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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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Week 6일차] 인권과 평화의 일본 여행기

인권과 평화의 일본 여행기

 20세기초, 어떤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온다. 그리고 그 가난한 나라에 전쟁이 터지자 이 노동자들은 졸지에 난민이 되어 일본에 남게 된다. 이 가난한 이 나라는 1894년에 죄인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시체를 전시하는 야만적인 형벌을 집행해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일본의 철학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나라를 “야만국”이라고 부르며 혐오했고, 다수 일본 지식인들도 후쿠자와와 같은 생각이었다.

본 기자는 지난여름 이 ‘야만국’에서 온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을 여행할 수 있었다. 6개월마다 한 번씩,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이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진행하는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권캠프’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일본 학생들에 따르면 몇몇 일본인들은 이 난민들을 “조센징”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인타운의 입구. 문 이름이 '백제문' 이다.

 

 

이쿠노 한인타운, 오사카의 난민촌

캠프 첫 번째 답사지는 이쿠노 한인 타운. 이곳은 한류 팬들의 성지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K-POP이나 한국 음식점들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일제에 땅을 빼앗겨 농사를 못 짓게 된 한국 농민들이 경제난민이 되어 일본으로 넘어와 난민촌을 형성한 것이 한인 타운의 기원이다. 그 중에는 제주도민이 특히 많았는데, 훗날 제주 4.3 사건 때 친척들이 있는 일본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이처럼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한인 타운도 사실 한국에서 온 난민들이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때 그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된 탓인지 서점 가판대에는 혐한서적이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한인타운 인근의 시장. 곧곧에서 한국 음식을 팔고 있다.

 

한인시장 내부에 위치한 서점에 진열된 혐한서적.

 

 

 

탄바 망간 기념관,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약한 노동환경

캠프 3일차에는 탄바 망간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곳은 원래 망간이라는 무기를 만드는데 쓰이는 광물을 캐는 광산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의 하층민, 그리고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까지 이 광산에 투입했다. 이 기념관은 당시 망간을 캐던 갱도를 관람용으로 개조해 놓았다. 애초에 갱도가 너무나도 좁아서 관람을 위해선 갱도를 넓혀야 했는데, 일부를 당시 그대로 유지시키고, 그 안에 마네킹을 집어넣어 당시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약한 환경에 시달려야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라면 이 갱도 입구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보낸 노동자상이 세워져 있었다. 전화도 터지지 않을 정도로 깇은 타국의 산속에서 뜬금없이 민주노총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반가움인가?

 

탄바망간기념관 내부 모습. 당시 노동자들의 열약한 근무환경을 재현해 놓았다.

 

  

탄바망간기념관 갱도 입구에 위치한 노동자상.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기증한 것.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조선인

이번 캠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다름 아닌 재일 코리안들과의 만남이었다. 캠프 이틀째에는 재일 코리안 안성민씨가 본인이 창작한 판소리를 캠프 참가자들에게 선보였는데, 그 내용은 제주 4.3을 피해 일본으로 온 어느 재일 코리안 여성의 삶이었다. 캠프 삼일차에는 망간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병에 걸려 돌아가신 분들의 유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고, 또 일본에서 시민 운동가로 활동하며 재일 코리안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사람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판소리 공연중인 안성민씨

 

하지만 그들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국적이 다름 아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었다. 그들은 통일된 조국에서 살기 위해 아직까지 일본에 남아 있는 것이기에 분단 이전의 ‘조선’ 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 학생들은 이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본 기자가 ‘조선인’을 만난 소감에 대해 말하자 통역을 맡은 오사카 대학교 마리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른 표현을 쓸 것을 제안했다. 조선인의 일본식 발음인 “조센징”은 일본에서 재일 코리안을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이 사람들을 근대화 이전의 “야만국” 사람들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번 캠프를 주관한 리츠메이칸 대학교에는 재일 코리안들이 유독 많아서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었다. 리츠메이칸 대학교 18학번이자 재일 코리안인 조관태씨는 “이 캠프에 오기 전 까지 재일교포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해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리츠메이칸 대학의 또 다른 재일 코리안 조남이씨는 “일본에서 우리 정체성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고 한탄하기도 했다. 뒤이어 조관태씨는 “이렇게라도 다른 일본 사람들과 이 주제로 여행도 하고 토론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의 캠프 참가자들

 

끝으로...

난민문제는 재일 코리안이 박대당하는 것에 분노하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판단할 순 없는 문제다. 하지만 앞서 보았다시피 100년 전에는 한국인들이 아시아를 떠도는 난민들이었다. 그렇기에 당장 난민을 환영하진 못하더라도 “난민이 왜 이어팟을 끼고 있냐” 같은 말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권 캠프는 경계인이던 재일 코리안과 일본 학생들을 연결시켜주고, 그걸 함께하며 난민이라는 낯선 문제를 마주한 한국 학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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