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7 (화)

대학알리

한국외국어대학교

덕질의 세계_필기구 덕질

아이 해브 어 드림

머글들은 필기구 덕후들에게 모욕감을 준다. 뭐 그런걸 덕질하냐는, 그렇게 쓸모 없는 데 쓸 돈 있으면 자기 달라는 핀잔을 주며 필덕들의 깊은 믿음을 시험에 들게 한다. 하지만 필덕들에게는 꿈이 있다. 필덕과 필덕이 아닌 사람의 자손들이 언덕 위 조그만 동네 문구점에서 손에 손을 잡고 서로에게 샤프를 골라주는 바로 그 꿈이…… 

 

마이너 덕질. 필덕

코스메틱(화장품) 덕후들이 립스틱의 미묘한 발색샷 색깔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머글들에게 하는 질문과 필덕들이 제도 천과 P205의 필기감 차이를 모르는 범인들에게 하는 질문은 같다. “이걸 몰라?”

  • 이마이크로의 제도 1000은 일본의 필기구 제조사인 펜텔 P205의 카피제품이다. 디자인과 부품들의 크기까지 모두 똑같지만 내구도와 필기감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가격도 크게 차이난다.
  • (P205 6000원, 제도 1000은 당연히 1000원)

생활밀착형 덕질로서 필덕과 코덕은 공통점이 많다. 다만 범인들이 봤을 때 필덕이 코덕보다 납득이 안 된다. 코덕은 기능과 색이 다른 여러 가지 화장품들을 모으지만 필덕들은 별 차이도 없는 것 같은 필기구에 돈을 쓰기 때문이다. 필통에 샤프를 4개, 샤프심을 3개씩 넣고 다니며 번갈아 쓰는 모습은 일반인들에게 잘 이해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 샤프들이 주는 필기감은 엄연히 다르다.

  • 기자가 과거에 실제로 휴대하고 다녔던 필통과 필기구. 샤프만 7자루다. (2G 폰카메라로 찍은 과거 사진이라 화질이 선명하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필기구의 필기감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샤프를 예로 들어보면, 쥐는 느낌 (그립감), 꽁지를 누를 때 나는 느낌(노크감), 1회 노크당 샤프심 분비량 등과 같은 변수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사용자에게 주는 필기감의 차이는 미묘하나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필기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유일무이한 경험의 조각을 소유하는 것이다. 각 필기구마다 사용자에게 주는 느낌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필덕들은 그 ‘경험’을 사랑하고 수집한다. 그것은 휴먼 비잉 사이언스의 보고이자 섬세한 아-트 그 자체다. 필덕들은 필기구들의 미묘한 필기감 차이를 무섭게 감지해낸다. 필덕들은 섬세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솔로 여러분 필덕들을 데려가세요. >////< 

 

덕질 라이프

 

커뮤니티- 여느 덕질이 그렇듯, 필덕들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 역시 존재한다. 가장 큰 필기구 커뮤니티는 “샤프연구소TM” 이라는 곳으로 회원수는 육만 팔천명에 육박한다. 여러 가지 필기구에 대한 리뷰와 지식들을 쌓을 수 있는 곳이다.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한다. 가공할 만한 양의 수집품을 모으고 필기구에 대한 엄청난 내공을 쌓은 사람, 돈이 많아서 50만원이 넘어가는 만년필도 손쉽게 지르는 사람, 전국의 동네 문방구를 순회방문 하면서 숨겨진 희귀템을 찾는 사람 등…

 

단종 제품 시장- 회사가 생산을 중단하여 더 이상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한 필기구들은 인터넷에서 비싸게 거래된다. 단종 필기구들은 개인에게 소장되어 과시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실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단종된 모델을 사용하는 것은 시장에서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희소한 필기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싼지라 실제로 쓰려면 강한 심장이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싼 돈을 들인 희귀한 모델일수록 사소한 스크래치 하나에도 엄청 민감해진다 (애지중지).

 

유명한 단종들

 

pg시리즈

문구점 진열대에서 보았던 PG5를 아는가. PG5의 제조사인 일본 펜텔은 PG시리즈 중 0.5 심을 사용하는 PG5와 독특한 0.2심을 사용하는 PG2를 제외하고 모두 단종시켰다. 과거에는 PG4, PG7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4만 원대에 거래되고 있으며, 샤프심과 케이스가 달려있는 세트는 ‘풀셋’이라 불리며 더 비싸게 거래 중이다.

사진- 샤프연구소tm

 

펜텔 메카니카

메카니카는 펜텔 PG시리즈의 고급형 모델이다. 주로 플라스틱 케이스와 같이 판매되며, 케이스 안에는 샤프심과 훈장, 정품 보증서 등이 들어있다. 샤프심경도 0.3과 0.5 버전이 있으며, 0.5 버전이 좀 더 희귀하다. 손으로 쥐는 그립 부분을 돌리면 샤프 촉을 보호하는 원통이 나온다. 80년대 중반에 단종되었으며 단종된지 꽤 오래된 편이라 구하기 어려운 편. 80년대에 제작된 신형은 9만원 선에서 거래 중이며, 더 오래된 구형, 초구형은 20만원~30만원을 웃돈다.

기자가 지금도 소장 중인 메카니카 신형 0.3 사진   

 

파카 듀오폴드 (1, 2세대)

이 만년필은 기자가 고등학교 때 돈을 악착같이 모아 산 인생 첫 번째 금촉 만년필이다. 촉의 금과 백금의 색의 조화는 예술 그 자체다. 1세대는 화살, 2세대는 깃발이 새겨져 있다. 조각이 너무 세련되고 깔끔해서 케이스에 곤히 누워있는 나의 친구를 보며 아름다움에 혼자 탄성을 지른 기억이 난다….(덕후의 간증). 무른 금속인 금을 사용했지만 촉은 단단한 강성이다. 

