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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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4월의 종이배] #. 1 안산 합동 분향소

회대알리  세월호 취재팀이 세월호 2주기 특집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장성렬 팀장과 권기봉, 김주환, 송채연, 이지우 네 명의 신입기자들은 지난  3월 20일(일) 경기도 안산으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회대알리 기자로서의 첫 취재입니다. 임예현 권기봉 기자가 지난 3월 31일(목) 우리 학교 자연드림 앞 나무데크에서 열린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취재하고 정리했습니다. 

세월호, 사고 아닌 참사

2014년 4월의 교실은 곧 있을 수학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반 전체가 다 같이 모여 말 한마디씩 더하다 보면 교실은 금세 왁자지껄해지기 일쑤였다. 16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뒤집혔다.”는 친구의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도 2년이 지났다.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안산에 있는 세월호 합동 분향소를 방문했다. 넓은 공원의 끄트머리 즈음에 분향소가 덩그러니 위치해 있었고, 그 앞을 지키는 경찰들은 어쩐지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분향소 내부로 들어가자 희생자들의 영정과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접했을 때 보다 훨씬 큰 규모의 내부와 그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희생자들의 영정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았다. 그들은 여전히 2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사진 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고등학교 졸업식을 올린 입장에서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는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이 느껴졌다.

주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향소 내부는 이전과는 달리 한적했다. 하지만 그날의 슬픔을 잊지 않고 찾아온 몇몇 가족 단위 조문객들의 발걸음은 조금씩이나마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던 어린 아이들도 엄숙한 분향소의 분위기 안에선 조용해졌고, 어른들은 굳은 표정으로 분향소 내부를 둘러보다 결국엔 모두 눈물을 훔치며 밖을 나섰다. 나는 옆에서 그 상황들을 조용히 지켜보며,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세월호 참사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분향소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다 참사 발생 전 학생들이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정리해둔 자료를 보았다. 그러던 중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한 여학생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내가 저 상황에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실제 사건현장을 담고 있는 사진이기에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이 느껴졌다. 그 날, 그 곳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참담했고 절망적이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라는 문구 아래엔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빼곡한 편지와 노란 리본들이 놓여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의 부모님과 친구들의 한 맺힌 절규를 생각하며 나는 반성했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시간이 그렇듯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다. 작년 고3 시절을 보내며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다고, 세상은 나에게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은 자식을 영원히 가슴에 묻고 끝나지 않을 슬픔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2주기를 바라보는 지금, 그 때와 달라진 것은 없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대규모 분향소와 그 안의 잘 정돈된 모습은 마치 대한민국의 허례허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듯 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번지르르한 겉모습으로 문제 자체를 덮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겉은 화려하나 그 내부는 한없이 부실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이것이 세월호가 ‘사고’가 아닌 ‘참사’인 이유이다.

이지우

향내음 나는 그곳으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 라고 적힌 분향소 옆에 솟아있는 철제 플래카드에는“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이여 통한의 바다를 떠나 편히 잠드소서.”라고 적혀 있다. 7반 故 이정인 학생의 아버지 이우근 씨는 “원래 둘 다 사고라고 적혀 있었는데, 유가족이 18개월 동안 항의를 해서 겨우 하나만 참사로 고쳤다.”고 전했다. 사고와 참사는 의미는 비슷할지 몰라도, 느낌이 다르다. “사고”는 “참사”에 비해 사건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어조가 강하기 때문이다. 단어 선택 하나에도 어떻게든 책임을 줄이려고 발버둥치는 정부의 몸부림이 보였다.

그 안을 가득 채운 향내음에 비해 분향소는 한산했다. 세월호 참사가 점점 잊혀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우근 씨는 “누군가 한국인은 ‘냄비근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많이 온다. 참사 이전에는 이런 사건이 터지면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너희는 이런 것 몰라도 돼’라고 했는데,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찾아와 기억하려고 한다. 덕분에 힘이 난다.”고 전했다. 하지만 기억을 되새기도록 해주는 분향소도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니다. 인양이 완료되고 9명의 실종자들이 돌아오면 분향소는 사라지게 된다. 분향소 자체가 상중(喪中)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양이 완료되고 실종자들이 돌아온다면 상을 마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가 인양되면 분향소도 없어지는데 기억교실마저 없다면 남는 것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우근씨는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와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희생자들이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참배를 하고 단원고로 향했다.

김주환

 

 

[4월의 종이배] 화인

[4월의 종이배] #.2 단원고등학교 기억교실

[4월의 종이배] #.3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

[4월의 종이배] 476개의 참사를 기억하며

세월호 2주기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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