텐츠 등 ‘양지의 미디어’에서는 섹스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위험들에 대해선 무관심하며, 침묵한다. 상대적으로 검열이 덜한 웹 미디어에서도 성병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니, 음지와 양지의 간극은 점점 심해진다. 

 

A는 성병이 음지화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병은 성관계를 하는 대부분 사람에게 한 번쯤 지나간다. 지금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병은 아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균이나 바이러스를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고, 약물 치료를 하지 않았거나 면역력에 의해 소멸하지 않고 방치해서 커지는 경우엔 문제가 된다. 특히 여자 같은 경우에는 염증이 질에서 자궁으로, 자궁에서 골반으로 차츰 퍼지면 골반염이 생길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치료가 까다로워진다. 만약 염증이 자궁 경부나 자궁, 신장으로 퍼지면 고열이 나고, 무조건 입원해야 해서 수술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다못해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먹히는 밈(meme)이 ‘라면 먹고 갈래?’잖아. (섹스가 터부시되지 않는 게)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처음 병을 진단받고 왔을 때, 이렇게 섹스를 직, 간접적으로 표현을 하면서 성병에 대한 이야기는 검열이 덜한 웹 콘텐츠에서조차 표현하지 않는다는 게 기만이라고 생각했어. 성병은 정말 다수의 사람에게 퍼져 있고, 방치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지만, 초기에 발견하면 정말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야. 그러니까 미디어가 병원에서 검진받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면서 장벽을 낮춰주고, 검진 필요성을 꾸준히 언급해주면 좋을 것 같아.” 

 

“관계를 가지는 이상 성병은 완전히 피할 수 없으니까, 검진받는 걸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검진에서 균이나 바이러스가 나왔다고 해서 너무 겁먹을 필요도 없고, 증상이 없는데 두려워하면서 강박적으로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어렵거나 무서운 일 아니니까. 파트너가 바뀌었거나, 의심되는 상황이 있다면 한 번쯤 검진은 받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초기에 잡을 수 있거든. 운동 많이 하고. 다이어트한다고 근육 다 빼지 말고.”

 

자, 이제 지극한 현실로 돌아오자.

 

짠, 여기 우연한 계기로 만난 두 남녀가 술잔을 부딪힌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꽤 즐거워하는 두 사람. 초록색 소주병들이 테이블 구석탱이에 쌓이고, 주인공들은 혀가 꼬인 목소리로 진솔하고 대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급격히 마음의 벽을 허문다. 계산하고 나와서도 집에 가기 아쉬운지 술집 밖 담벼락에서 갑자기 키스를 시작하고, 근처 모텔을 찾아 들어간다. 그리곤 아침에 눈을 뜨는 여자. 아. 머리야.. 어제 얼마나 마셨지? 아 콘돔 꼈었나? 그러긴 한 것 같은데. 몇 번 했더라? 두 번째 했을 때 안 꼈던 것 같은데.. xx.. 이번 주가 배란기였나? 아.. 얘 성병 있음 어떡하지. 옮은 거 아냐? 뒤척거리다 남자도 깬다. 잘 잤어? 우리 얼마나 마셨더라. 어색한 공기를 뚫고 대충 옷만 챙겨 입고 모텔 밖으로 나선다.  

 

섹스 후 여성의 불안감이 시작됐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