사진- 샤프연구소TM

하악하악- 수집으로 컬렉션이 생기면 가끔 자신의 컬렉션을 펼쳐놓고 필기구 몇 개를 꺼내 써보며 필기감을 만끽한다. (하악..하악..샤프찡 잘써진다능!! 하앜 만년필찡 잉크들어간다능!!) 기자도 케이스에 곤히 잠들어있는 만년필들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필기구는 크게 사용 여부에 따라 실사, 반실사, 소장으로 나뉘어진다. 실사는 실제 사용의 준말로써 필통에 넣고 굴리는 필기구들이고 반실사는 원래 소장용이었는데 가끔 실사용으로 꺼내 쓰는 필기구를 뜻한다. 실사 전선의 필기구들은 생활 스크래치에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소장용과 실사용 필기구의 구분은 꽤 뚜렷하다. 

필기구 덕질의 끝 만년필

기자가 소장/사용했던 만년필들.

약 파는게 아니고 만년필은 살아 숨쉬는 생물과도 같다. 만년필은 정교하고 꽉 찬 글씨체를 만들어내는 샤프나 볼펜과는 달리 쓰는 동시에 번지면서 글씨에 인간적인 빈틈을 만들어낸다. 만년필을 타고 흐르는 잉크는 혈액과 같은 인간적인 따스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차가운 도시남자지만 내 만년필에게만큼은 따뜻하겠지..) 또 오래 쓸수록 만년필은 성장한다. 만년필은 사용자의 필기 습관에 맞추어 촉의 특정 부분만 주로 닳아지는데, 그러면서 사용자의 손에 맞는 최상의 필기감을 완성한다. 이는 굴곡을 견디며 성장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과 유사하다. 우리네 인생과 같은 만년필… 그 치명적인 매력에 만년필을 건든 필덕의 통장은 비어가는 것이다…! (내가 돈이 없는 이유는 다 만년필이 멋있어서야! 빼애애ㅐ애애애액!)

  • 번짐은 만년필에 인간적인 매력을 더한다. 사진- BERLIN REPORT

이렇게 살아있는 만년필을 대할 때 역시 친구와 이웃을 대하듯 친절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만년필 뚜껑은 절대 세게 뽑으면 안 된다. 만년필은 볼펜과 달리 잉크를 배출하는 부분이 금속으로 막혀있지 않아, 뚜껑을 세게 뽑으면 잉크가 그 힘에 의해 사방으로 튄다. 날 조심이 대하라는 만년필의 경고와도 같다. 만년필 잉크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사고를 방지하게 위해 뚜껑을 뽑지 않고 돌려서 빼는 만년필도 존재한다. 또 만년필은 주기적으로 따뜻한 물을 사용하여 닙과 잉크가 흐르는 부분을 세척해야 한다. 세척을 하지 않으면 잉크 찌꺼기에 만년필이 막힐 수 있고 금 함량이 없는 닙은 경우에 따라 부식이 일어날 수도 있다. 사람으로 치면 혈관이 막히는 경화증이 일어난다거나 얼굴에 여드름이 나는 셈이다. 만년필이 이렇게 인간적입니다. 시중에는 만년필 씻을 물을 대우는 ‘만년필 세척용 포트’를 판매하기도 한다.

  • 만년필 세척용 포트 사진- 럭셔리펜

만년필의 필기감을 완성하는 것은 단연 만년필 촉, 즉 ‘닙’이다. 닙은 크게 강성과 연성, 두 종류로 나눠진다. 강성 만년필은 촉이 단단하고 두꺼워 종이와 마찰시켰을 때 잘 구부러지지 않아 볼펜을 쓰는 것과 같은 필기감을 주며, 필기할 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연성 만년필은 촉이 부드럽고 물러서 가볍고 붓을 쓰는 것과 같은 필기감을 선사한다. 강성 닙에는 스테인리스를 주로 사용하는데, 금이나 크롬을 도금할수록 부드러워진다. 만년필 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골드 닙, 금촉은 금의 순도(14k, 18k) 에 따라서 필기감이 많이 달라진다. 금은 스테인리스보다 무르고 부식이 잘 안되어 연성 닙을 만드는 주 재료가 된다. 금촉을 가지고 있는 만년필 모델은 최저 20만원 선(ㅜㅜ)부터 시작하며 주로 고급 모델에서 많이 사용된다. 백금(플레티넘)을 쓰기도 한다

<강성>                                                                            <연성>

사진- 샤프연구소tm

 

탈덕은 없다.

기자는 10년째 필덕으로 살고 있다. 수집품들을 많이 처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좋은 펜과 샤프를 쓰고 싶고, 그렇게 하고 있다. 필기구의 세계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힘들다. 학창시절을 거치며 읽고 쓰는 것을 오래,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레 좋은 필기구들을 쓰고 싶은 마음에 커졌고 여전히 필통에 많은 돈을 쓴다. 아직도 대형 서점의 만년필 코너를 가면 가슴이 두근댄다.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필기감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필덕이 될 수 있다. 필덕질을 유별나게 보지 말자. 필덕과 손을 잡고 문구점에 가보자. 자신의 손과 딱 맞는 인생필기구를 득템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종혁 기자 hwase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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