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화)

대학알리

성공회대학교

[세월호 참사 3주기] 배는 인양되었지만 진실은 여전히 바닷 속에 있다

 

세월호 참사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길 수도 있지만 내가 사회문제나 현상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가지게 해 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참사가 일어난 이후로 하루도 세월호와 멀어진 적이 없었고 매일 더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눈이 마음을 따라 자연스럽게 학교 게시판에 붙은 ‘별 헤는 밤’ 프로그램 종이로 향했다. '별 헤는 밤'은 이번 해로 3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모여 팽목항, 목포 신항을 거쳐 안산 기억교실과 합동추모분향소를 둘러보는 무박 2일의 일정이었다. 변명이지만, 그 동안 교통문제 때문에 가길 망설였던 팽목항과 기억교실, 안산 합동추모분향소를 가는 모든 일정이 내 참가의사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목포 신항에 직접 가서 멀리서나마 육안으로 세월호를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날 떨리게 만들었다. 망설임 없이 참가를 신청했고 한 달이 좀 안되게 줄곧 이 프로그램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4월 7일, 별 헤는 밤 참가자들이 한양대 한 강의실에 모였다. 원래는 7시가 시작이었지만 멀리서부터 오는 조도 있어서 좀 늦게 시작했다. 첫 번째로, 업사이드다운 영화를 시청했다. 몸은 막 잠든 것처럼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데 유독 손가락 10개만 멍이 시퍼렇게 들어있었던 고운이. 무엇이든 열고 나가보려고 두드리고 던지지 않았을까, 기울어진 배 안에서. 상상 속에서 이미 난 가라앉고 있었다. 눈을 떠 상황을 보고 있는데도 답답했다. 희생자와 유가족 분들은 오죽했을까. 아직도 수학여행이 출발하기 전, 그 시간에 멈춰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아픔을 다 겪고도 몇몇 사람들의 일방적인 분노에 또 상처를 입었지만 꿋꿋이 견디며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세월호 참사 초기엔 ‘살리지 못했는가, 살리지 않았는가?’가 궁금했다면, 지금은 ‘왜 살리지 않았는가?’로 바뀌었다. 두 번째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 '왜 안 살렸는가?'에 대해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주제준 정책기획팀장님의 강의를 들었다. 세월호 유가족 분들과 함께 지내온 시간부터 겪었던 고충들, 인양까지의 사건들, 박근혜의 7시간까지도 추측해보았다.

 

'구해달라'는 손짓이 나부끼는 공허한 팽목항

새벽의 팽목항은 춥고, 사람의 발길과 흔적은 많았지만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빛 바랜 리본들이 흘러간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혜원 기자

 

꼬박 여섯 시간이 걸려 도착한 새벽의 팽목항은 춥고 공허했다. 사람들의 발길은 가득했지만 흔적들엔 온기가 없었다. 짠 냄새가 진동했고 그게 눈물인지 바다물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천천히 팽목항을 둘러보았다. 철봉에 걸려있는 작은 종들이 눈에 띄었다. 바람이 불 때면 또랑또랑 맑은 소리가 들렸고, 여러 개가 같이 소리를 낼 때면 꼭 말소리 같았다. 노란색이 바래져 상아색을 띄는 리본들은 흘러간 시간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청와대가 반으로 갈라진 스티커에는 "where is president?"라고 써 있었다. 스티커를 보면서 되물었다. "안전은? 국가는? 국민은?"

 

팽목항에 나부끼는 현수막들. ⓒ이혜원 기자
 

미수습자 9분을 향한 현수막들이 바람에 막 흔들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우리를 반기면서도 빨리 구해달라고 몸짓하는 것 같았다. 유독 눈에 띄었던 박영인 미수습자 현수막 밑에 놓인 세 켤레의 축구화. 한 켤레의 축구화 코 끝에 적힌 글자는 회색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닷바람을 만난 탓에 흰색이었던 축구화도 옅은 오렌지 빛으로 변해있었다. 4주기에는 미수습자 분들 모두가 집에 돌아가셔서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길 바라며 숙연한 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큰 세월호 리본 모형 밑엔 개봉되지 않은 초코파이와 음료수가 있었다. 나눠먹기엔 부족한 양이었다. 친구 먼저 구명조끼를 챙겨줬듯 위에서도 친구 먼저 한 입 챙겨주고 있을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파왔다.

현수막 위에 놓인 바람개비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 사이 해는 부지런히 떠올랐다. 무겁게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가족들은 목포 신항에서도 여전히 농성 중

3년 세월을 기다리는 동안 지쳐버린 것만 같은, 처참한 세월호의 모습. ⓒ이혜원 기자

 

다음 목적지인 목포 신항 근처 공원에서 간단히 도시락으로 아침을 챙긴 뒤 다시 차로 이동했다. 가는 길 내내 노란 현수막들이 보였다. 목포 내 각종 모임이나 시민 분들이 전한 말들이 적힌 현수막이었다. 나무 밑에는 노란빛과 나무 위에는 벚꽃의 분홍빛이 조화로웠다. 추모의 의미보다는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우리를 반기는 느낌이었다. 운전기사님이 저 멀리 세월호가 보인다며 창문을 보라고 하셨다. 작게나마 보이는 붉은 두 건물 사이 눕혀진 배. 배 머리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 모습은 처참했다. 세월호는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느라 지친 것 같았다.

