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8 (월)

대학알리

모든 혁명은 하나의 동작으로 연결된다, 한예종 연극원 정기공연 '혁명의 춤'

혁명이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변화를 의미한다. 존재 자체가 혁명인 연극 ‘혁명의 춤’이 원로 연출가 김우옥을 만나 23년 만에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정기 공연으로 올라온다.

 

‘혁명의 춤’은 국내에 몇 없는 구조주의 연극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우옥 연출가는 1983년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이 작품을 공연했다. 이번 한예종 정기 공연이 다섯 번째 무대다. 안무가 최수진의 지도를 받은 20명의 연기과 학생이 배우를 맡았다. 더불어 △극작과 △무대미술과 △연출과 등으로 구성된 연극원 학생 약 20명이 스텝으로 참여한다. 공연은 다음 달 1~3일, 한예종 연극원 실험무대에서 막을 올린다.

 

줄거리도, 등장인물도, 무대 조명도 없는 연극

 

구조주의 연극은 실험극의 한 종류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가던 기성 연극에서 벗어나, 오롯이 연극의 구조와 원리에만 집중한다. 하나의 개념을 해체했다가 다시 합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구조주의 연극의 특징이자 매력 요소이다. ‘혁명의 춤’의 원작은 ‘전위연극의 권위자’라고 불리는 마이클 커비(Michael Kirby) 교수의 작품이다. 커비 교수는 연극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작품의 모든 문학적 요소를 제거했다. 그렇게 8개의 신(scene)이 만들어졌다. 등장인물은 이름 없이 숫자로만 39까지 나열돼 있으며, 조명이라곤 배우가 들고나오는 플래시 불빛이 전부다.

 

 

“준비됐어?” 하나의 요소로 연결되는 내용

 

연극을 이루는 대표적 구조는 △언어 △동작 △음향이다. 8개의 장면 내내 △기다려. △들려? △그들이야. △그들 거야. △준비됐어? △누가 오고 있어. 등의 짤막한 대사들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반복된다. 배우들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기다려”를 외치다가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조그맣게 “그들 거야”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극에서 ‘그들’은 장면마다 바뀐다. 그것은 혁명을 도모하는 이들을 가리키기도, 혁명의 대상이 되는 지배층이나 감시 층을 일컫는 말이 되기도 한다. 주목할 것은, 관객이 눈앞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배우의 표정과 대사, 연기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연극의 대표적인 반복 동작으로는 △손 쳐들기 △손 벌리기 △성냥 켜기 △물건 던져서 주고받기 등을 뽑을 수 있다. 1장에서 뭔가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던 ‘손 쳐들기’ 동작이 6장에 가서는 누군가에게 굴복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동작’은 극 내내 반복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동작’의 중요성은 배우들이 2초에 한 번씩 켜지는 조명에 맞춰 지정된 행동을 해야 하는 고난도 장면을 통해 강조되기도 한다.

 

음향에는 △라디오 소리 △사이렌 소리 △왈츠곡 등이 있다. 왈츠곡은 제2장 가면무도회에서 처음 흘러나온다. 배우들은 음악에 맞춰 드레스와 연미복을 차려입고 왈츠를 춘다. 장면이 바뀌고, 왈츠곡은 라디오와 사이렌 소리가 된다. 직전 씬에서 음악에 맞춰 왈츠를 췄듯이, 이번에는 사이렌 소리를 배경 삼아 심폐소생술을 한다. 왈츠곡과 왈츠도, 사이렌 소리와 심폐소생술도, 모두 혁명의 ‘춤’인 셈이다.

 

‘혁명’은 보통 뜨겁고 격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단체로 구호를 외치거나 깃발을 휘두르다 장렬하게 스러지는 군중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고취심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혁명의 춤’에 등장하는 혁명에는 그런 정서가 모두 제거돼 있다. ‘혁명’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구조화한 뒤에 그것을 해체하고 나열했다가 다시 합칠 뿐이다.

