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4 (화)

대학알리

[알리트래블] 추억의 전이와 초콜릿 맛 교토

지난 8월 1일부터 9일까지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보통 일본에 열흘 가까이 머무는 일은 드물지만, 가고 싶은 장소가 많아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교토, 오사카, 도쿄 세 도시를 방문했고, 첫 여행지는 교토였으며, 이 이야기는 교토 2일 차에 있었던 일이다.


첫째 날 밤 저녁, 막내 이모의 연락을 받았다. 이모는 여행사 직원이시다. 말 그대로 ‘여행 만렙’. 하나뿐인 조카가 어른이 되고 처음 가는 해외 여행이니 마음을 써 주신 것일 테다.


“여행은 잘하고 있니? 여기 이모 교토 최애 장소야. 친구랑 맛있는 거 사 먹어~”


이모는 채팅창으로 한 초콜릿 가게의 주소를 보내셨다. 용돈 십만 원도 함께 송금해 주셨다. 어머니에게도 과자를 사 오라는 부탁을 받은 터라, 그걸 보고 아, 이모도 일본에 간 김에 초콜릿을 사 오라고 완곡하게 부탁을 하시는구나, 짐작했다. 둘째 날은 일정이 정말 빽빽한 날이라 예상치 못한 행선지에 잠시 걱정이 스쳤지만, 다행히도 가게는 여행 동선에 포함되어 있던 헤이안 신궁 근처였다. 헤이안 신궁에서 철학의 길로 넘어가기 전, 잠깐 들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8월 2일, 헤이안 신궁에 들른 뒤 이모가 알려주신 주소를 구글 맵에 입력했다. 현 위치부터 가게는 도보 9분. 그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긴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는데 땀 때문에 다리에 치맛단이 척척 달라붙었다. 지친 채로 초콜릿 가게 앞에 도착했다.

 

 

‘open’ 팻말을 확인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턱 안쪽은 공기가 바깥보다 3도 정도는 낮은 듯했다. 작은 마당에 나무가 빽빽했다. 향냄새가 진해 머리가 아찔했다. 가게의 문이 열려 있어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봤지만 드리워진 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많이 독특하네.

 

 

“아노-스미마셍”


벨을 눌러 보았지만 답변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 다시 한번 팻말을 확인했다. ‘open’이 맞는데.. 떠나야 하나, 생각한 찰나 가게 주인이 천을 들치며 나오셨다. 날 맞이한 건 뜻밖에도 나이가 지긋하신 서양인 사장님이셨다. 조금 마른 몸, 긴 금발 머리에 타비 양말. 목소리가 굉장히 나긋하셨다. “come in” 느릿한 첫인사였다.


가게 주인장의 인사일 뿐이었지만,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다다미 마루가 매끈하게 밟혔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사장님께서 이쪽으로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하셨다. 두꺼운 방석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사장님이 안쪽으로 들어가셔서 메뉴판을 가져오셨다. 많이 해진 종이, 필기체로 적힌 메뉴. 모든 것이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16개짜리 세트를 고르고, 테이크아웃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장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you can try this chocolate. Please wait a moment…”


테이크아웃을 하는데 초콜릿을 매장에서 따로 챙겨주신다고..? 놀랐다. 한편으로는 당황했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빨리 가야 하는데, 다음 일정이 있는데.. 마음이 초조해졌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수제 초콜릿집이었고, 제조까지 시간이 걸리는 구조였다) 아, 여기 와 있다고 이모에게 말씀드려야지, 전화를 걸었다. “이모 초콜릿을 사러 왔는데요..”


뜻밖에 이모는 웃음을 깔깔 터트리셨다. “어머 이 더운 날씨에 무슨 초콜릿을 사 와.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오라고. 거기에 아마 쉐리 언니도 있을걸~”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얼마 안 되어 사모님께서 초콜릿이 담긴 큰 쟁반을 들고나오셨다. 그 쟁반을 보고 나와 일행은 적잖이 놀랐는데, 장미꽃과 해바라기가 곁들여진, 말도 안 되게 아름답고 정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우습지만, 그 꽃들 사이 정갈하게 놓인 두 개의 초콜릿과 자그마한 포크를 마주한 순간, 초조했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었다. 이렇게나 정성스러운 대우 앞에, 얼른 목적을 달성하고 이곳을 떠나고자 했던 계획을 세운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탐스러운 그 꽃들은 나에게 ‘머무르라’ 말했다. 편히 쉬다 가라고. 일행에게 은각사의 입장 시간이 언제까지인지 속삭여 물었다. ‘5시’. 시간은 이미 6시를 넘기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난 뭘 서두른 걸까. “나 철학의 길도 은각사도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우리 여기 있자.”

