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세월호 참사 4주기 하루 전 reborn 기억 예배, 기억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 김형훈 기자 세월호 참사 4주기 하루 전인 4월 15일, 안산 화랑유원지 대공연장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억 예배가 열렸다. 오후 4시 16분, 종소리와 함께 시작한 예배는 정경일 원장의 기도와 장인환 목사의 설교로 시작되었다. ⓒ 김형훈 기자 설교 후에는 성찬식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유가족들에게 힘이 될 것을 약속하는 의미였다. 많은 예배 참가자들이 빵을 포도주에 적셔 먹었다. 또한 세월호 유가족 8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416 합창단’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래 ‘그날이 오면’을 부르며 추모 분위기를 더했다. ⓒ 김형훈 기자 예배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다 함께 합동분향소로 향했다. 나무 십자가 하나와 노란 리본 두 개,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노란 팻말을 든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다른 참석자들도 줄을 지어 분향소로 행진했다. 행진하는 모든 이들은 줄을 지어 가는 와중에도 윤민석의 ‘잊지 않을게’를 부르며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되새겼다. ⓒ 김형훈 기자 304개의 노란 팻말들의 뒤를 따라 분향소로 들어갔다. 국화꽃을 받
세월호 참사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길 수도 있지만 내가 사회문제나 현상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가지게 해 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참사가 일어난 이후로 하루도 세월호와 멀어진 적이 없었고 매일 더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눈이 마음을 따라 자연스럽게 학교 게시판에 붙은 ‘별 헤는 밤’ 프로그램 종이로 향했다. '별 헤는 밤'은 이번 해로 3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모여 팽목항, 목포 신항을 거쳐 안산 기억교실과 합동추모분향소를 둘러보는 무박 2일의 일정이었다. 변명이지만, 그 동안 교통문제 때문에 가길 망설였던 팽목항과 기억교실, 안산 합동추모분향소를 가는 모든 일정이 내 참가의사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목포 신항에 직접 가서 멀리서나마 육안으로 세월호를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날 떨리게 만들었다. 망설임 없이 참가를 신청했고 한 달이 좀 안되게 줄곧 이 프로그램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4월 7일, 별 헤는 밤 참가자들이 한양대 한 강의실에 모였다. 원래는 7시가 시작이었지만 멀리서부터 오는 조도 있어서 좀 늦게 시작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팽목항에 세월호가 가라앉은 날,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그러나 한 유가족은 말한다. “여전히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전 대통령 박근혜는 촛불의 바다 속에서 내려갔고, 세월호는 검은 바다를 가르고 올라왔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왜 여전히 변한 게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기자는 ‘기억과 다짐의 버스’ 행사에 참가해 서울시 사회단체들과 함께 목포 신항, 안산 기억의 교실, 세월호 참사 분향소, 광화문 추모식을 다녀왔다. 그 날을 기억하고 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다짐을 하기위해, 희생자들의 흔적을 찾고 유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15일 밤 열두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집결한 사람들의 옷깃이나 가방 끝에는 노란 리본들이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주로 활동하는 분야는 달랐대도, 슬픔과 분노의 마음은 같았다. 버스가 여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목포, 세월호가 있는 목포신항이었다. 항으로의 접근을 막아놓은 펜스는 이미 노란 리본으로 빼곡해 바람이 불때마다 노란 파도가 이는 듯 했다. 그리고
476개의 참사를 기억하며글을 쓰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2주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메어온다. ‘세월호’라는 이름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기사 들어가는 말에도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7월 7일> 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그냥 꿈에서 깬 것뿐이야." 라는 첫 소절을 듣는 순간, 한 소절만 더 들어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노래를 멈추기도 했다. 세월호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도 있었고 교사도 있었다. 제주도로 여행을 가는 이들, 인천에서 제주도로 화물을 운송하는 운수 노동자들, 배 안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 노동자들도 있었다. 제주도로 가는 그 배 안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하나의 참사가 아니라, 그 날 일어난 476개의 참사다. 그 476개의 참사 중 163개의 참사는 ‘생존’이 되었고, 304개의 참사는 ‘사망’ 이 되었다. 나머지 9개의 참사는 ‘실종’ 혹은 &l
