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화)

대학알리

세종대학교

괜찮아 울어도 돼, 사실 생협은 없거든

 

 

학내 편의점의 물가가 더 낮아질 순 없을까요? 자판기의 음료수 가격을 더 내릴 순 없을까요? 더 싸고 맛있는 학식을 먹을 순 없을까요? 아니면, 그 가격을 학생들이 직접 정할 순 없을까요?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불가능을 현실화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세종대. 대신 과거형입니다.

 

학내 물가를, 학생들이 직접 정한다고요?

우리 학교엔 ‘세종대학교 생활협동조합’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줄여서 생협이라고 부르는 이 회사는, 학 생식당, 편의점, 자판기, 카페 등 학내 매장을 독점 운영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가 원래부터 있던 건 아니다. 과거로, 조금 멀리 돌아가보자. 30년전, 80년대의 우리 학교 학식은 너무 비싸고 맛이 없었다. 얼마나 별로였냐면, 학식 때문에 학생들이 식당을 부수고, 데모를 할 정도였다. 결국 학생들의 요구 끝에 1987년, 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식당 운영권을 넘겨줬다.

 

그리고 총학생회 산하기구인 학생복지위원회가 직접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학생회가 운영하는 학식이라니, 신세계가 열린 것 같 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학생회는 매년 바뀐다는 것. 그들이 임기를 마치거나 졸업을 해버리면 담당자가 바뀌게 되고, 사업에 연속성이 없으니 식당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돈을 다루는 사업인데, 별다른 감사기구도 없으니 투명성이 보장될 리 없는 것도 큰 문제였다. 결국 10년 후에는 ‘공동관리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학생 측, 교수 측, 학교 측의 대표자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자체 감사기구를 두는 등 학내 매장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이번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불법’이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무시무시한 소리인고 하니, 음식을 팔고 음료수, 커피를 팔며 세금도 내야했지만, 영업허가도 없는 임의단체였던 셈. 이를 위해선 합법적인 회사가 필요했다.

 

2001년, 학식계의 신세계가 열렸다

그래서 탄생한게 ‘세종대학교 생활협동조합(생협)’이라는 학내 기업이었다. 그런데 기업 구조가 특이하다. 일반적인 ‘주식회사’가 아닌 ‘협동조합’ 형태인 이 회사는 최대주주가 학생이었다. 대표이사(이사장)도 학생이었다.
협동조합은 주주 대신 조합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다른 점은 1주 1표가 아니라, 1인 1표라는 거다. 돈 말고 머리수가 많은 게 장땡. 교수, 직원, 학생, 모두가 조합원으로 참여하지만 머리수가 가장 많은 학생의 의결권이 가장 많으니 학생들의 의견이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대신 전문적인 운영을 위해 산하에 사무국을 두고 정규직 직원들을 채용해 경영을 맡겼다.

 

세종대 생협은 주인이 학생이라, 비싸게 팔아 돈을 많이 남길 필요가 없었다. 돈을 남겨봐야 어차피 학생 돈 이기 때문에 그냥 원가에 팔기만 하면 됐고, 그러고도 남은 돈은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쓰면 그만이었다. 생협은 명절 귀향버스비 지원, 학과MT 물품 지원, 택배 보관, 팩스 수발신 등의 서비스를 하기도 하고, 요리 콘테스트 등의 행사를 개최하며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해 김장 나눔과 연탄 나눔 등의 봉사활동을 정기적으로 진행했다. 이렇게 세종대 생협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면서 여러 대학의 모범사례로 평가됐다. 이후엔 다른 대학교에도 생협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일본 대학들이 세종대 생협에 견학을 오기도 할 정도였다.

 

나의 카페, 나의 식당, 나의 학교 그리고 생협
 

학교 측의 횡포가 시작됐다

학교 측은 돈 안되는 생협 대신 외부 상업시설을 유치시키려고 했고, 생협을 없애기 위해 열정을 쏟아 부었다.