 

“가장 연극적인 것은 그 순간을 느끼는 것”

 

김우옥 연출가가 강조한 공연의 포인트는 ‘연극적 요소’이다. 그는 연습 시간 내내 학생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일 것’과 ‘각자의 소리를 더욱 연극적으로 표현할 것’을 지시했다. 김 연출가는 ‘연극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일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 알게 모르게 연극적이게 된다.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거나, 내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들이 그렇다”며 “그런 노력을 연극에서는 더 두드러지게 하는 거다. 하나의 소리를 가지고도 극적인 감동을 주기 위해 고민하는 것, 거기에 연극성이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김 연출가는 연극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장면으로 ‘제6장 시체’를 뽑았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무대 한쪽에는 손이 묶인 시체가 쓰러져 있다. 한 남자가 그 시체의 외형을 따라 바닥에 테이프를 두른다. 사진기를 든 누군가가 그 장면을 촬영한다. 조금 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시체 앞으로 다가와 가만히 무릎을 꿇고, 이내 퇴장해 버린다. 그는 “저 시체는 무엇이고 왜 죽어있는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그런데 한 여자가 어느 순간 시체 앞으로 걸어 나와서 가만히 있다가 떠난다. 저게 뭘까. 저 둘은 무슨 사이지. 애인인가? 어머니인가? 계속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며 장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관객에게 계속 생각의 여지를 주면서도, 개인의 경험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는 구조주의 연극을 감상하는 방법에 관해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뭔가를 전부 알아야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극의 내용은 잘 파악이 안 되더라도, 무대 위에 보이는 사건이나 장면을 감상하며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와 관련된 연극의 정점은 마지막 장면에 있다. 공연 내내 따로따로 등장했던 ‘소리’들이 3부에서 차례대로 등장해 무대를 가득 메운다. 김 연출가는 이 장면을 두고 “우리 연극 비장의 무기”라고 강조했다. 관객들 역시 해당 장면을 통해 그가 내내 말했던 ‘연극적 요소가 주는 감동’이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다.

 

 

“공연을 통해 목숨을 건 에너지 얻어가길”

 

배우로 참여한 연기과 소속 이정은(25)씨와 곽민수(25)씨는 연극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나를 내려놓고 모두와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밝혔다. ‘혁명의 춤’은 이야기의 부재가 주는 공백을 다른 구성 요소로 채워 넣어야 한다. 때문에 더 깊이 있고 심오한 연기가 필요하다. 자의식을 내려놓고, 마치 혁명을 도모하는 군중이 된 것처럼 집단과 하나가 돼야 한다. 이런 점을 두고 이씨는 “무대 위에서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듯한 우리의 에너지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밝혔다. 곽씨 역시 “뭔가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건 고귀한 일이라 생각한다”며 “이 공연이 주는 목숨을 건 에너지를 통해, 본인들이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무언가를 해나가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들은 관객에게 특정한 의미나 메시지를 강요하고 싶지 않아 했다. 대신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연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밝혔다. 배우가 뽑은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은 ‘오감 자극’이다. 곽씨는 “연기를 통해 시각을, 소리의 진동을 통해 청각과 촉각을, 무대장치를 통해 후각을 자극할 수 있다”며 “마지막으로 공연이 끝난 뒤에 ‘이 공연 맛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미각을 충족시킬 것”이라고 전했다.

 

생각하게 만드는 연극에 대하여

 

연극의 조연출을 맡은 심지후씨는 최근 공연계의 이슈가 “어떻게 하면 관객을 생각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물음이라고 밝혔다. 본래 예술이란 메시지에만 치중하다 보면 촌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면서도 예술적 세련됨을 지키는 방법에 관해, 심 연출가는 이런 구조주의 연극이 해답이 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관객이 자발적으로 자신만의 드라마를 쓸 수 있다. 그 자발성이 곧 연극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방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다. 과연 우리는 이야기가 없는 연극을 관람하며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이야기에 지친 관객, 혹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느끼고 싶은 관객이라면 이 공연이 새로운 창구가 될 수 있겠다.

 

한편, 연극 '혁명의 춤'은 8월 '더줌 아트센터'에서 기성 배우 열 한 명과 함께 무대에 오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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