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매미가 우는데 벌써 개강이다. 강의실에 도착해 방학 내내 얼굴은 코빼기도 보지 못한 동기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창밖을 보니 곧 비가 올 모양인지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뒤에 앉은 학우들이 지난 밤 본 TV 프로그램에 대해 입을 모아 떠든다. 남의 얘기를 엿듣는 기분이라 어쩐지 겸연쩍지만 화두가 화두인지라 관심이 간다. 커밍아웃을 한 한 방송인에 대한 이야기.
“야, 난 진짜 내 가족이 게이면 두드려 패서라도 정상으로 만들 거야.”
아무렇지 않은 농담조의 말에 몸이 움츠려들었다.
“솔직히 성소수자들은 저 멀리 외딴 섬에 격리시켜서 자기들끼리 살게 해야 돼.”
“그 사람들도 사람인데 그럴 것까지야 있냐? 난 동성애자들 존중하고 이해해. 나만 안 좋아하면 되는 거지.”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은 같은 강의실 안에 나 같은 사람이 있는 줄 알까? 그들은 한참 낄낄거리다 금세 다른 이야기로 화두를 옮겨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금방이라도 체할 것 같다. 교수님이 들어오고 나서야 강의실이 조용해진다. 비는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강의실에 가득하다.
때마침 과의 단체 카톡방에 개강 총회 장소를 알리는 공지가 떴다. 고민할 것도 없이 불참에 투표했다. 게이샷, 레즈샷을 연호하며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술자리에서 뻔뻔하게 웃고 있을 자신은 없으니까.
오리엔테이션이라 그런지 수업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금방 끝났다. 시간표 어플리케이션을 켜 다음 강의를 확인하는데,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제목에 눈이 간다. [너네는 너희 가족이 동성애자면 어떡할 거임?] 보나마나 뻔한 내용인데 뭘 기대하고 클릭한 건지. 성소수자에 대한 곡해와 혐오로 가득한 댓글을 보고 있다가 결국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 버린다. 이젠 논쟁하면서 감정을 소모하기도 지친다. 회피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쏟아지던 비는 소나기였는지 금세 그친 모양이다. 축축한 녹음 향기가 난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몇 점만이 간간히 떠다닌다. 비는 그쳤는데, 우리 학교에도 *무지개가 뜰까. 나는 쓴 웃음을 삼키며 걸음을 옮긴다. 나는 *시스젠더 레즈비언이다.
* 무지개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심벌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7색의 무지개가 통용되는 것과 달리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는 남색을 제외한 여섯 색이다.
* 시스젠더: 본인의 심리적으로 느끼는 성별과 생물학적 성별이 같은 사람.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로만 느껴질지도 모르는 본 글은 우리 학교 성소수자 학우들의 경험담이 속속들이 녹아있는 실화이다. 지난 가을, 학교 벽에 내붙은 한 대자보를 목격한 학우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시작되어 끊임없이 존재를 외치는 그 대자보는 세종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이리스’가 학교 안의 혐오에 맞서 모습을 드러내는 첫걸음이었다. 이처럼 성소수자들은 우리 학교 안에서 모두와 함께 살아간다. 그 누구도 지금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당신의 옆을 지나간 그 학우가 성소수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기자는 ‘이리스’의 회장 J 씨와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자는 인터뷰에 앞서, 인터뷰를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잖아요.” A 씨는 어떤 방식이든 끊임없이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소수자에게 연대란
“누군가 내가 이상하다고 말할 때 그게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이요.” J 씨에게 연대란 이런 의미다. Z 씨에게 연대란 ‘내 편’이고, A 씨에게 연대란 ‘고독의 극복’이다. 사회로부터 돌연변이로 낙인찍히는 성소수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독이 뒤따른다. 연대란 그런 고독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준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혐오’ 속에서 ‘나도 잡아가라’며 외칠 힘을 주기도 하고, 모두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성소수자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혐오 세력, 혹은 본인이 혐오 세력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곤 한다. 이는 우리 학교 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 둘이 있을 경우, 게이를 희화화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표현을 들은 K 씨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본인의 정체성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극히 옳은 말을 할 뿐인데도 *아웃팅의 위협이 따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거나, 동성애를 척결해야 한다거나. E 씨는 이런 말을 일상에서 들을 때마다 분노와 함께 좌절감과 괴리감을 느낀다. 자신과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다.
J 씨는 성소수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이해한다, 이해하지 못 한다 왈가왈부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말한다. 이성애자인 경우에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지 않는가. 본인을 바이섹슈얼라고 밝힌 N 씨는 단어 하나를 고를 때에도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무척 고심한다. ‘너희 레즈비언 본 적 있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 궁금해.’라고 말하는 N 씨의 친구들은 N 씨가 바이섹슈얼인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말할 수 없고, 감정을 숨겨야 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전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에 환멸과 자책감을 느껴요. 싸우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많이 노력하지만 여전히 겁이 납니다.”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
과연 이들에게 학교는 열려 있을까. A 씨는 성소수자가 학내에서 ‘투명인간’과도 같다고 느낀다. 많은 학우들이 자신 옆에는 성소수자가 없을 것처럼 군다는 것이다. K 씨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K 씨는 학내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스스로 열려 있다고 주장하는 학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실제로 성소수자를 마주할 경우 폐쇄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또한 성소수자 희화화에 전혀 거리낌 없는 상황을 많이 봐 왔으므로, 학내 분위기가 성소수자에게 우호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 아웃팅: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혀지는 일.
인권에 '나중'은 없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다. 올해에는 퀴어문화축제에 국가기관인 인권위원회가 참석했으며, 그동안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던 종교계도 일부 참석했다. 동성혼에 대한 인식이 젊은 세대 내에서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만 하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은 사실이다.
여전히 성소수자 인권은 ‘나중에’로 미뤄지고 있으며, 그 사이에 혐오 세력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오해와 젠더에 대한 편견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 혐오 세력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무지와 무관심이 혐오로 변모하는 것은 종이 한 끗 차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오해는 동성 간의 성관계만으로 에이즈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에이즈는 성별에 관계없이 HIV 감염인과의 혈액 교환을 통해 감염되므로, 동성 간 성관계가 에이즈의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에이즈를 무기 삼아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것은 에이즈 환자에 대한 혐오이기도 하다. 에이즈는 혐오의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복지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두 번째 오해는 성소수자에는 동성애자만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소수자와 동성애자를 동일시하며, 다른 성소수자들의 정체성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트랜스젠더와 바이섹슈얼, 안드로진, 인터섹스, 에이섹슈얼……. 일일이 설명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이 세상에는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별지향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연애를 지향할 것이라는 생각, 모든 사람들이 성욕을 느낄 거라는 생각, 모든 사람들이 여성과 남성,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 이는 모두 고정관념이고, 타파해야 할 구시대적 관념이다. 이 세상에는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에이로맨틱이 있으며,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에이섹슈얼이 있고, 여성과 남성이 아닌 제3의 성별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지금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선후배가, 당신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군가가 성소수자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모른다는 이유로 함부로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 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다른 사랑은 죄가 아니야. 다른 길은 없어. 난 이렇게 태어났거든.
그렇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들의 정체성에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이다. 모두가 그런 태도를 가질 때, 우리 학교에도 아주 예쁜 여섯 색의 무지개가 뜰 것이다.
배소현 기자 hyun2@sejongall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