 

학교 측은 2011년, 생협과 학교 측 간의 계약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생협 매장들의 명도소송을 제기한다. 명도소송이란 쉽게 말하면, 내 땅을 누군가가 불법 점거하고 있으니 쫓아내달라는 소송이다. 그러나 애초에 생협은 학교와 학생 측의 고민과 합의 끝에 탄생한 학내 기업인데, 계약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잘 쓰던 우리과 과실을 학생들이 불법점거하고 있다면서, 학생회장에게 소송을 건 것과 마찬가지인 셈. 학생들의 반발은 안봐도 블루레이. 생협을 지키기 위한 학생들의 1인 시위가 이어졌고, 총학생회는 대양홀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광진구 내 14개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광진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는 세종대 생협 지지 성명서를 냈다. 또한 대학생협 연합회, 이학영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등은 대양 홀 앞에서 ‘생협 강제철거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2년, 결국 학교 측은 생협이 운영하던 80개의 자판기와 군자관·진관홀 식당과 편의점을 내주는 조건 으로 소송을 취하했다. 이렇게 위기를 넘기나 싶었지만, 사실 이 때부터 생협의 운명은 암흑으로 빠져 들어간다. 외부업체가 입점하게 되면서 자판기 가격과 군 자관·진관홀 식당·편의점의 가격이 올라 학생들의 부담이 커진 것은 물론이고, 생협의 재정이 크게 악화되면서 나머지 매장에서도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2013년, 충무관에서 가스가 누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후 실행된 소방 점검에서 생협의 우정당 매점과 카페가 입점한 건물이 불법 건축물인게 드러났다. 무허가 건물을 지은 것은 학교였지만, 학교 측은 이 때다 싶어 이 건물의 철거를 요구했다. (이 건물은 현 우정당 건물과 대양홀 사이에 있던 건물로 현재는 철거됐다. 1997년 야간대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 측이 지은 가건물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세종대 생협

이렇게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생협의 재정 여건은 갈수록 나빠졌고, 2014년 학교 측은 임대보증금 1억 원, 월 임대료 1000만원, 수도광열비 700만원 납부 를 요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학식이나 카페, 편의점의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졌다. 게다가 2011년에는 학생들이 앞장섰던 것과 달리, 총학생회에서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생협을 지키고자 하는 학내 여론도 크게 줄었다.

 

생협을 지키고자 하는 일부 학생들과 생협 사무국 직원들은 사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생협 측은 “지금의 생협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해고와 구조조정, 그리고 가격인상이 불가피하다” 며 “이는 구성원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생협의 본래 목적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저렴한 가격과 학생복지 를 위해 만들어진 생협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대학 생협의 선구자 로 학식의 신세계를 열었던 세종대 생협은, 학교의 횡포로 인한 재정난, 그리고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 쓸쓸히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세종대 생협은 이제 세종대 역사의 한 페이지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만일 이 생활협동조합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떨까?

 

세종대 08학번 졸업생이자, 세종대 생협의 전 이사장인 고건희 씨는 “가능성 있는 얘기”라며 “생협의 부활은 전적으로 세종대 학생들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생협이 존재하던 시절, 학생들은 생협을 그저 당연히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생협의 큰 고민 중 하나는 학생들의 무관심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면서 학생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생협이 학교의 횡포로 인해 위기를 맞을 때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학생들의 권리와 복지는 학생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생협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었다. 학교는 학생들의 배움의 터전이고, 생활의 터전이지만 학교 운영은 늘 일방적이었다. 전공과목이 축소되고, 장학금이 줄어들고, 학사과정은 제멋대로 바뀐다. 그런 학교 내에서 생협은 작은 희망이었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힘, 자발적인 의견으로 직접 복지사업을 주도했다. 나의 카페이자, 나의 식당이었고, 나의 학교였다. 우리는 다시 생협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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