지난 3월 31일, 나눔관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과제로 한창 바쁠 시기에 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우들이 찾아주었다. 데크 뿐만 아니라 자연드림 카페 앞 테이블, 데크 위까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은 입학 이후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간담회는 영상 상영으로 시작했다. 앉아있는 참가자들은 참사 당시의 모습과 추모행진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며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이후 유가족 두 분과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제안자인 용혜인 씨를 모시고 간담회와 질문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이야기의 농도는 짙어졌고, 현장의 분위기는 무거워지는 듯 보였다. 슬픈 기억을 떠올리며 유가족 분들도 눈물을 지으며 말을 잇기도 하셨고, 거기에 응하듯 몇몇 학우들도 함께 눈물을 보였다. 다음은 간담회의 질의응답 내용이다. 권기봉 세월호 참사 이후, 지금까지 개인의 삶은 어떻게 변했나? 창현 아버지: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대리운전 사업을 조그맣게 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광우병 때문에 서울시청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때에도 저는 그냥 뉴스만 보고 말았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엔 그 전에 참석하지 못한
학교로 가는 길단원고로 가며 학생들이 매일 다녔을 길을 걸으니 그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했다. 그 잡힐 것만 같았던 모습들이 내가 겪어왔던,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을 고등학교 생활과 겹쳐 보여 두려워졌다. 그들과 나는 같은 나이였고 같은 고등학생이었다. 나와 그들을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은 차이는 그날 그 배를 탔던 것과 안 탔던 것뿐이었다. 단원고등학교 2층과 3층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억교실이 있다. 교실뿐 아니라 복도와 창문, 교무실까지 국내외에서 온 희생자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기도와 응원의 메시지들이 가득했다. 사실 기억교실은 이곳 저곳 가득 붙어있는 메시지들과 학생들을 기리는 책상 위의 물건들만 없으면 평범한 학교 교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와서 교실을 청소하기 위해 창틀에 널어놓은 걸레,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한 뒤 대충 창가에 올려놓은 칫솔, 놓고 간 삼선슬리퍼 따위의 물건들에서 참사 이전까지의 학생들의 일상이 느껴졌다. 경기도교육청과 단원고는 재학생들의 불편과 정서적 불안, 교실의 부족을 이유로 들며 건물을 새로 지어 새로운 기억교실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게다가 정부는 추모 부지마저 전혀 관
회대알리 세월호 취재팀이 세월호 2주기 특집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장성렬 팀장과 권기봉, 김주환, 송채연, 이지우 네 명의 신입기자들은지난 3월 20일(일) 경기도 안산으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회대알리 기자로서의 첫 취재입니다. 임예현 권기봉 기자가 지난 3월 31일(목) 우리 학교 자연드림 앞 나무데크에서 열린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취재하고 정리했습니다. 세월호, 사고 아닌 참사 2014년 4월의 교실은 곧 있을 수학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반 전체가 다 같이 모여 말 한마디씩 더하다 보면 교실은 금세 왁자지껄해지기 일쑤였다. 16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뒤집혔다.”는 친구의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도 2년이 지났다.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안산에 있는 세월호 합동 분향소를 방문했다. 넓은 공원의 끄트머리 즈음에 분향소가 덩그러니 위치해 있었고, 그 앞을 지키는 경찰들은 어쩐지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분향소 내부로 들어가자 희생자들의 영정과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접했을
회대알리 세월호 취재팀이 세월호 2주기 특집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장성렬 팀장과 권기봉, 김주환, 송채연, 이지우 네 명의 신입기자들은지난 3월 20일(일) 경기도 안산으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회대알리 기자로서의 첫 취재입니다. 임예현 권기봉 기자가 지난 3월 31일(목) 우리 학교 자연드림 앞 나무데크에서 열린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취재하고 정리했습니다.2014년 4월 16일 밤, ‘전원 구조’ 라는 말도 안 되는 오보를 무심히 뒤로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들이 빛을 내며 하늘로 올랐다. 하지만 결국 삼백 하고도 네 개의 빛들도 하늘로 올라 별이 되었다. 그 빛들이 하늘로 오르며 낸 상처들이 불에 데인 것 같은 화인(火印)으로 남았다. 낙인은 사월이 두 번 돌아오고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상처를 지우고 싶다며, 지워야 한다며 날 선 손톱으로 박박 긁어내려는, 심지어 도려내려는 이들이 있다. 2015년 4월 18일. 유가족들은 경찰 차벽에 포위된 채 광화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에 마치 성을 쌓는 것 마냥 차벽을 설치하고 펜스를 쳐서 길을 막았다. 시민들이 길을 지나가
[4월의 종이배] 화인 [4월의 종이배]#.1 안산 합동분향소 [4월의 종이배] #.2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 [4월의 종이배] #.3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 [4월의 종이배]476개의 참사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