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1 (월)

대학알리

성공회대학교

교수 말 잘 들으면 교수는 오래 살아도 나는 오래 못 살아

해성감도 시제 1호

 

6인의 아해가 수업을 듣고 있소.
(교실은 모 교수의 강의실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화장실을 가려고 하오.
제2의 아해가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하오.
제3의 아해가 급한 전화를 받으러 나가려 하오.
제4의 아해가 잠깐 고개를 꾸벅이려 하오.
제5의 아해가 집중을 못 하고 딴 짓을 하려고 하오.
제6의 아해가 지각을 해 이제 강의실에 들어오려고 하오.

6인의 아해는 화장실 가려는 아해와 핸드폰 보는 아해와 급한 전화가 온 아해와
조는 아해와 집중 못 하는 아해와 지각하는 아해와 그렇게뿐이 모이었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교수는 제1의 아해에게 화장실은 수업이 끝나고 가라고 소리를 치오.
제2의 아해에게는 핸드폰을 보면 쫓아내겠다고 소리를 치오.
제3의 아해에게는 왜 전화 때문에 자기 수업을 방해하냐고 소리를 치오.
제4의 아해에게는 대학생이나 되어서 학교에서 조냐고 소리를 치오.
제5의 아해에게는 그럴 거면 차라리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를 치오.
제6의 아해에게는 지각할 거면 그냥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오.

(교실은 모 교수의 강의실이 제일 적합하오.)
6인의 아해가 교수에게 한 소리 들을 일을 아니하여도 좋소.

교수와 학생 간의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제기와 분석

교수, 혹은 선생과 학생 간에는 절대 메울 수 없는 ‘틈’이 존재한다. 공부의 양이나 살아온 세월, 경험도 그렇지만 강의실 내 에서 차지하는 권위나 권력의 차이가 그 틈의 꽤 큰 부분을 만 들 것이다. 학생들을 마주보고 교단에 서는 교수들 중에는 그 틈을 인지하고 그것을 조심하며 학생들을 존중하는 교수도 있고, 반대로 그 틈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교수도 있다. 그리고 그 틈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 학생들 머리 위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교수도 있다.

첫 장의, 이상의 시 <오감도 시제 1호>를 바꿔 본 시는 우리 학 교의 꽤 유명한 교양 수업들을 진행하는 모 교수에 관한 이야 기이다. 모 교수는 교양학부에 속해 있음 에도 불구하고 호불 호가 거의 극단적인 수준으로 갈리는 선생으로 유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수업을 배우는 것이 많다며 좋아하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권위적 이고 학생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싫어한다. 오늘 물어보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권위적인 교수.

교수와 학생은 평등하지 않다. 교수는 학생의 성적을 평가할 권한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실 밖으로 나서는 그 순간 교수와 학생은 다시 평등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수에게는 학생의 ‘성적’을 평가할 권한은 있지만 ‘학생’을 평가할 권한은 없다. 수업에서 교수가 ‘학생의 성적’이 아닌 ‘학생’을 평가하기 시작하는 순간, 교수는 학생과 자신 사이의 권력 차이를 이용하고 강화하는 셈이 된다. 이런 행동은 꼭 ‘하는 사람만’ 한다. 학생을 존중하려 애쓰는 교수는 늘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지만, 교수와 학생 사이의 권력관계에 무감각 하거나 이를 오히려 이용하는 교수는 늘 ‘어떤 행동’을 반복한다. 예를 들면 이런 행동.

학생이 급한 전화를 받기 위해 강의실에서 잠깐 나가려 하자 불러 세워 자신의 수업을 방해한다며 윽박지르는 행동, 핸드폰을 보는 학생에게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며 면박을 주는 행동. 일부 교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또 다른 수업이나 아르바이트 따위의 다른 일정이 있건 말건 주말이나 공휴일에 ‘답사’ 라는 명목으로 학교 외부로 학생들을 부르고 출석을 부른 뒤 출석여부를 과제 점수에 반영하기도 한다.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에 학생들이 힘들어하건 말건 시쳇말로 ‘개썅마이웨이’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교수 앞에서 학생들은 반항조차 할 수 없다. 교수가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성적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에게 미운 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 교수가 얼마나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든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 하나. 하다못해 공자님도 그렇게 안 했는데

꽤 많은 교수들이 강의와 강의실이 자신의 오롯한 지배에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 여긴다. 과연 강의실은 교수, 혹은 강의자의 것일까? 2011년 방송된 EBS <다큐프라임-선생님이 달라졌어요>에 출연한 경기 보평초등학교 서길원 교장은 “가르치는 것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관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교육자는 피교육자와 관계한다.

