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프로불편러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을 ‘프로불편러’라고 비꼬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뭘 이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 사소한 일일까?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학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고, 그런 일들에 상처받는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래서 기자는 기꺼이 프로불편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 나는 프로불편러다.
‘병신’ 같은 게 뭔데?
술자리, 강의실, 캠퍼스 그 어디든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웃음소리와 함께 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야, 이 병신아.” “병신이냐?” 하지만 이런 장난스럽고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농담에 웃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 학우들이다. 병신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기형이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이미 병신이라는 욕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확장됐다고 하더라도 그 어원과 용례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혐오표현을 결정짓는 것은 비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이다. 이미 당사자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부모연대 등이 병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당사자들이 불쾌함을 느끼고 상처를 받는다면 그 단어의 사용을 지양하는 것이 옳다.
‘성희롱’, 그냥 농담이라고?
세종대학교를 비롯해 많은 대학교들의 익명 페이스북 게시판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글이 있다. 대학 내 성희롱에 대한 고발글이다. 특히 SNS가 보편화된 요즘은 당사자가 볼 수 없는 단체 채팅방 안에서 성희롱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여학생들의 외모와 몸매를 품평하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으며, 몰카 및 성희롱, 심지어는 강간과 같은 성폭행까지도 농담의 소재로 사용하곤 한다. 여학생들은 실제로 그런 농담을 듣거나 목격한 뒤 불쾌감을 느끼더라도 남들이 다 웃어넘기는 분위기에 참고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남학생들은 항변한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다들 하는 얘기라고. 다들 웃어넘기는 얘기라고. 하지만 정말로 다수가 그 농담을 웃으며 넘겼다고 하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건 성희롱이다.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불리는 지성의 공간인 대학에서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짱개’가 뜻하는 것은?
우리 학교에는 수많은 외국인 학생들이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 캠퍼스를 걷다 보면 심심찮게 중국어로 대화하는 학생들, 히잡을 쓴 학생들을 마주칠 수 있다. 하지만 글로벌한 학교와는 달리 우리의 마인드는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 같다. 중국 음식을 먹을 때 ‘짱개 먹자’고 표현한다거나, 중동 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기피하고, 일본인에 대한 모욕과도 같은 언사를 스스럼없이 하는 식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지하지 않는 것은 21세기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교환학생, 해외취업 등 해외로 진출한 기회가 무궁무진한 우리에게 인종차별, 민족차별 등의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단일민족의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게이’라는 말이 웃겨?
조금이라도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남학생, 머리가 짧고 성격이 호탕한 여학생은 심심찮게 이런 말을 듣곤 한다. 너 게이냐? 너 여자 좋아해? 농담하듯 던지는 말이지만 실제로 성소수자들은 그런 말들에 상처를 받는다. 본인을 향하는 말이 아니어도 그렇다. 누군가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비하하는 조로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이다. 또한 술자리에서 동성끼리 동시에 게임에 질 경우, ‘게이샷’, 혹은 ‘레즈샷’이라는 구호를 연호하며 술을 마시게 한다. 몇몇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남자끼리, 여자끼리 더럽다며 장난스럽게 웃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자리에 성소수자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LGBT*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은 교내에 존재한다. 그들은 선배일 수도 있고, 동기일 수도 있고, 후배일 수도 있으며, 교직원일 수도 있고, 졸업생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성정체성은 농담으로 소비될 영역이 아니다. 그런 농담은 그 자체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첫 글자를 따서 축약한 용어.
표현은 자유지만, 혐오는 자유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람은 많고, 싫어하는 것도 가지각색이다. 오이도 싫어하고, 가지도 싫어하고, 비둘기도 싫어한다. 페이스북에 속속들이 생겨나는 ‘00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페이지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자유롭게 말하고, 여러 방식으로 그 ‘싫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왜? 다들 자유롭게 싫어하는 걸 말하는데, 내가 싫어하는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등에 대해서는 표현하면 안 되는 거죠?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나요? 하는 글들이 여러 학교 대나무 숲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렇다. 대한민국에서는 헌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모든 권리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가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헌법은 이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 예로 모욕죄나 명예훼손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혐오 표현은 이러한 형사적 처벌과는 또 다른 확대된 지점을 가진다.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혐오 표현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인종․성별․연령․민족․국가․종교․성 정체성 등이 된다. 이러한 혐오 표현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소수자를 향한다. 이미 사회에서 차별받고 있는 이들을 더욱 위축시키고 주류로부터 배제한다. 따라서 모욕죄나 명예훼손죄와는 달리 개인 간의 문제 이상으로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선은 늘 표현의 자유와 부딪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최소화하면서도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이유가 그 대상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배려하고 보호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인권을 가진다. 인권적 원칙에 따르면, 사람이라면 당연히 합리적 이유 없이 상처받을 표현을 들어서는 안 된다. 세계인권선언과 주요 국제인권조약의 기초는 차별금지와 평등이다. 세계인권선언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의견 및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차별이나 차별의 선동에 대해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규제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이다. 권리의 행사에는 특별한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권리 등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그 자유가 일정한 제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표현 규제보다는 혐오 없애기!
혐오표현을 규제하려는 노력은 다양하다. 앞서 언급한 모욕죄, 명예훼손죄 등 사법적 절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인 개입은 사후적 처벌이다.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예방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표현을 규제한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혐오’를 없애고자 해야 한다. 이 문제는 얼핏 표현의 자유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부족, 차별적 권력 관계에서 나온다.
결국은 혐오표현에 대한 논쟁을 종결할 실마리는 ‘인권 의식’이다. ‘병신’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기 전에 이 말을 듣고 가슴 아플 장애인과 그의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고, ‘게이스럽다’라는 말을 내뱉기 전에 성소수자의 기분을 생각해보자. 세계인권선언 29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을 보장하여야 한다. 나의 인권만큼이나 타인의 인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권감수성이 풍부한 사회가 온다면 혐오표현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와 규제를 놓고 논쟁할 일이 없을 것이다.
배소현 기자 hyun2@sejongalli.com
박채원 기자 itsmechae@sejonall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