 

 

사모님은 곧 차를 두 잔 내오셨다. 입술을 적셔 보니 볶은 콩 향이 올라왔다. 사모님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셨지만, 용기 내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쉐리인가요?” (이하 사모님을 ‘쉐리’라고 칭한다) 맞다고 하셨다. 아, 이모가 말한 그 분이 맞다. 어디서 오셨나요? 캐나다 사람이에요. 그게 긴 대화의 시작이었다. 난 영어를 잘 못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다정하고 말씨가 여유로운 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뿐.


“한국에서 오셨죠. 어느 동네에서 왔나요?”


“네. 서울 근처에서 왔어요. 경기도라는 지방인데, 하남시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단순히 출신을 묻고자 건넨 질문이 아닌 듯했다. 쉐리는 자신의 추억을 느릿느릿 회상했다. “한국.. 부산에 가 봤어요. 불꽃놀이를 보러 갔었는데(광안리 불꽃축제를 말씀하시는 듯했다), 정말 크고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어요.”


“저도 부산에서 불꽃축제를 본 적이 있어요. 정말 멋지죠.”


“광주에도 가봤어요. 음, 한국에는 광주가 두 개 있더군요. 이름이 같아서 엉뚱한 동네로 찾아갔던 기억이 있어요.”


“이런. 저희가 사는 동네 옆이 바로 그 ‘광주’에요. 묶어서 ‘광주하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신기하네요. 어쨌든.. 부산에 갔을 때 바다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물이 주는 힘이라는 게 있죠.”


 휴대폰 사집첩을 열어 부산에서 요트 투어를 다녀온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사장님은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교토에도 종종 보이는 하천들이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제 생각에 교토는 정말 여유롭고 멋진 동네 같아요.”


쉐리는 이야기가 길어지자 주방에서 아이스바 두 개를 꺼내왔다. 이건 덤이에요.


안에 팥이 든 녹차 맛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말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여유를 누리기 어려워요. 한국 청년들은, 저희도 마찬가지고, 정말 바쁜 삶을 살아요. 모두가 열정적이에요.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서요. 교토라는 동네가 참 부러워요.”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니. 한국 청년의 고충을 교토의 초콜릿 집에서 넋두리하고 있다니. 사모님께서는 친분이 있는 한국의 치과 의사 이야기를 해 주시며 그들의 자식들도 영어 공부를 치열하게 하더라, 이야기해 주셨다. “다들 영어를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제 남편도 그렇고(쉐리의 남편은 일본인이다) 저를 보면 다들 영어를 쓰는 게, 사실 여기서는 ‘신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보통 영어를 잘하는 것이 우리 사이에서는 자랑인데, 또 어떤 사회에 살아가는 외국인에게는 영어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싸르르, 했다. 사실 이곳에 와서 내가 여행을 온 한국인처럼 보이기보다는, 전혀 눈에 띄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존재이길 원했다. 그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갔다.


쉐리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포장하겠다 말했던 초콜릿 준비가 다 되었다. 쉐리는 정성스럽게 초콜릿을 포장하고 또 보관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꼭 호텔 프런트에서 냉동 보관을 해 달라고 말을 해야 해요.”


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용기를 내 한마디를 건넸다. 초콜릿 가게 사장님께 건네기엔 낯부끄럽고, 손님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엔 너무 낭만에 취한 게 아닐까. 우리가 무슨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꼭 하고 싶었고,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에게 행복했고 애틋했던 시간이었던 만큼 쉐리에게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I will remember our time ever. I hope you feel the same.”


“well.. we can’t hold on to every moment, but I think I can remember this time.”


그 말 한마디에 행복감을 견딜 수 없었다. 가슴 속에서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목이 메었다. 도쿄에서, 두 이방인이 나눈 마음이었다.


“bye. See you again.”


“bye”


대문을 넘자, 꿈에서 깬 것 마냥 멍했다.


“은각사도 철학의 길도 가지 못했지만, 나 하나도 마음에 걸리지 않아.”


“쉐리도 조금은 들떠 보였어. 계속 대화를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어. 들려줄 이야기가 많아 보였고,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모든 아쉬움을 단번에 압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교토의 초콜릿 집이 알려주었다. 왜 이모가 ‘그 집 초콜릿’이 아닌 ‘그 초콜릿 집’을 사랑한다 하셨는지 이해했다.

 

 

쉐리와 나눈 이야기가 그 어떤 관광지의 매력보다 진했다. 지친 마음은 처음 만난 푸른 눈의 외국인과 쉬어갔다. 세상만사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만날 수 있는 기적 같은 순간들도 있다. 난 아마 오랫동안, 세상의 속도에 치일 때마다 느리고 나직한 쉐리의 목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뉘엿뉘엿 지는 아름다운 노을 아래, 호텔까지 40분을 걸어 돌아왔다. 그 40분 동안 교토의 풍경을 눈에 곱씹어 담았다. 입안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던 생초콜릿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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