강의, 혹은 수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닌, 교수와 학생 간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이다. ‘피드포워드feed forward’가 제시되면 반드시 ‘피드백 feedback’이 형성된다. 학생이 강의에 집중을 못 한다면 강의자의 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한 것이며 이것이 해당 교수의 ‘피드포워드’에 대한 학생의 ‘피드백’이다. 물론 커뮤니케이션에서도 ‘권력관계’ 라는 것이 작용한다. 하지만 그 권력관계를 이용하거나 심지어 공고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지식 전달과, 이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규제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학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에 가깝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생을 무조건 적으로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행위는 강의자가 학생의 피드백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학생을 공격하는 행위이며,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의 책임을 모두 학생에게 전가하는 행위이다.

시대는 변화하고 학생 개개인은 모두 제각각이며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일방적 주입은 나태한 수업운영이다. 하다못해 공자님도 제자가 “어짊(仁)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제자마다 그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고려하여 그에게 맞는 답을 주었지, 한 번도 똑 같은 답을 하지는 않았다.

 

문제 둘. 수업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이뤄지는가?

한 명의 리더보다 열 명의 시민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학교에서 “그 수업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은 간과할 수 없는 물음이다. 대한민국은 몇 차례 민주화 항쟁과 87년의 타협Pact을 통해 현재에 이르게 된,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민으로서 자유를 지니고 있다. 물론 “자신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범 하지 않는 선까지.”라는 말처럼, 강의실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예컨대 소리를 키워 두고 게임을 한다거나, 수업 중에 그 안에서 전화를 받는 등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들이나 의도적으로 강의를 방해 하고 민폐를 끼치는 행위들은 하면 안 되겠지만, - 이것은 문명의

차원이기도 하다. - 이것이 교수가 강의실에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지각을 했다면 출결점수를 깎으면 된다. 남에게 폐가 될 정도로 요란스럽지 않다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정도야 해당 교수를 제외한 강의실의 모든 사람이 양해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단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 시민을 윽박지르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제한하거나 비난하는 행위는 유감스럽게도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 즉, 교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 수업권의 제한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일이며, 전혀 민주주의적이지도 않다.

수업 때마다 “헌법에 혁명 정신이 적혀 있는 국가는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국은 두 개의 혁명 정신(민족혁명과 민주 혁명)이 적혀 있다.”며 혁명 정신을 강조하는 교수가 강의실 밖으로 나간다고 불러 세우고, 핸드폰을 본다고 윽박지르며 혁명정신과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이는 것은 최소한 아이러니이고, 솔직히 블랙 코미디다.

문제 셋. 돈 내고 혼나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엄밀히 따지자면 학교는 (더럽게 비싸기나 하지만) 돈을 받고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이고, 학생은 돈을 내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소비자다. 원론적으로는 서비스의 소비자가 그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에 태만하거나 그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 이상 무어라 할 수는 없다. 학생들은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를 지닌 것이지 ‘의무’를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을 윽박지르고 화내지 않아도 교수는 이미 학생을 통제할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바로 ‘성적’이다. 이미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학생들을 통제하려 하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권위주의적이고, 동시에 불공정하다.

학생이 교수의 권력을 견제하는 방법은 학기가 끝난 후 강의 평가가 있으나, 강사가 아닌 정교수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이른바 ‘철밥통 강사’에게는 사실상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반면 학생들은 그런 부류의 수업들에서 성적과 교수의 권력 남용이라는, 두 가지의 문제를 함께 떠안고 한 학기를 보내야 한다.

재미없는 이야기들의 반복인 것 같지만, 권력관계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렵거나 어쩌면 극복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꿇어라.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같은, 만화 대사 같은 언행을 기본적으로 서비스의 공간에서 일삼는 것은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짓이다. 나이 많고 경험 많고 아는 것 많고 가방끈 길다는, 그러니까 권력관계의 아랫목 상석을 차고 앉았다는 것이 윗목에 쪼그려 앉은 이들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라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교수 말 들으면 교수는 오래 살아도 나는 오래 못 사는 법이다. 말마따나 달나라도 가는 21세기에 이 무슨 폭력적인 일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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