유가족 분들은 배 인양현장을 지켜보며 철조망 앞에서 농성중이셨다. 지금은 세월호가 보이는 위치에서 인양작업을 지켜보고 있지만 원래 허락된 농성위치는 철조망 입구 옆 쪽, 컨테이너로 가려져 세월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고 하셨다. 더 이상 무엇을 숨길게 있어서 배조차도 못 보게 하려했는지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없었던 이동식 공중화장실도 투쟁해서 얻어내셨다고 하셨다.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얻어내야 했다는 사실들이 말문을 막히게 했다.

 

다른 대학교 학생들이 작은 포스트 잇들을 붙여 큰 세월호 리본모양을 만들어온 화지를 보고 유가족 분들이 너무 고마워하셨다. 들고 같이 사진을 찍자며 선뜻 말을 걸지 못하는 우리를 알아채셨는지 먼저 오셔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농성장 한 편에서는 리본을 만들고 계셨다. 벌써 3년째, 노란 리본은 수없이 만들어졌고 매번 새로운 사람들의 가방과 옷에 걸렸을 것이다. 물에 뜨는 소재의 리본을 보며 상상해본 적이 있다. 리본이 한가득 모여서 배를 만들고 4월 16일로 돌아가 모두를 구조하는 상황을.

 

기억을 조립해둔 것 같은 기억교실

복원된 기억교실. 원래 교실보다 협소하고, 학생들이 남겼던 생활의 흔적들도 사라져 인위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혜원 기자

참사 당시 단원고등학교 3학년 재학생들이 평소 가까웠던 2학년 재학생들의 영정을 들고 찍은 우정사진. 처음에는 희생자 학생들의 사진에 그들 각자의 영정을 합성한 것으로 오해했지만, 언니 오빠 형 누나들이 동생들의 사진을 들고 찍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혜원 기자

 

간단히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뒤 도착한 기억교실은 본래 단원고 교실보다 협소했다. 모델하우스 같은 느낌이었다. 그 모형에 세월호 희생자분들이 앉아있을 자리는 없었다. 꾸며놓은 장식들은 형식적으로 그들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었을 뿐, 쓸쓸했다. 제 위치를 지키려고 써둔 번호였겠지만, 물건마다 붙어있는 숫자가 적힌 종이들은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그날의 기억을 조립하는 느낌이었다. 억지스러웠다.

몇 책상 위에는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단체사진이 있었다. 처음엔 이상하고 괴기스러웠다. 알고 보니 친했던 선, 후배 사이에서 먼저 떠난 후배들을 기억하는 마음에 선배들이 후배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그제야 가슴이 먹먹해졌다.

주인 없는 인형들, 온기 없는 교복마이, 사용한 흔적이 없는 실내화와 필기구들. 왜 진작 사주지 않았을까. 그 축구화도, 최신 게임도. 그렇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언제 사주려고 했을지는 몰라도 부모 마음이 다 그런 것 같다. 사주지 못 한 이유도 결국 자식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순간 복받쳤던 원망스러운 감정들이 가라앉았다.

 

2016년 4월 당시 안산 단원고등학교에 보존되어 있었던 기억교실의 모습.

2016년 4월 당시 안산 단원고등학교에 보존되어 있었던 기억교실의 모습. 창틀에 걸레가 널려있는 등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이다. ⓒ김주환 기자

안산 세월호 참사 정부합동분향소. 내부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이혜원 기자

 

안산에 위치한 정부추모합동분향소로 가는 길에도 노란색 현수막이 가득했다. 다들 잊지 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등의 비슷한 얘기를 썼지만 분명 전하는 마음은 각자 달랐을 것이다.

뉴스와 사진으로 보던 합동분향소는 한적했다. 분향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모든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막상 들어가니 촬영을 할 곳도 아니었다. 한 눈에 담기지도 않는 수많은 영정사진들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었구나. 304명의 죽음과 9명의 미수습자 결과가 억울했다. 영정사진 양 옆의 전광판이 시민들의 문자메세지와 희생자분들의 사진들로 분향소를 밝히고 있었다. 분향소 안에서 유일하게 밝은 빛이었는데도 너무 아픈 빛이었다. 반면 서로의 마음이 바삐 오가는, 하지만 말소리 하나 없는 분위기는 ‘진짜 슬픔’을 내려놓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의 시간이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이 곳이 마음 놓고 울기에 적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란 리본을 걸었다고 몸 수색을 당했었던 2014년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저 노란색의 리본일 뿐인데,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달고 다니는 것뿐인데, 정치적인 물건으로 인식을 굳히고 추모의 본질적인 의미를 변질시킨 사람들이 미웠다. 추모하려고 사들고 간 백합꽃조차도 경찰 차벽에 가로막혀 광화문 광장 분향소에 두지 못하고 집으로 그대로 들고 왔던 기억도 떠올랐다. 세월호 인양은 늦춰졌고 특조위는 진상규명 활동도 제대로 못한 채 강제 해산되었다. 아직도 세월호 7시간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는 구속되었고 광화문 광장엔 물대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세월호는 이제 인양되었다. 불통의 벽을 직면하고 별 다른 방법 없이 부딪치기만 했던 3년이라는 시간이 어쩌면 그렇게 헛된 기다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잊혀졌다. 하지만 매번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월호는 인양된 것이다. 더 기억하고 더 울어야한다. 더 모여서 더 외쳐야한다. 그럼 미수습자 9분도 돌아올 것이고, 7시간의 비밀도 밝혀질 것이고, 특별법 또한 제정될 것이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앞으로 갈 길 또한 멀다. 인양이 되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세월호 인양은 세월호 참사의 또 다른 시작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우린 더 알려야한다. 진실과 사실의 그 미묘한 차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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